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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번을 흔들려도 견뎌야 하는 시간, 어쨌든 그게 중년(中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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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손가락은 결국 문고리를 잡아당기지 못한다. 평생의 사랑인지를 확신하기에 나흘이 너무 짧아서? 가족을 버릴 수가 없어서? 아니다. 그녀는 이미 너무 여러 가지를 알고 있어서다. ‘환’과 ‘멸’ 사이는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 어떤 아름다운 환상도 필연적으로 환멸이 되고야 말리라는 것을.

사랑은 언제든 온다. 이 말은 사람은 계속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쉰에도 예순에도 새로운 사람에게 가슴 떨릴 수 있음을 쉽사리 이해하는 스무 살은 없다. 책 제목처럼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되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어른이 된 지금,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른 역시 매일매일 천 번씩 흔들린다는 것. 쉰 살도 예순 살도 흔들린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흔들린 뒤 스스로 환멸스러워진다는 것?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것도, 이 환멸의 씁쓰름한 맛을 알게 된 뒤부터다. ‘환멸’은 꿈이나 환상이 깨졌을 때 느끼는 괴롭고 속절없는 감정을 뜻하는 단어이다. ‘환(幻)’과 ‘멸(滅)’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흔들리면서도 변함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는 우주의 영역에 속하는 그 비밀을 조금이나마 염탐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의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리프)는 ‘환’보다 ‘멸’에 가까운 삶에 속한 중년 여성이다. 한때는 문학 교사였지만 지금은 작은 마을에서 아이 둘, 남편과 함께하는 주부 생활을 십수 년째 이어가고 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는 서랍장 속 나프탈렌처럼 그녀는 서서히 닳아져갈 것이다. 그 사실에 문득 진저리가 날 무렵 한 남자가 나타난다.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이다. 그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그의 신분과 소속, 영혼을 표현하는 말은 ‘여행자’이다.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은 지금 정반대의 모서리에 놓인 존재들이다. 프란체스카가 거실 유리장 속에 장식된 도기 인형이라면 로버트는 세상을 떠돌다 잠시 낯선 집 창가에 내려앉은 나비이다. 얇은 날개를 펄럭이며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 나비 같은 남자는 많은 여자들을 매료시킨다. 자신이 도기 인형이나 가구가 되어버렸다고 의심하던 여자들은 특히 나비의 고운 날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여자는 그 나비를 따라 훨훨 날아가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여자는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개를 핀으로 고정시켜 지상에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 나비가 내 것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불가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더 위험하고 더 매혹적이다.

인형과 나비,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에게 닥친 사건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스파크, 운명, 단 한 번의 사랑. 무어라도 좋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무엇이 되길 간절히 바라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나흘이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우주 속에서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 오는 거요.”

남자는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물론 함께 떠나고 나서 어떻게 살아갈지 구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선택은 여자에게 넘겨졌다(이런 남자들은 늘 여자에게 선택을 맡긴다). 여자는 오래 주저한다. 남편의 차 옆 좌석에 앉은 채 손잡이에 손을 뻗을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녀에겐 아직 선택권이 남아 있다. 떠날 수도 있고, 남을 수도 있다. 환상을 좇을 텐가, 환멸을 삼킬 텐가.

프란체스카의 손가락은 결국 문고리를 잡아당기지 못한다. 평생의 사랑인지를 확신하기에 나흘이 너무 짧아서? 가족을 버릴 수가 없어서? 아니다. 그녀는 이미 너무 여러 가지를 알고 있어서다. ‘환’과 ‘멸’ 사이는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 어떤 아름다운 환상도 필연적으로 환멸이 되고야 말리라는 것을.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난 뒤 인형은 실상 자신이 홀렸던 건 나비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나비의 그 투명한 날개였다고 인정하게 될까? 나비의 날개는 또 다른 대상을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약했다고 위안하게 될까? 만 번을 흔들려도 견뎌야 하는 시간, 어쨌든 그게 중년(中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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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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