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그리는 로맨스는 꿈같다. 당차고 가난한 여주인공이 꿈도 사랑도 양 손에 움켜쥐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은 지난한 현실도 험난한 미래도 잊은 듯 행복한 미소로 결말을 맞이한다. 개인적으로 현실을 잠식하는 로맨스의 가장 큰 판타지는 이것이라 생각한다. ‘해피엔딩 이즈 마인!’ 더 이상의 고난은 없다고 땅땅땅 결론을 내리는 드라마의 결말들. 단언컨대 이는 자상하고 부유한 재벌 2세보다, 아름다운 외모로 모든 남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캔디보다 더 큰 환상이다.
출처_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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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두 커플의 앞날에는 행복한 나날들만 남아있을 거라고 말하며, 엔딩. 우리는 그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르지만 현실에서의 그 순간은 네버 엔딩 스토리의 한 순간에 불과하다. 우리는 남은 그 뒷이야기를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내야 한다. 동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으로서. 또 다른 어떤 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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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이 신주연(김소연 분)의 입을 빌려 이것을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나섰을 때 그 발칙함에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판타지를 파는 것이 바로 로맨스 드라마다.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이 내레이션으로 그것을 깨부순다니, 이 얼마나 도발적인가. 과연 이 드라마가 어떤 로맨스를 그릴 작정이기에, 궁금증이 든 것은 나뿐만이 아닐 테다.
드라마는 첫 화부터 흔하디흔한 로맨스물의 여자 주인공과는 차별화된 캐릭터 신주연(김소연 분)을 전면에 내세운다. 당당히 스스로의 연애와 성생활을 언급하며 집에 들어오겠다는 주완(성준 분)을 거절하고, 조금 전까지 죽고 못 살던 남자친구가 별안간 이별을 통보해도 남겨진 밥값에 더 분노한다.
‘어떤 연애에도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고, 어떤 이별에도 울지 않게 되었다’고 덤덤하게 읊조리는 내레이션은 사랑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30대 골드미스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민정(박효주 분)은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게 싫어 연애는 피하고 가벼운 데이트 메이트만을 고집하고 희재(윤승아 분)는 5년째 고시 공부 중인 연인 지승이 계속 꿈같은 소리만 해대는 것이 한심하고 갑갑하다. 사랑보다는 일을, 막연한 관념보다 치열한 현실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공감할 만한 현실적인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현실 위에도 로맨스는 선다는 것이다. 논픽션은 픽션을 능가하고 현실은 소설보다 몇 배는 더 허구적이고 흥미진진한 법이니까. 드라마 속이 아닌 각자의 현실에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절망하고 환희에 찬다. 물론 이것이 당연한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드라마가 아니기에 우리의 로맨스는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환상적이긴커녕 가끔 너저분하고 궁상맞기까지 해 한숨이 나올 정도다. 이쯤 되면 짐작이 갈 것이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은 그 당연한 모습을 그린다. 당신의 현실 속 로맨스는 과연 어떤지 물으면서.
출처_ tvN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며 자연스레 그들의 모습에 자신을 대입한다. 그렇기에 주연이 겉보기와는 달리 더없이 유약하고 어린 인물로 그려진 것에 여성 시청자들은 오히려 공감하게 된다. 주연은 현실의 장벽에 감정의 동요를 억지로 밀어내고 ‘쿨’한 척 가면을 쓰는 우리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종일관 이성적 판단을 내세우며 감정적 동요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에 상처받고 진심에 다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연애는 지옥이라 말하면서도 주연은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언젠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고된 지옥에서도 함께할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리라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웃으며 말하면서도 주연은 술 취한 그날처럼 휘청대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주연이
“사랑 따위 필요 없다고, 이제!” 외치며 스스로를 책망한다고, 혹은 헤어진 남자 친구와의 연애에 한 점 후회도 없는 것처럼 돌아선다고 그녀가 사랑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연은 사랑에 유약한 인간이다. 버리지 못한 여섯 개의 커플링은 스스로의 말처럼 쓰디쓴 교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련일 것이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 완성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
“좀만 기다려, 이번엔 다 버릴 거야! 진짜야!” 주완과의 새로운 연애를 꿈꾸며 반지를 향해 외치는 대사는 그래서다.
그녀에 대해 스스럼없이 피도 눈물도 없을 거라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여리고 착한 사람인지. 주연은 주완의 품속에서 눈물을 터뜨리면서도 세령에 대한 마음을 끊어내기 위해 자신을 불러낸 태윤에게 결코 모진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아마 그녀 자신도 모르지 않았을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이타적이고 헌신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차마 그 앞에서 우스갯소리로 당신 나쁘다는 농담도 건네지 못하고 집에 와서야 서러운 눈물을 터뜨리면서 주연은 이 감정이 자신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두렵기까지 했을 테다.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갑갑함보다는 이해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녀가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헤매는 모습은 외면의 성취와 내면의 성숙이 유리된 우리 대부분을 투영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렇게 웃어줬는데, 너무 차가웠어.” 냉정한 태윤의 질책이 그 어떤 것보다 쓰라려 울음을 터뜨리고, 다정한 태윤과 세령의 모습에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주연은 쉽사리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훌륭한 성취를 이루어 낸 그녀도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선 미성숙한 아이일 뿐이다.
모두가 가끔은 사랑에 눈물짓고, 혹은 어린아이처럼 헤매기도 한다는 것을 섬세하게 짚어낼 때면 이제야 왜 이 드라마가 이토록 현실적인 인물들을 작품 속에 투영해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현실 위의 로맨스, 철저히 비(非)관념적인 상황에서도 피어오르는 이 불확실한 감정은 우리의 현실을 다양한 색깔로 물들이고 자신조차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해 준다. 그것이 어떤 색깔이건, 어떤 모습이건 관계없다. 결국 스스로의 불신을 깨부수고 새로운 우리를 발견하는 과정에 한 발을 내디뎠다면 충분하다. 심지어 그것이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인생의 순간을 끊임없이 견뎌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로맨스가 필요해>라는 제목은 그래서 참으로 적절하다, 역설적으로 이 작품이 결코 로맨틱한 판타지를 제공하는 드라마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말한다. 당신의 로맨스는 결코 판타지가 아니고, 가끔은 구질거리고 지긋지긋하겠지만 결코 그것이 당신의 인생에서 로맨스를 빼 놓고 갈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힘들고 어려워도 그 이상으로 담보할 가치가 있는 각본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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