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이야기가 우리가 이미 아는 결말을 맞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복수에 실패했다면,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며, 항우가 유방의 군대를 격파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 도하를 포기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수없이 많은 선택지 중 테이블 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하다.
출처_ SBS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궁금한 이야기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혹성 B612호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구에 남았다면 어떨까. 그 광활하고 막막한 사하라 사막에서도 지구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다정한 소년의 눈에 이 별은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메마르고 뾰족뾰족하고 험한 지구에서 외롭다고 소리치던 그가 이내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처럼, 오래오래 살아 나이 들어도 그 고운 심성을 잃지 않았을까?
여기 그 의문에 답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 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외계인, 도민준(김수현 분). 400년을 홀로 살아온 외로운 어린 왕자 같은 이 인물은 꼭 내 질문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의 인생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어린 왕자처럼 지구에 불시착한 민준은 이화의 인생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첫 만남에서부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이화를 구하고 그녀에게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불어넣었으니 말해 무엇 할까. 짧은 몇 컷의 연출만으로도 시청자들은 그가 이화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얼마나 다정한 존재인지 쉽게 짐작 가능하다. 흡사 그 다정함으로 ‘나’에게 잊지 못할 존재가 된 어린 왕자처럼, 민준은 첫 만남부터 이화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인연이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초반부, 민준이 송이(전지현 분)에게 모진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시종일관 정이나 친애 따위의 인간적 감정에 냉담한 자세를 고수하던 이유는 그것일 테다. 민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전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를 구한 이화.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진심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민준은 알고 있었을 테고 이화를 잃은 아픔은 오랜 세월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아픔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 만큼 시청자들은 냉소적인 그의 태도가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두른 방어막임을 이해한다. 갑각류 동물이 제 여린 살을 감추기 위해 두른 갑옷처럼 민준은 단단한 외피(外皮)를 휘감고 인간 사이를 표류한 셈이다. 달리 마음 붙일 사람을 찾았더라면 좋았으련만, 상처는 너무 컸고 설상가상 그는 긴 세월 이기적이고 추한 인간들의 모습을 목격해야만 했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그 스스로 내려놓았다기보다 강제로 잃어버린 것에 가깝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지구인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더군요.” 일견 시니컬하게 들리는 그의 대사는 오랜 시간 그가 얼마나 인간들에게 지쳐왔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귀환을 3개월 앞둔 지금, 그의 인생에 불쑥 누군가가 끼어든다. 무식하고 오만하고 시끄러운 그녀, 천송이(전지현 분). 예의라곤 모르는 그녀는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준의 인생에 제멋대로 한 발을 걸친다. 민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진저리나게 싫었을 법도 하다. 이웃지간이라는 말로 한밤중에 민폐를 끼치면서도 큰소리고, 자신을 제멋대로 부려먹으면서도 미안한 줄 모르는 그녀의 모습은 민준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미처 모르지 않았을까. 이 제멋대로인 여자가 자신이 두른 단단한 껍질을 녹일 수 있는 단 한 사람임을. 조용히 해 달라 부탁했더니 대뜸 화풀이를 하고 술에 취해 주정이나 하는 여자임에도 민준은 그녀가 밉지가 않다. 밉기는커녕 어딘지 아파 끙끙 앓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 은근슬쩍 병원을 가는 척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기도 한다. 아마 터무니없는 별점을 지어내 읽는 낯 뜨거운 짓을 하면서 민준은 스스로 궁금하지 않았을까.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출처_ SBS
정답은 간단하다. 민준 자신이 기나긴 시간 동안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아닌 척 하지만 그는 ‘대답해 보렴.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수 있겠니.’ 라는 물음에 말을 잇지 못한다. 홀로 외로이 긴 시간을 버텨야 했을 그의 마음속에 결국 시들지 않은 장미 한 송이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이름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연약하고 까다롭지만 사실은 다정한 장미 한 송이.
분명 처음은 제가 목숨을 구해준, 이화와 닮았던 어린 소녀가 송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어쩔 수 없이 생긴 호기심일 뿐이었다. 송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그 이상의 것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 송이가 끊임없이 민준을 불러대던 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은 우연이고 오해였지만 민준은 그 인연의 끝에서 자신을 간절히 부르는 송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그를 보며 시청자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민준이 기나긴 시간 기다려온 것은 그의 냉소를 부정하고 마음 속 깊은 곳 숨어있던 다정한 그 자신을 불러 줄 누군가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송이는 사랑이기 이전에 민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끝끝내 부정해온 인간에의 애정을 일깨우고 사랑하는 것의 기쁨을 알려준 사람. 그녀가 뛰어든 후 민준의 세계는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보편적 세계에서 이세계(異世界)로 변하지만 정작 도민준은 통속의 삶과 유리된 외계인에서 평범한 한 남자가 된다. 이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언제나 회의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이 남자는 어느 순간 그 불확실한 감정에 정처 없이 휘둘린다. 부러 냉정한 눈으로 일별하고 등을 돌렸던 사랑과 우애 따위의 감정은 새삼스레 그의 몸을 덥히고 민준은 송이로 인해 자신이 그 동안 얼마나 외로운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사랑이란 묘하다. 몰랐을 땐 느끼지 못하지만, 일단 한번 길들여지고 나면 그간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독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찬란한 만큼 그 빛이 꺼졌을 때의 어둠이 짙은 것과 유사하다.
“나는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우리 아빠처럼 갑자기 사라질 사람 말고, 진짜 평생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줄 사람.”
그렇기에 자신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송이의 말에 그가 느꼈을 상실감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영원히 자신 곁에 있어달라는 송이의 소망은 곧 돌아가야 하는 그로서는 절대 해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뼈아픈 실망감을 안고도 민준은 망설이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라도 흉수를 막으려 한다. 힘을 아끼고 정체를 숨기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송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나서는 데에 이르면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다정하고 또 다정한 존재인가.
오랜 시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점점 메말라갔을 테지만, 그의 천성은 바위라기보다 나무이다. 바위는 비와 바람에 닳지만 나무는 아무리 마르고 늙어도 살아있는 것이기에 비와 바람에 되살아난다. 나무가 바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민준도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다짐하듯 내뱉는 못된 말이 어쩐지 슬프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본디의 다정한 성품을 버리지 못했기에 그는 한 줄기 바람에 흔들리고 촉촉한 빗줄기에 되살아난다.
이 드라마의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길들여진 그가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는지 느끼고,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하는 해피엔딩을 그려왔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홀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가 사실은 그 누구보다 다정한 시선으로 인간들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400년간 얻지 못한 것을 손에 움켜쥐게 될 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가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맺건 내가 그것은 일종의 해피엔딩이리라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고향별로 돌아가건 그렇지 않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길들였던 그 찬란한 시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확신한다. 민준이 결국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길들임이 얼마나 근사한지 알게 해 줄 무언가를 얻으리라고. 그리고 어린 왕자는 오래오래 지구에 머무르고도 그의 따뜻한 심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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