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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훌쩍 자란 시간의 선물

영화 <보이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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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모사’의 속성 위에 ‘다큐멘터리’가 가진 일상성과 진정성을 덧입혀 이제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 칼럼을 쓰다 보니,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막상 추천하고 나면 주로 고맙다는 소리를 못 듣는 편이라, 어지간하면 알아서 취향대로 보시라고 둘러대는 편이다. 하지만 <보이후드> 덕분에 누구에게도 망설임 없이 권할 수 있는 추천작 하나가 생긴 것 같다. <보이후드>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모사’의 속성 위에 ‘다큐멘터리’가 가진 일상성과 진정성을 덧입혀 이제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동을 선사한다. 실제 12년 동안 성장한 주인공 메이슨 주니어와 함께 12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내 가족과 친구의 세월을 바라보는 것 같은 감흥을 준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 담겨진 사회의 변화도 흥미진진하다. 12년이란 세월을 신뢰와 믿음이 없었다면 함께 할 수 없었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스태프의 노력과 끈기는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니 마치 어느 날 12년이란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를 통해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19년의 변화를 겪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를 관객에게 선물하면서, 19년의 세월을 마치 친구처럼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더 큰 일을 벌였다. 12년 동안 촬영이 진행되는 영화를 기획한 것이다. 그렇게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 동안 캐스팅된 배우와 제작진은 단 한사람의 변화도 없이 촬영에 임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12년 동안, 매년 배우와 제작진을 만나 15분 분량씩을 촬영했다. 시나리오는 매 해 변화에 맞춰 새롭게 쓰고 편집했다. 가장 큰 모험은 12년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남자 주인공의 선택이었다. 텍사스 주에서 6살 엘라 콜트레인을 골라낸 감독은 실제 시간의 흐름과 실제 사람의 성장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감당하면서, 기어이 <보이후드>를 완성해 냈다.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다. 여섯 살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와 그의 누나 사만다는 싱글 맘 올리비아(패트리샤 아케트)와 텍사스에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메이슨과 사만다를 데리고 캠핑을 가거나 야구장에 데려 가며 친구처럼 놀아주지만 함께 살 수는 없다. 엄마의 일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메이슨은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똘똘하고 귀여운 엘라 콜트레인은 다행히 매력적인 소년으로 자라난다. 아역배우들의 성장과 함께, 에단 호크와 패트리샤 아케트는 어느덧 중년이란 나이가 어울리는 나이로 똑 같이 나이 들어간다. 심리적 성장을 대리 경험하게 하는 성장영화의 틀 안에 ‘진짜 성장’의 과정을 담은 셈이다. 메이슨 주니어를 중심으로 그렇게 <보이후드>는 그의 주변인물, 특히 가족들의 성장과정도 함께 담아낸다. 


12년이란 세월은 메이슨 주니어에게는 성인으로 자라나는 시간이지만, 그의 엄마 올리비아는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 그리고 마침내 교수가 된다. 그녀는 이혼한 전 남편 이외에도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졌다가 눈물짓는다. 메이슨의 누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따라하는 발랄한 소녀에서,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메이슨과 다른 시간 속을 살아간다. <보이후드>는 메이슨의 성장영화이지만, 관객의 관점에 따라 다른 성장담을 담는다. 누나 사만다의 시점에서 보자면 <Girlhood>가 될 것이고, 올리비아를 중심으로 보자면, 싱글 맘의 작은 성공담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발 물러나 지난 나의 이야기를 돌이켜 보자면, 또 나의 지난 시절에 대한 회고담으로도 읽힐 수 있다. 

  

<보이후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인물들의 성장담과 함께 2002년부터 2013년, 영화 속에 담긴 12년 간 미국 대중문화의 다채로운 변화다. 메이슨이 가지고 놀던 게임기가 닌텐도였다가 훗날 위로 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를 변화시킨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같은 온라인 매체의 등장과 그 변화도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담긴다. 또한 12년 동안 메이슨과 함께 자라난 연도별 팝 음악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영화 속 음악들은 그 당시의 문화상을 담아, 그 또래 소년들이 주로 들었던 노래들로 선별해 넣었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메이슨 역할의 엘라 콜트레인에게 또래들이 자주 듣는 음악에 대해 조언을 구했지만, 엘라가 워낙 복고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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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시련을 거치고, 훌쩍 어른이 된다는 성장담은 여러 픽션들 속에서 그려져 온 일종의 판타지이다. 먼지처럼 수많은 별 볼일 없는 시간이 쌓여 언제 나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훌쩍 자라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렇게 성장은 역시 일상의 한 과정이다. <보이후드>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메이슨의 성장을 통해, 촘촘하게 이어진 일상이 지금의 나를 이뤄낸 작은 발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이슨의 엄마는 떠나는 메이슨을 향해 삶이 끝나는 것 같다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그런 헤어짐 역시 새로운 시작이고, 우리 삶은 계속 이어져갈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남루하고 초라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도, 내 삶은 남들과 달리 특별한 것이 없다고 비관하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에게 내일은 찾아온다는 것을…….그리고 영화 <보이후드>는 말한다. 훌쩍 자라난 시간 동안,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어쩌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당신의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보이후드>는 관객들에게 시간을 선물하고, 그 시간을 되짚는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과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진하게 소소한 나의 시간에 박수를 쳐본 적이 있는가? <보이후드>와 함께 나의 과거에도 박수를 쳐주자. 당신의 시간은, 나의 시간은 그렇게 박수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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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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