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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되게 슬픈 이야기.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

실패도, 성공도 아닌 ‘컬트’ 영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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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은 거장이며 나 역시 그의 작품들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해 작품의 총체적 부분까지 분명 어딘지 모르게 불균질한 지점들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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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날이다. 조지 거쉬인의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의 ‘Summertime’ 이 울려퍼진다. 곧 한국의 유명 영화배우 안성기의 얼굴을 한 개그맨 이종세가, 한국의 유명 영화감독 배창호의 얼굴을 한 이발사 문도석의 가게에서 이발을 한다. 안성기가 유명하면서도 한창 여성들의 마음을 저격했던 섹시한 영화배우였던 시절이다. 그런 그가 찰리 채플린을 흉내낸 3류 개그맨이 되어 있다. 배창호는 또 어떤가? 지금은 독립영화 쪽으로 넘어가서 작품활동을 하지만, 80년대엔 ‘충무로의 스필버그’ 라 불리며 영화 흥행의 최전선에 서 있던 감독이다. 그런 그가 허름한 이발소를 경영하는 이발사를 '연기' 한다. 이 생경하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와 설정들을 하나로 합쳐낸 사람은 바로 이명세 감독. 이런 시퀀스가 존재하는 <개그맨>은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개그맨>은 언젠가 '4천만 국민이 깜짝 놀랄만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채, 캬바레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개그를 날리며 사는 개그맨 이종세의 이야기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 자신이 쓴 영화 시나리오를 현역 감독들에게 갖다 바치지만 문전박대만 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자신의 개그보다 훨씬 재밌는 상황이 닥쳐온다. 소총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선영이란 여자 (황신혜가 연기한다.), 평소 그를 영화감독이라고 착각하고 존경하는 이발사 도석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두려울 게 없어진 이종세는 마침내 큰 결심을 한다. 이 요소들을 모두 활용해서 직접 영화를 만들자! 그래서 이종세 '감독' 과 그가 '캐스팅' 한 문도석, 오선영은 함께 영화를 찍는다. 닥치는 대로 은행과 구멍가게를 털고, 심지어 사람도 쏴 죽여서 경찰에게 쫓긴다. 감독 이종세는 영화와 현실을 전혀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서 펜 감독의 1967년작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비슷해서 좋아라 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남은 두 사람인데, 도석은 자신이 지금 영화 ‘촬영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선영의 경우엔 영화촬영을 이유로 강도 행각을 벌이는 상황을 '현실' 이라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작품이 점점 독특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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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독의 꿈이 백일몽이 되던 순간


이명세 감독 얘길 좀 해야겠다. 군 복무 시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롤모델로 삼고 군장한 채 뛸 때마다 구호 대신 "스필버그, 스필버그"를 외쳤다던 그는, 80년대에 '한국의 스필버그' 인 배창호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다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이 긴 문장에 스필버그만 네 번이구만. <개그맨>의 기본 설정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코미디의 왕>(1983)을 많이 닮았으나 이 작품은 국내에 극장 개봉을 하지 않았고 94년에 VHS로 출시됐다. 그래서 당대의 한국 관객들에게는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3) 생각이 많이 났을 것이다. 두 명의 어리바리한 남자들과 그들을 이끌어가는 당찬 여자의 구성.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보선언>과는 또 다르다.


<개그맨>은 이종세와 문도석이 살고 있는 공간과 80년대 한국이 가진 일상적 장소들을 충돌시켜부조화를 이루는데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종세의 아파트는 영화 속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 듯 찰리 채플린의 포스터와 붉은 공중전화 박스, 알록달록한 소도구들로 채워져 있으며 문도석의 이발소는 흰색의 인테리어로 이뤄져 있다. 조형적으로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작품은 그들이 사는 공간들을, 타일이 떨어진 오래된 영화사의 화장실과 회색빛 은행 내부, 허름한 구멍가게와 만화방, 싸구려 캬바레 조명과 교차시킨다. 보고 나면 아름다운 종세와 도석의 공간은 당대의 사회에서 환영 받지 못할 외계행성 같기만 하다. 그에 걸맞게 두 인물에게도 점점 우스꽝스럽고 다급한 상황들이 닥치며, 그들은 밀항을 해서 헐리우드로 가겠다는 꿈까지 품는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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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세의 공간 (위) 과 그들이 자주 가는 공간 (아래) 의 괴리.


종세와 도석이 찾아가는 공간은 예술에 대한 영감과 욕구를 찾는 자리다. 그러나 그가 영화를 찍고 싶어 찾아간 영화사 건물은 놀랄 정도로 허름하고 오래됐다. 환상적인 소도구와 세트는 없다. 작품은 이런 공간의 교체를 통해 영화를 찍는다는 건 ‘비참할 정도로의 현실’ 임을 알려준다.

 

극도로 과장된 코미디에 낄낄대다가도, 결국 <개그맨>은 사람을 서글프게 만드는 작품이다. 어쨌든 등장인물들은 영화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하는 의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종세라는 인물을 통해 비틀어 말하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계 관찰기다. 작품은 결말부에 갑작스러운 반전을 삽입해 관객에게 의미심장한 느낌을 받게 한다. 아마 당대에는 그런 반전과 결말이 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개그맨>은 흥행에 실패했다.

 

이 작품부터 시작해 2007년의 <M>까지 내놓은 여덟편의 장편들에는 모두 이명세 감독 특유의 불균질한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나 역시 그의 작품들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해 작품의 총체적 부분까지, 힘을 빼야 할 지점은 지나치게 과잉이었고 되려 힘을 줘야 할 지점들은 느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엔 이것이 감독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딱히 달라지지 않아서 그냥 자신의 스타일인가보다 싶다. 몇몇 작품들을 통해 관객들과 ‘행복하게’ 만날 때에도 딱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여전히 이종세처럼 영화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는 충무로에서 ‘80년대에 데뷔한 영화감독들’ 중 정지영, 강우석, 배창호 감독과 더불어 현재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됐다.


아마 첫 장편을 만들면서 1989년의 이명세는 뭔가 깨닫지 않았을까? 당대에는 채플린을 존경하는 안성기와 당돌하고 능글맞은 황신혜, 배우로서의 배창호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 여기에서 스필버그는 고사하고 1960년대에 아서 펜 감독이 했던 생각과 그가 구현하려 했던 이미지들을 받아들이고 응용하는 것 조차도 힘들었다는 걸 말이다. 이명세의 감독활동과 영화적 미학은 모두 좌절로부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개그맨>은 당대의 한국 영화계에 대해 은유적이지만, 가장 솔직한 생각을 기록한 작품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작품은 개봉 당시보다 이후에 입소문을 타면서 훨씬 더 많이 사랑받고 거론되는 ‘컬트’가 되(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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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의 마지막 나레이션은 에드가 앨런 포우의 시인 <꿈 속의 꿈>의 인용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꿈속의 꿈인가, 아니면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어쩌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어야만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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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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