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간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가겠다는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창밖의 풍경은 온통 새하얗다. 고속도로는 물론 주변 산과 들판이 눈으로 뒤덮였다. 지금이 겨울이었나? 잠에서 덜 깬 상태라 잠시 판단력이 흐릿했다. 지금은 3월 중순이다. 중부지방에 비가 내릴거라는 뉴스는 봤지만, 눈이 온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이다. 어쨌거나 버스 창밖의 풍경은 넓은 들판과 나무 사이마다 눈이 소복히 쌓여 겨울왕국으로 변했다. 버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마저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서울남부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휴게소까지 두 시간을 달려왔다. 잠시 쉬고 두 시간을 더 달리자 통영에 도착했다. 평일 낮이라 도로에 차량이 없어 예정시간보다 30분 일찍 왔다. 터미널 앞 택시를 타고 통영중앙시장 부근에 내렸다. 숙소를 예약하진 않았지만 통영 관광은 이곳에서 시작하면 수월해진다. 여러 섬의 관문인 통영항 여객선터미널과 둘러볼 곳이 많은 미륵도가 멀지 않고, 두 개의 전통시장(중앙시장, 서호시장)도 걸어서 갈 수 있다. 해안 전망이 탁월한 동피랑마을과 남망산 조각공원, 이순신공원도 가까운 편이다. 저렴한 모텔과 게스트하우스도 사방에 널렸다. 굳이 비싼 호텔이나 리조트에 머물지 않아도 대부분의 객실의 바다 전망은 환상적이다.
경상남도 통영, ‘동양의 나폴리’라는 수식어는 진부하다. 통영은 통영 그 자체만으로도 빛난다. 다른 나라의 지역과 굳이 비교할 필요 따위도 없다. 서울을 두고 ‘동양의 OO’라고 부르면 서울 시민들은 과연 좋아할까? 게다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실제 바다를 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짙은 회색빛의 서해나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동해와 달리 봄날에 찾은 남해는 따스하고 눈부시다. 해안 도로가 유난히 많은 통영에서 바다 위 반짝이는 윤슬이 무척 아름답다. 통영 앞바다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에 둘러 쌓여 있어 탁 트인 전망은 아니지만 갑갑한 느낌은 아니다. 바다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광경을 보기는 어렵지만 아침 저녁으로 통영 전역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에 자연의 신비를 느낀다.
TV 프로그램의 영향인지 외지에서 온 여행객들의 통영 여행 코스는 너무 획일적이다. 동피랑 벽화마을에 오르고,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소매물도 등대 섬을 본 다음, 기념품으로 꿀빵을 산다. 여행사 단체관광이든 개별 자유여행이든 움직이는 동선은 별반 다르지 않다. 언론에 몇 차례 소개된 식당과 카페는 줄을 한참 서야 겨우 맛을 볼 수 있고, 그나마 밖에서 기다리는 다른 손님 때문에 눈치껏 빨리 나와야 한다. 최근엔 드라마 영향으로 장사도와 욕지도 등이 뜨고 있는데 통영에는 이곳 말고도 가볼만한 곳이 무궁무진하다. 음식 맛은 어찌나 좋은지! 노량진 수산시장보다 훨씬 저렴하고 싱싱하다. 겨울과 봄을 잇는 기간에는 생굴과 도다리쑥국뿐만 아니라 멍게, 도미도 같은 해산물을 만끽할 수 있다.
나부터 통영의 일반적인 여행 패턴을 벗어나고 싶었다. 의외로 방법은 간단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흔한 여행 블로그 후기 대신에 ‘통영’을 주제로 한 책을 찾아봤다. 의외로 많았다. 통영 토박이들이 들려주는 통영의 역사와 숨은 명소, 식당, 계절별 음식이 넘쳐났다. 특정 지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제주도’ 다음으로 통영을 소개한 책이 많지 않을까? 3년 전 서울에서 내려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 의 저자 정환정과 함께 그가 추천한 장소를 찾아 다녔다. 대중교통과 두발만으로 통영 여행을 즐기는 코스를 구성해봤다. 가까운 거리는 가급적 걸었다. 통영 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이 글을 참고하여 각자 여행 일정을 짜보자. 통영을 즐기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통영 주변에는 거제도와 한산도, 연대도, 비진도, 장사도, 욕지도, 사량도, 소매물도, 대매물도 등의 유명한 섬이 많지만, 섬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일단 내륙에 집중하겠다. 여행에 앞서 정환정 저자와 간략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와 통성명을 하고 보니, 필자와 동갑이었다.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것까지도 같은데, 나와 달리 그는 결혼을 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획일화된 삶을 따르기 싫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기로 마음 먹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여인이 나타났고 얼른 결혼했다. 부부 모두 서울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 영역에 누군가 침범하는 게 싫었다. 부부는 서울 밖의 삶을 준비했고 처음엔 춘천과 전주를 꿈꾸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좌절하다가 아내의 직장이 통영에 분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5분 만에 이사를 결심했다.
통영을 처음부터 좋아했나?
처음부터 통영을 좋아한 건 아니다. 첫인상은 별로였다. 2005년 한여름에 업무차 통영에 처음 와서 나시티만 입고 다녔다. 서울 올라갈 때 보니 팔에 수포가 생겼더라.
밥벌이는 어떻게 하나?
게스트하우스(뽈락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일간지나 월간지 등에 여행 칼럼도 쓴다. 계절별로 수입은 차이가 크다. 게스트하우스는 11월이 가장 비수기이다. 원래 전공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첫 직장에서 카메라에 손을 대고서 지금은 사진이 직업(프리랜서)이 되었다. 좀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게스트하우스에 사람이 북적북적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 막 2세가 태어났지만, 자녀교육은 어떤가?
최근 서울에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을 때 통영은 하루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의 공기는 정말 맑다. 바닷가에서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자본의 질로 서울에서 자녀 교육을 시키느니 통영의 좋은 환경에서 가르치겠다.
원래 여행을 좋아했나?
그렇다. 전세계 안다녀본 곳이 거의 없다. 돈을 벌면 여행 가서 다 쓰곤 했다. 아프리카에 몇 달 머물면서 사진으로 찍고 쓴 글로 책 『나는 아프리카에 탐닉한다』 도 냈다. 내 여행의 모토는 ‘어슬렁어슬렁’, ‘두리번두리번’이다.
통영에 오는 여행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여유가 너무 없다. 꽉 짜인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통영에 왔을텐데 이곳에 와서도 좀처럼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한결 여유를 갖고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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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면서 남해의 땅과 바다는 서로 닮아가기 시작한다. 땅에서 새순이 돋는 것과 같은 시기에 바다는 검푸른 색이 조금씩 옅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고운 꽃에 앞서 울퉁불퉁한 쑥이 먼저 고개를 내밀면 그동안 ‘파랗다’고 이야기하던 바다가 마침내 짙은 녹색으로 조용히 빛난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아름다운 변화다. 어쩌면 나 혼자 몰랐을 수도 있다. -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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