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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데이즈>, 영웅이 아니라도 괜찮아
영웅 아닌 그들의 이야기
드라마가 죄다 로맨스 일색이던 것이 바로 얼마 전 같은데, 이제 공중파 드라마에서도 장르물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미스터리, 스릴러, 법의학, 호러 등 다양한 장르 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다. 그 중에서도 김은희 작가가 <쓰리데이즈>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많은 시청자들은 기쁨의 박수를 쳤을 터다.
당연하다. 대통령 암살 시도에 관련된 음모와 권력층의 이기(利己)를 다룬다는 드라마 소개는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싸인>, <유령>에서도 보여줬듯이 김은희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장르물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몇 안 되는 작가니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기대했던 것은 스릴러나 서스펜스보다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주인공 캐릭터 자체였다. 김은희 작가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모습으로 짜릿한 쾌감을 안겨주곤 했다. <싸인>도 그렇다. 이 드라마엔 그야말로 이상적인 히어로인 윤지훈(박신양 분)이 등장하는데, 그는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는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뛰어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정의와 욕망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정의를 택하는 데 이르면 시청자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다.
출처_ SBS
그런데 정작 막을 올린 <쓰리데이즈>의 주인공들은 이런 ‘영웅’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양진리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대통령 이동휘(손현주 분)가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경호원 한태경(박유천 분)의 동인(動因) 역시 정의나 도덕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친애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특히 제 목숨과도 같았던 동료들을 양진리 사건에서 모두 잃고 대통령 암살 사건에 가담하는 경호 실장 함봉수(장현성 분)의 사연이 드러날 즈음 시청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함봉수의 결단은 인간적으로 충분히 납득 갈만한 선택이거니와, 얼핏 이동휘가 자신의 잘못은 잊고 권력을 탐하는 인간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흥미로운 것은, 극이 진행될수록 시청자들이 점차 미완한 그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히려 그들이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동휘도 한태경도, 이상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의와 공공선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없이 인간적이고 나약해 상황에 흔들리고 결과에 괴로워할 뿐이다. 이런 모습은 의아함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연민을 부른다. 주인공의 선택에 자신을 대입해보았을 때 자신이 그들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데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에 고뇌하고 책임을 지려 하는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대통령 이동휘다. 초반부터 드라마는 양진리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를 드라마의 기저에 깔고 시작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캐릭터는 양진리 사건을 계획하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데선 더없이 잔혹하고 냉철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이동휘를 만든 것은 양진리 사건이고, 그 사건이 인간 이동휘에게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이미 완성된 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변화해 왔다는 것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끈다. 이동휘는 다시는 이런 비극을 맞지 않도록 권력의 정점, 피라미드의 꼭대기인 최고 통수권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이 옳은 선택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이 캐릭터는 때때로 <싸인>의 이명한(전광렬 분)을 떠올리게 하는데, 김은희 작가는 이미 권력으로 이상을 쟁취하려는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명한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린 바 있다. 마지막 회, 통한과 후회의 눈물을 흘렸던 이명한은 정의와 이상은 결코 힘으로 쟁취할 수 없음을 캐릭터 자체로 증명한다.
다행히 이동휘는 이미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그것을 되돌리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명한과는 차이가 있다. 시청자들이 그에게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을 느꼈다면 그가 항상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김도진과 재신그룹이 자신에게 벅찬 상대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려는 모습은 이런 후회가 지금의 그를 만들어왔음을 다시 한 번 암시한다. 현재, 대통령 이동휘는 명예도 권력도 버리고 진실을 밝히려고 하고, 사건 당시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과거의 잘못에 속죄하려 한다.
잘못된 선택을 했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던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몹시 인상 깊다. 양진리 사건과 관련된 특검의 수사가 발표되고, 답답함을 표하는 비서실장의 말에 이동휘는 왜 수사 발표가 사실인지는 묻지 않느냐고 신규진(윤제문 분)에게 되묻는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저에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이 정권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는 이런 대답에 노여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마 그는 바랐을 터다. 비서실장이자 조력자이기 이전에 오랜 시간 친구로 여겨온 규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가 그때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서슴지 않고 말해주길 말이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경호원 한태경도 눈여겨볼만한 캐릭터다. 한태경은 극 초반에 연달아 두 아버지를 잃는다. 친아버지 한기준(이대연 분), 그리고 경호원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일깨워준 경호 실장 함봉수. 드라마는 한태경이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함봉수의 입을 빌어 그에게 가야할 길을 일러주는데, 이는 그가 태경에게 단순히 상사 이상의 존재였다는 것을 짚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 안에서 함봉수와 한태경의 관계는 한기준과 한태경의 관계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한태경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던 ‘아들’에서 정의와 공동선의 가치를 깨닫고 그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초반부, 기밀문서98과 관련된 진실을 찾으려는 태경의 노력도 대통령을 믿으려는 발버둥도 바탕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친애가 깔려 있었다. 아버지 한기준의 죽음은 지금까지 아들로서의 한태경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였던 셈이다. 하지만 함봉수가 결국 정치적 음모에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된 순간 태경의 동기(動機)에는 함봉수라는 이름이 더해진다.
주인공이 대통령도, 재벌 총수도 아닌 경호원인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명확해진다. 드라마는 한태경이 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릴 것이다. 자신이 함봉수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경호원 일을 그만 둘 거라 말하면서도 태경은 그들이 좇던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본능적으로 그들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고 완성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윤보원(박하선)의 말에 크게 흔들린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출처_ SBS
이동휘와 한태경이 드디어 손을 잡았다. 이동휘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고 한태경에게 손을 내밀었고, 한태경은 아버지들의 명예와 신념, 그리고 진실을 위해 대통령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는 이동휘와 두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 사람의 성인(成人)이 되어갈 한태경의 연대는 앞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기대해볼만한 것이다.
영웅이 아니라도 좋다. 아니, 영웅이 아니라서 좋다.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하고 영웅적 희생을 외치진 않지만 오히려 현실에 발버둥치고 역경에 절망하며 뼈저린 실수를 통해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그들이기에 더 마음이 간다. 망설임 없이 말하고 싶다. 이 지난한 현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당신들은 분명 원하던 가치를 손에 쥘 것이고,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 이상의 의미를 남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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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