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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은 성공하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명세에 따르면 그의 영화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시이고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라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감정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인터뷰나 기자 간담회에서 했던 이런 말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내러티브 위주의 정상적인 영화로 보지 말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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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이명세가 비평가들의 일방적인 격찬을 받은 영화는 단 한 편밖에 없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말이죠. 그나마 호평을 받았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후 그의 영화들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은 늘 그저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명세적인 영화였던 <첫사랑>은 지나치게 형식주의에 치우치고 자폐증에 빠진 실패작 취급을 받았죠. 솔직히 <형사>가 지금 정도의 평을 받고 있는 건 그 동안 평론가들이 물갈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세는 그 동안 크게 달라진 게 없거든요. 단지 더 과격하고 돈도 더 쓰고 있을 뿐입니다.

<형사>는 참 다루기 까다로운 영화입니다. 일단 관객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굉장히 허약한 내러티브를 대충 기둥으로 삼은 이미지의 폭격이지요. 그 이미지라는 것도 잘 정련되고 일관성 있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다짜고짜 스크린 위에 집어 던지는 것이고요.

전 재미있게 봤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작들에 익숙하기 때문에 꼭 그런 영화가 나올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죠. 기대 수준을 정확하게 맞추는 건 감상에서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특별히 좋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죠.

하여간 이명세에 따르면 그의 영화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시이고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라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감정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인터뷰나 기자 간담회에서 했던 이런 말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내러티브 위주의 정상적인 영화로 보지 말라는 것이죠.

올바른 경고입니다. 정말 그러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사>가 ‘일반 관객들’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관객들은 보다 치밀한 이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 영화에 이야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빈자리를 보완할만한 무언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노골적인 것은 이명세가 내세웠던 ‘감정의 흐름’입니다. 전 그걸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이런 종류의 감정을 묘사하려면 어느 정도 음악적인 리듬을 따라야 합니다. 빠른 부분과 느린 부분이 적당히 번갈아가며 나와야 할 거고 가끔 조를 바꾸어가며 모호한 느낌으로 관객들을 감질나게 만들기도 해야죠. 이명세의 <형사>에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몰아붙이기만 하죠. 영화를 보다보면 양쪽에 근사한 벽화들이 잔뜩 그려진 통로를 급행열차를 타고 질주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밖의 경치는 근사한데, 거기서 정서적인 무언가를 느끼기엔 모든 게 너무 빽빽한 거죠.

하긴 이명세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건 내러티브가 아니라 그런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리듬감의 결여였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그만큼 성공적인 영화였던 건 이야기들이 짧은 단락으로 나뉘어져 리듬을 처리하기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일 거예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는? 그 영화도 <형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리듬의 문제는 컸습니다. 단지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다들 자주 언급하지는 않았던 거죠.

이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결국 이 모든 건 지난 10년 동안 이명세와 평론가들의 상호 소통이 그만큼 나빴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90년대의 평론가들이 꾸준히 지적해 왔던 이명세의 내러티브 결여나 ‘예술적 자폐증세’와 같은 건 이명세의 영화들을 다룰 때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었던 것들입니다. 그건 분석보다는 라벨 붙이기에 더 가까웠죠. 이명세처럼 고유의 개성이 강한 스타일리스트의 경우, 라벨 붙이기를 한 뒤 그 단계를 넘어 라벨이 붙은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결과에 얼마나 도달했는지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 단계의 상호교류가 이루어져야 평론은 생산적일 수 있는 건데... 아무래도 이명세는 때를 그렇게 잘 만난 것 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약간 생각을 연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평론가들이 과연 영화감독들에게 얼마나 생산적인 영향을 끼치느냐는 거죠. 예를 들어 허진호 감독에게 국내 비평가들의 호의적인 반응은 오히려 조금 독처럼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외출>이 전작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멀끔한 매킨토시 컴퓨터 비슷한 영화로 나왔던 것도 그가 비평가들이 인정한 공식 속에서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박찬욱 감독의 경우, 렉스 리드처럼 개념이 외출한 비평가들의 무의미한 독설도 조금 섞여 있긴 하지만, <올드 보이>에 대한 보다 매서운 해외의 비평이 더 생산적이고 영화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요. 이 다소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가장 기가 살아있는 감독은 김지운이 아닌가 싶어요. <장화, 홍련>이나 <달콤한 인생>에 대한 국내 비평가들의 다소 건성이고 미적지근한 반응에 대한 이 감독의 정면 공격은 꽤 재미있거든요.

다시 <형사>로 돌아간다면, 전 여전히 이 영화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감정으로 짜인 현란한 음악과 시를 들려주는 영화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제 귀엔 그런 음악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명세는 자기가 정의하고 규정한 영역에서 성공한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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