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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닿는 찰나의 순간을 꿈꾸며 - 『너는 모른다』 정이현

사람 사이에 끈이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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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람들은 그녀를 ‘『달콤한 나의 도시』의 정이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독자들은 『너는 모른다』를 두고 ‘정이현답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찬바람이 유독 기승을 부리는 1월 초순,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이현 작가를 만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던 생텍쥐페리의 말은 비단, ‘보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 이면에 있는 것을 살피는 사려를 베풀라는 거다. 많은 순간에, 진실은 해석에 가려지기 마련이고, 진심은 의도치 않은 말들과 표정으로 치장되기 쉽다. 그래서 종종, ‘너는 모른다.’

인생은 끝없이 배우며, 알아가는 여정이다. 나를 알고, 관계를 알고, 세계를 알아가는 여정.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과목이라 그럴까, 어느 것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쉬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이제 좀 뭘 알겠다 싶을 때면 금세 머리를 치는 깨달음이 따르기 일쑤. 아마도 마지막 날까지, 앎은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헌데 종종 우리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해버린다.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어른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자주 오해하며,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완전한 앎에의 도달은 거의 불가능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알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 네가 모르는 것들을 앞으로도 ‘너는 모른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행위다. 지식이 혹은 감정이 전해지는 행위. 그래서 사랑과도 밀접하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 선생도 말씀하셨지만, 반대로 사랑해서 알게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사랑은 앎을 추동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알아가겠다는 말이니까. 그렇다면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사랑하지 않는 ‘너’는 삼인칭이나 다름없다. 그때의 ‘너’는 하나의 이야기이고, 소문일 뿐이다.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300명의 어린아이가 죽었다는 뉴스보다, 가까운 친구가 아픈 일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 당연하다. 이 또한 인칭의 문제라고 마르틴 부버는 설명했다. 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나와 너’,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이다. ‘나와 너’는 동등한 관계이고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관계지만, ‘나와 그것’은 일시적인 주체와 객체의 관계다.

내가 아는 친구는 ‘너’지만, 아프리카의 익명의 아이들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삼인칭이다. 오늘도 뉴스에서 숱한 소식이 들려온다. 제삼자의 이야기들. 우리는 많은 경우 분노하고, 댓글을 달고, 운동에 참여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나와 너’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 분노와 열망, 지속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너와 나’의 세계에 따르면, 그(혹은 그녀)라면 몰라도, 너만큼은 나를 알아야 하는데, 정이현 작가는 말한다. 너는 모른다. 그러니까 너도 모른다. 혹은 너를 모른다고. 이제 우리는 이인칭인 ‘너’마저도 모르게 된 것일까. ‘너’라고 지칭할 수 있는 옆 사람조차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일까.

소설 속의 이 가족.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가족이라는 사회적인 고리로 이어져 있지만, ‘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서로에게 전혀, 관심 없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뭔지, 어머니는 집에서 뭘 하며 지내는지, 딸은 무슨 고민하고 있는지, 아들은 밤마다 나가서 뭘 하는지, 그리고, 막내딸 유지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곰곰이 추측해 볼 뿐, 뒤늦게 후회할 뿐. 그렇게 고개를 숙일 때마다, 표지의 그림처럼, 그들의 눈앞에는 구두코만 보일 뿐.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를 ‘『달콤한 나의 도시』의 정이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독자들은 『너는 모른다』를 두고 ‘정이현답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그녀다운 것을 보려면 그 전후의 작품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지금 여기의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전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에서 ‘문학은 진실과 거짓의 작은 틈새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녀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관계라는 거짓으로 둘러대고 있던 우리 사이의 진실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찬바람이 유독 기승을 부리는 1월 초순,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이현 작가를 만났다.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새 책이 반응이 좋습니다. 벌써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기사도 속속 올라오고……. 어떠세요? 체감하시나요?(웃음)

사실, 서점을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매일 체크하는 것도 아니라서 반응이 어떤지는 잘 몰라요. 피부에 와 닿는지는 모르겠어요.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면, 독자들의 평은 읽게 되거든요. 그런 거 보면서, 이렇게 읽는구나 생각하는 거죠. 상처를 받기도 해서 안 볼 때도 있었는데(웃음) 지금은 되게 재미있더라고요. 독자들이 읽고 쓰는 리뷰도 또 하나의 창작인 것 같아요. 새로운 텍스트가 되니까요. 인상적인 리뷰들은 본인 이야기들도 끼워 쓰잖아요. 그런 건 기억에 남아요.

이번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떤 얘기가 될지 모르는 상태로 화교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했어요. 관심이 있어서. 어떤 큰 그림도 없는 상태에서 인터뷰하고 조사하면서 인물들을 만들어갔어요.

화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둔 이유는요?

꼭 화교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한국 사회의 소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화교라고 생각했어요. 운명적으로 태어나봤더니 여기는 한국이고, 나는 외국인인 셈이잖아요. 내가 선택한 게 아닌 거잖아요. 재일교포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소수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식들은 화교 학교를 보내요.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모르고 혼란스러운 채로 성장해서 어른이 되고요.

그런 과정들이 한국 사회의 제도권 밖에서 안을 바라보게 하는 상징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히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보게끔 하는 거죠. 선 밖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선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해 역설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시 다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구나. 198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2008년의 옥영이 창밖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마흔이 넘은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렇지. 한국 여자들만 빼고.”
“그러네 정말. 그런데 나는? 내가 한국 여잔가?”
밍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중국 여자는 아니잖아.”(p.57)



독백하는 세상 속에서, 끈이 닿는 그 순간

은성이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은성은 자기를 통제할 줄 모르고, 내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데에도 서툴러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본 최고의 미친년’ 소리를 듣기까지 하는데요. 마음처럼 되는 게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심정이 어쩐지 공감되더라고요.

어?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요.(웃음) 다들 은성이 같은 애가 어디 있냐고 그래요, 문학 독자들은 혜성이에게 공감한다고 많이 얘기하세요. 은성이 같은 경우는, 경계성 인격장애죠. 틀림없이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고, 사람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니까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제가 좀 더 은성이를 보듬어 줬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은성이를 너무 날것 그대로 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은성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은성이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파요.

은성이가 일기를 펼쳐 놓고 가출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모르죠. 소위 ‘더러워, 일기장 사건’.(웃음) 힘든 티를 팍팍 내도 사람들이 너무 몰라주죠.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안으로 삭이는 캐릭터인 데 비해 은성이는 밖으로 표현하는 캐릭터죠. 어떤 사람이 자기감정을 밖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더 시원해지는 것만은 아닐 거예요. 다 뱉고 나면 공허한 게 남잖아요. 그래서 은성이라는 인물이 더 슬픈 것 같아요. 텅 비어버린 내면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며 살아가니까요.

제가 은성이 에피소드 중에 좋아하는 게 있어요. 머리를 자르러 갔는데 맘에 들지 않는데도, 항의를 못하고 나오죠. 내가 따지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고민하는 게 가련하기도 하고, 늘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뜻대로 안 되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잘됐으면 좋겠어요.(웃음)


작가님 근처에 은성이를 닮은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인물인가요?

딱 그런 사람은 없죠. 혜성이는 더 없어요.(웃음) 그런데 제 안에도, 기자님 안에도 은성의 어떤 부분, 혜성의 어떤 부분이 있을 거예요. 보이는 어떤 부분은 하나가 확대된 것이지, 그 안에는 미처 추출되지 않는 성질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상상해서 써요.

기본적으로 자료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이고요. 은성이 같은 성격이 있으면 관련해서 심리학 책도 읽고 하는데, 이런 건 말 그대로 기본 토대가 되는 거고요. 소설 속에서의 인물은, 은성이라는 캐릭터가 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만들어져 가는 것 같아요.


소설 속에 미니홈피, 블로그, 버디버디 등 많은 매체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은 너무 많은데,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모르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위치추적도 되고,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아이폰까지 나왔는데 말이죠.(웃음) 이런 자기만의 공간이 우리를 더 고독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블로그나 문자 메시지, 이런 문명의 이기들이 사람들을 독백하게 하는 것 같아요. 얘기가 쿵작쿵작되어야 하는데, 겉으로만 그렇지, 알고 보면 사람들은 각각 허공에 대고 말하고 있어요. 전화 통화하기 어색할 때 문자 메시지를 많이 하잖아요.(웃음) 문자는 내가 원할 때 확인하고, 연락을 끊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얘기가 오면, 그중에 두 번째 문장에만 대답할 수도 있고(웃음) ‘조금 있다 해야지, 바로 대답하는 건 좀 그렇잖아.’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착각인 것 같아요.

블로그나 미니홈피도 마찬가진데, 댓글 달고 리플 달면 소통하는 것 같지만. 과연 그런 걸까 싶어요. 저도 친구들이 외국에 간다고 하면 홈피 꼭 열어놓으라고 해요. 처음에는 되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자주 연락하는 것 같고, 내가 그 친구 근황을 알고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아는 걸까? 사진 보면서 ‘어디 갔다 왔구나.’ ‘살쪘다더니 하나도 안 쪘네!’ 이런 답글을 다는 게 몇 달 사이에 한 번 있는 대화인데, 이게 정말 우리의 소통일까 싶은 거죠. 소통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블로그는 더욱이 전시하고 싶은 것만 전시하잖아요. 가끔 모르는 블로그 들어가 보면, ‘아, 이 사람 되게 외로운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웃음) 사람들이 외로워서 그런 소통의 도구를 찾지만, 그 안에서 결국 더 외로워지는 모순이 있는 것 같아요.


옥영이 휘적휘적 실내로 들어섰다. 단 일주일 만에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비쩍 야위었고, 로션조차 바르지 않은 듯한 맨얼굴이 누르뎅뎅했다. 그녀는 세간과 함께 버려진 폐가 같았다. 곧 와르르 서까래가 무너져내릴.(p.202)

옥영은 입을 떼려다 말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진열대 앞에는 케이크의 포장을 기다리는 중년 여자도 있었고, 초록색 에이프런을 가지런히 두른 아르바이트생도 둘이나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은 이 쇼윈도를 들여다보며 열대어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투명한 유리 어항을 떠올릴지도 몰랐다. 옥영이 벌떡 일어났다.(p.203)


남들이 보면 평화로운 유리 어항인데,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속마음은 폐가잖아요.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늘 유리 어항을 부러워하고, 탐내고, 그러다 죄를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작가 눈으로 보는 오늘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라는 개인이 순간순간 그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요. 그런 유리 어항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나는 꼭 그 밖에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쟤네들은 따뜻한 어항 속에 있구나!’ 부러워하기도 해요, 그러나 남들이 나에게, ‘넌 안락한 유리 어항 속에 있잖아.’라고 하면 ‘무슨 소리야, 나 절대 아니거든!’이라고 하잖아요.(웃음) 나도 그렇게 보일까 자문해 보기도 해요. 많은 사람이 저처럼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흥미로운 것은, 사건이 벌어지고 나니까, 모든 가족이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너는 모른다’라는 말이, 한편으론 ‘나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라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너는 모른다’의 ‘너’는 나일 수도, 우리일 수도 있고요. ‘너는 모른다’라는 말이 ‘너를 모른다’라는 말일 수도 있을 거예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반대로,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누군가를 ‘안다.’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너를 안다는 건…… 너무 오만한 말인 것 같아요. 내가 너를 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싶어요.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엄마를 알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엄마가 ‘야, 내가 너 알거든?’ 하면 발끈하잖아요.(웃음) ‘엄마가 날 뭘 알아, 어떻게 알아, 날 안다고 말하지 마!’(웃음) 가까운 사람한테 더 그런 것 같아요. 정말 그 사람이 나의 100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다’라고 못할 것 같아요.

아버지들이란 대개 그렇다. 그리고 역시 남편만큼 자기 아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없다. 김상호가 이 여인에 대해 알려준 사전 정보는 일정 부분 잘못되었다. 그녀는 예민할지는 몰라도 결코 여린 여자가 아니었다.(p.147)

소설 속에서, 가족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웃음) 유지의 레슨 선생님 전화번호조차도 모르고. 이웃은 물론이고 식구들끼리, 지난밤에 뭘 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김상호는 자기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못 파악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막상 누가 나에게 ‘너희 엄마에 대해 말해 보라’고 했을 때, 내가 과연 김상호 보다 낫게 말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맞아요. 저도 엄마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잘 못할 것 같아요. 뭐라고 해야 되지? 그런 게 항상 궁금해요.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그리고 ‘우리 가족은 굉장히 화목해요. 서로 비밀이 없어요.’라고 누가 그러면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생각해요.(웃음)

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끈이 닿는 순간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전엔 그것도 없다고 했거든요.(웃음) 요새는 그런 순간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순간의 기억으로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순간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긍정적이 되었지? 나이 때문인가?(웃음) 음, 지금은 그런 순간이 없다면, 내가 불모의 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싶어요.


사람 사이에 끈이 닿는 순간, 예를 든다면, 어떤 순간일까요?

아주 작은 순간일 것 같아요. 손과 손이 닿았던 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살짝 안아줬던 순간일 수도 있고……. 취재를 하면서 저랑 동갑인 화교 여성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어요. 늦게까지 인터뷰를 하고 밤에 광화문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저를 살짝 안아주면서 ‘우리 얘기를 쓰려고 생각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 ‘이 순간이 지나면 이 소설을 못 쓰겠구나.’ 생각했어요. 난 고마운 일을 하려는 게 아닌데, 그분이 소설을 읽고 나서 실망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아직 그분께 소설 나온 거 보내드리지도 못하고 있어요. 한편 아이러니한 게 내가 못 쓸 것 같았던 그 순간 때문에 결국 쓰게 되더라고요. 그런 힘을 주더라고요.

노력하고 싶다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에게 밑바닥의 진심 같은 걸 보여주었으니까, 보이기 어려운 걸 보여줬으니까, 나도 그분에게 그러고 싶다는 거죠. 소설가로 할 수 있는 일은, 제 진심을 다해서 그분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다른 목적 없이 화교라는 소재를 쓰는 일이겠죠. 그런 게 진심이 닿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개인들의 이야기, 어쩌면 밍의 이야기


‘왜 항상 그렇게 뒤에 숨어? 네가 진짜 먹고 싶은 거,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거야?(p.233)’라는 옥영의 대사가 뜨끔했어요. 정말 먹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말 못하고 ‘그냥 네 맘대로 해.’ 떠넘기는 경우가 많잖아요. 정말 모르기 때문일까요?

맞아요……. 왜 모를까요? 그건 김형경 선생님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

왜 우리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요?

다칠까 봐. 상처받을까 봐 그렇겠죠. 난 탕수육 먹고 싶은데, 다들 자장면 먹는다고 하면 나만 탕수육을 먹는 ‘그런 애’로 보이지 않을까……. 아이가 어른이 되는 건, 자기가 자기 욕망을 컨트롤할 줄 알게 되는 것이고, 그게 사회화되는 ?잖아요. 아이들은 ‘나 탕수육 먹을래.’ 이러면 엄마가 ‘조용히 해.’라고 해도 왜 먹으면 안 되는지 몰라요.(웃음) 은성이도 좀 그런 사람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 같아요. 자기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줄 아는 사람, 눈치 보지 않는 사람들이요. 저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라, 안 그런 사람들을 보면 좀 부러워요.(웃음)

은성이는 절반쯤 사회화가 된 거네요.

은성이는 오직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ㅡ그러니까 남자들이겠죠(웃음)ㅡ그런 사람들에게만 속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줘요, 그 사람들이 다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대개 첫사랑을 할 때 그런 것 같아요. 은성이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 모든 존재를 기댈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혜성이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내가 그런 부담을 가지기도 싫고, 상대방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결국 ‘날 믿고 기다려 달라’던 아버지는 잡혀가고, 아내의 내연남인 왕명이 유지 사건에 가장 절박하고, 적극적으로 매달립니다. 외연남이 이런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 까닭이 있나요?

김상호는 김상호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결국 잡혀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상황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믿는 진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건 전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죠. 밍은 전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에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어요.

밍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밍을 쓸 때 울면서 쓴 부분이 있거든요. 나중에 가까운 지인이 그 부분을 읽고 전화를 주셨어요. 그 부분 보고 울었다고, ‘어떻게 네가 쓴 글로 내가 울 수가 있니.’(웃음) 그러셨는데……. 여기 199페이지예요.

한때 몹시 비겁했던 적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껏 비겁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덧없는 틀 안에다 인생을 통째로 헌납하지 않을 권리, 익명의 자유를 비밀스레 뽐낼 권리가 제 손에 있는 줄만 알았다. 삶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내벽에는 몇 개의 구멍들만이 착각처럼 남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숭숭 뚫린 빈칸을 이제 와서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p.199)

밍은 화교고, 어디에 붙잡혀 있지 않고, 고독한 개체의 삶을 스스로 유지하려고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이잖아요. 외로움이 자신에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에게, 이런 극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 자기한테 소중한 게 생겼을 때,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숭숭 뚫린 지난날의 구멍들을 매울 수는 없겠지만, 그곳을 응시하게 하는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많은 독자들이 가족 이야기로 읽으시더라고요. 가족 이야기라고 쓴 건 아니고, 그냥 개인들의 이야기예요. 가족 이야기라고 하면, 제가 사랑하는 밍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웃음) 밍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밍에게 그런 걸 주고 싶었어요. 가족 이야기도 맞긴 하지만, 모든 독자들이 가족 이야기로 읽으실 줄은…….(웃음)


마음을 다해서 썼는데, 그 부분을 읽고 누군가 울었다고 한다면, 굉장히 짜릿하실 것 같아요.(웃음)

네.(웃음) 그때는 일일 연재 할 때라서요. 8개월 정도 연재했는데, 어떤 부분을 펼쳐도 그때 내가 어떤 상황에서 글을 썼는지가 딱딱 기억이 나요. 제가 아까 울었다는 부분은 작년 가을쯤이었는데, 제가 그때 영화제 심사를 했어요. 연재를 3, 4개월 하니까 미치겠는 거예요.(웃음) 무리인 줄 알면서도,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는 일을 했어요. 아까 그 부분은 그렇게 밤에 들어와서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밤을 새면서 쓴 부분이에요. 아마 제 개인적인 서러움이 몰려와서 그랬겠지만…….(웃음)

내 인생도 왜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 같을까. 아무도 나에게 글 쓰라고, 연재하라고 안 했는데, 나는 뭘 위해서 이렇게……. 집은 너무 춥고, 먹을 건 없고……. 그때가 소설 중간쯤 쓸 때인데, 그때 되면 더듬더듬 뭔가 헤쳐나가는 기분이 들거든요. 2,000매 가까운 소설 가운데의 열 장을 쓸 때는, 제가 코끼리 어떤 부분을 만지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래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써야 하고, 그런 중압감에 힘들 때라서 밍한테 감정 이입을 많이 했나 봐요.(웃음)


그래서 밍이 그렇게 멋있게 그려진 거군요.(웃음)

그런데 다 그래요. 한 명 한 명 인물들이. 워낙 쓰는 과정이…?(웃음)

결말을 정할 때, 다른 경우의 수로 고민하지는 않으셨나요?

원래 연재할 때는 에필로그가 없었어요. 어떤 아이가 발견되고, 유지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로 끝나요. 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불친절하다는, 열화와 같은 댓글이 달리고,(웃음) 그렇게 불친절한가?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조금 더 친절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천몇 백 매를 따라 읽으신 분들이잖아요. 궁금하실 것 같아요. 이걸 따라 읽는 긴 시간 동안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인물들을 옆 사람처럼 느끼면서 지냈는데, 끝에 가서 ‘뒷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하고 자르는 건, 작가로서 무례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군더더기일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판단할 건 아니지만……. 제가 가진 애정과 독자들이 가진 애정을 조금 더 합해서 이후의 이야기를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걸 보시고, 마지막에 가족의 화해라고 읽으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재미있는데,(웃음) 이건 그냥 한순간인 것 같아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은성이 마지막에 옥영과도 마음을 연 것 같지만, 그 애, 그 성격 어디로 가겠어요?(웃음) 바로 다음 장에 또 싸우고, ‘내가 그 집구석, 들어가나 봐라.’ 하고 더 나쁜 일을 할 수도 있겠죠. 저는 그 순간에서 끝낸 거고요. 이후에는 그게 어떤 방식이든 인물들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나갈 것 같아요.


결국, 유지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움직이게 된 거잖아요. 그 모습이 한편으론 기적 같으면서도, 마지막 혜성의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어요. “조용한 세계다. 문득 내가 이들을 영원토록 알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마치 공포영화 엔딩 같은…….(웃음)

그전까지는 ‘너희는 나를 몰라,’라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혜성이 ‘나도 너희들을 몰라.’라고 전환을 하는 순간인 거죠. ‘너희가 날 어떻게 알아.’라고 꽉 닫힌 마음이 ‘아, 나도 저 사람을 몰라. 저 사람도 외로워하고 있겠네. 내가 자기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네,’ 하고 처음으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그게 아주 작고 미미하지만, 어떤 움직임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물론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는 건 공포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여기서는 저기를, 저기서는 여기를 그리워하는

처음과 끝 부분에 묘사되고 있는 시체 이야기가 시종 섬뜩한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앞, 뒤에 시체 이야기를 배치한, 특별한 의도가 있는지요?

이걸 쓰려고, 몇 달째 부검하시는 의사분과 인터뷰를 했어요. 하루에 대여섯 구 부검하시는데요. 그중 가장 기분 나쁜 시체가 익사체래요. 냄새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거예요. 많이 훼손돼 있는데, 그게 잘라지고 그런 게 아니라, 몸은 그대로인데 부어 있고 그게……(손짓을 하다 멈칫했다) 그렇다는 거예요.

익사체가 너무 슬펐어요. 누구한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시체는 한군데 묻혀 있잖아요. 그런데 익사체는 물을 따라서 계속 흘러가요.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 발견될지 기약도 없다는 것……. 밍이라는 사람은 익사체 같은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아요. 단순히 드라마틱한 효과나 도입부 효과라기보다, 슬픈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무도 모르는 채로 떠다니다 그렇게 세상에 드러난 모습. 그게 밍의 모습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고요.


사실 고백하자면, 첫 장면에서 익사체가 서술될 때는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졌는데, 유지의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또 그 얘기가 나오니까, 유지랑 상관이 있나 싶어 그땐 마음에 동요가 일더라고요. ‘아, 나 이기적이야.’ 하면서 읽었습니다.(웃음)

익사체가 발견된 게 5월의 평범한 날이잖아요. 남에게 관심도 없는 날, 그렇게 홀연히 떠올랐다는 게 슬픈 것 같아요. 우리는 정말 그래요.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 있어도 돌아서면 남의 일이잖아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평범하기만 한 내 옆에서 일어난다면……? 그런 화두에 관심이 많아요.

“실종입니까? 아니면 납치?”
맞은편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영광은 방금 자신이 뱉은 단어가 상대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할 때, 현실의 고통은 더 가혹하게 일깨워지는 법이다.(p.137)


화교라든가 경찰 조사, 부검 등의 장면에서 추측해 보건대, 취재가 대단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네. 쓰기 전부터 준비를 오래 했고요. 초반에는 자료 조사 도와주던 후배도 있었어요. 연재 중에도 계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터뷰했고요.

취재 중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취재는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받아 적지 않고, 녹음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마취약 이름 같은 거 알려주시면 받아쓰지만, 한 사람의 개인사를 들을 때는 그러지 않게 돼요. 그 얘기를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상상을 하죠. 이런 분이 있다면, 이분의 친구는 어떤 모습일까? 그분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손짓, 말투……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제 머릿속의 인물과 조합되는 것 같아요.

화교 이야기에서 그들이 한국을 대하는 양가감정ㅡ한국어를 금지하면서도 김치찌개를 좋아하고, 한국을 응원하는 모습 등ㅡ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직접 취재하시면서 어떤 걸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화교뿐 아니라 재일, 재미교포 다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어른들은 민족이라는 것 뿌리라는 것을 중요시하죠. 그것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어디에 가든, 자기는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있는 거죠. 제가 대만에서 만났던 남자분은 인천에서 화교 고등학교 나오시고, 대만 가서 한국 식당을 해요. 한국말을 열아홉, 스무 살까지 썼는데 어려운 단어 잘 모르고, 말투는 좀 어눌하고요. 그래서 도와주던 학생에게, ‘저분 중국어는 어떠시냐’고 했더니, 중국어도 그렇다는 거예요. 뉘앙스를 들으면 화교라는 걸 안대요. 언어가 그런 것을 보여주기도 해요.

여기서는 저기를 그리워하고 저기서는 여기를 그리워하면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사는 분들이 많아요. 밍이 옥연한테 ‘화교끼리 섬을 만들어서 살자.’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떤 분이 한 말씀이에요. ‘화교에게 제일 친한 친구는 화교’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것들이 단순히 화교의 문제라고 만은 할 수 없겠다 싶었어요.



진심이 닿는, 그 찰나의 순간이 있다면

장편은 계속 연재소설로 진행해 오셨어요.

그러네요. 우연히 그렇게 됐어요. 요즘에 연재 지면이 많아진 것도 있고요. 전작은 누구도 소설을 검사하지 않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저는 좀 게을러서…….(웃음) 편집자님이 자기한테 하루하루 메일을 보내라는 말도 하셨는데.(웃음) 일일 연재라는 방식이, 하는 동안 너무 고통스럽고, 한 번 할 때마다 늙어요. 몸도 많이 골골하고요. 건강검진을 받아야 할 것만 같아요.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널브러지게 만드는데요. 그런데 또 즐거움이 있거든요. 매일매일 어떤 일을 하는데, 진도가 나가고 있다는 느낌. 직관과 감각에 의지하면서 뭔가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당장 다음 작품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은데, 언젠가는 또 그렇게 하지 않을까 싶어요.

신문 연재소설과 인터넷 연재소설은 아무래도 다르겠지요? 집필하실 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독자들의 반응도 달랐을 것 같아요,

다르죠. 일단 독자층이 많이 달라요. 신문은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 그러니까 이른바 문학 독자는 아니죠. 그분들이 매일매일 신문을 펼치면서 읽는 소설이기 때문에 시의성을 생각하죠. ‘이 주인공이 나와 같이 서울 어디에서 살고 있구나. 어쩌면 버스 안 내 옆자리의 앉은 사람의 이야기겠구나,’ 싶도록 생동감, 현장감을 주고 싶었고요. 인터넷 같은 경우는, 소설 독자들이 찾아 와서 읽으시잖아요. 이전의 부담에서 훨씬 자유롭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하죠.

집필할 때,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시겠네요.

신문 연재는 아무래도 그렇죠. 『달콤한 나의 도시』를 연재할 때, 12월 31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인물들도 12월 31일이었어요. (일부러 맞추신 거예요?) 예, 왜냐하면 신문 연재는 그러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독자들이 새해를 맞으면서, ‘은수는 새해가 넘어갈 때 어떻풰 할까.’ 싶으실 테니까요. 그래서 독자들이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소제목이 힌트 같았어요. ‘일요일은 모른다’ ‘시작의 시작’ 같은 모호한 말이 있어서 그런 듯해요. 소제목은 어떻게 지으시나요? 연재할 때의 제목과 같은 건가요?

네. 연재할 때 붙인 제목과 비슷해요. 정말 순간적으로 정해요. 시상이 떠오르듯.(웃음) 그냥 본능적으로 떠오르고, 제가 앞으로 쓸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처음 떠오르는 제목이 맞는 것 같아요. 보면, 대충 맞더라고요.(웃음)

책을 내고 나면 기분이 어떠신가요?

첫 책 나왔을 때는 설레서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이후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순수한 설렘보다는 어깨의 무거움이 느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책을 낸다는 것, 오로지 모르는 독자들과 만난다는 것에 설렜다면, 요즘은 부가적으로 떠오르는 여러 가지 것들이 많아서요. 이 책은 뭐가 어떻게 돼야 되고, 뭐는 어떻게 돼야 하고……. 이런 것들을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제가 좀 서글프긴 한데요.(웃음) 책이 딱 묶여서 있는 걸 보면…… 제 시간이 거기 있는 거거든요. 제가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그냥 지나가는 건데, 이 책 속에 나의 몇 년 몇 월부터 몇 년 몇 월까지의 삶이 담겨 있구나 생각하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소설가는 시간을 실물감으로 만질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정치학, 여성학 공부를 하던 중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급선회인 만큼,(웃음) 결단 혹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대학 갈 때는 나에게 어떤 게 잘 맞는지 모르고 선택한 것 같고요. 협동 과정이 있어서 다른 학과 수업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사회과학 하면서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듣잖아요. 경험 연구 같은 거 하면, ‘20대 미혼 여성들의 성생활 연구’ 이런 걸 하고 그러는데,(웃음) 이렇게 생생하고 팔딱팔딱 뛰는 말들을 논문이나 리포트라는 사회과학 언어 속에 가둬서 얘기해야 하잖아요. 그게 답답하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들을 좀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쓸 수 없을까 그런 고민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 공부한 것들이 소설을 쓸 때 많이 도움이 되셨겠네요.

첫 작품을 지금 보면, 당시 저의 사회학적인 상상력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나쁜 여자 이야기로 읽으시는 분들도 많은데,(웃음) 그게 아니라, 20대 후반이었던 제가 사회학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던 그런 어떤 분기 같은 게 들어 있는 것 같거든요. 지금 같으면 좀 더 풀어져도 될 텐데, 저때는 참, 각이 잡혀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웃음)

『달콤한 나의 도시』를 연재하고, 책이 묶여 나왔을 때는 그럴 줄 몰랐어요. 그 소설 이후에 젊은 여성을 다루는 소설이 많이 나오고 해서, 어떤 분은 한국에서 그런 걸 처음으로 쓴…….(웃음) 전혀 저의 의도와 달리…….(웃음) 그런 걸 보면 속상하기도 그런데, 그 말이 틀린 건 아니거든요. 젊은 여성의 삶을 썼으니까. 뭐라고 명명을 하든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걸 좀 더 여러 가지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다양한 얘기를 같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죠. 제가 20, 30대 여성들의 삶만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이 안타깝긴 한데요. 그건, 앞으로 소설을 쓰면서 보여 드릴 부분 같아요.

그런데 『너는 모른다』를 보신 분들이, ‘정이현 같지 않다, 어렵다’라고 말씀하기도 하세요, 그것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전 독자들이 평생 같이 갈 독자였으면, 하는 건 제 욕심이겠죠. 그런 것에 괘념치 않고, 제가 가고 싶은 길, 새로운 길을 가면, 어떤 독자들은 믿고 지켜봐 주지 않을까 싶어요.


당시 『달콤한 나의 도시』가 큰 이슈가 됐었는데요. 그 소설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일단 정이현 하면,(웃음) 『달콤한 나의 도시』를 먼저 떠올린다든가, 어딜 가면, 대부분 ‘드라마 잘 봤습니다.’라고 많이들 인사하신다는 점?(웃음) 그럼 ‘저도 잘 봤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죠.(웃음) 제 첫 번째 장편이라는 사실만큼은 누가 뭐래도 변함이 없을 것 같아요.


김상호는 자신의 인생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돌아보기를 좋아한다는 부분이 있는데요. 만약 작가님의 인생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요? 그러니까 뭔가 바뀐 순간들을 꼽아보자면 ?뎶?요?

일단, 스무 살 이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요.(웃음) 교복 입고 지나가는 학생들 보면 ‘와, 신난다. 난 지나갔네.’ 이런 생각이 들어요.(웃음)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 보면, 되게 행복했나 보다 싶고.(웃음)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냈는데, 불투명한 미래가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엄마는 당장 수학 공부를 하라고 하고. 이 문제를 푸는 게 내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생각해야 하나 싶고, 그런 게 버거웠던 때와 20대. 20대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었던, 정말 질풍노도와 혼돈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서른 살. 그때부터 소설가가 됐으니까. 그렇게 나눌 것 같아요.

이제까지 소설을 보면 관심사가 다양한 것 같아요. 정이현 작가님에게 글을 쓰게끔 하는 것들이 있다면요?

제가 이 시대를 살고 있고, 변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시민이라는 자의식인 것 같아요. 역동적이고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회가 불안하면서도, 소설가 눈으로 보기에는 매력적인 시공간이거든요. 그렇게 보면 관심사가 무궁무진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높은 데서 사회를 굽어보는 존재가 아니라, 소설가는 늘 잡스러운(웃음) 시정에서, 사람들과 같이 흔들리고 커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런 자의식 때문에 아마 관심이 여러 가지로 뻗어나가는 것 같아요.

평소 글쓰기 습관은 어떠세요? 매일 규칙적으로 쓰시나요?

아뇨, 마감이 오면, 아주 급하게 쓰는 스타일, 인가?(웃음) 매일매일 꾸준히 쓰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일단 앉기 싫어서 머뭇머뭇 거리는 스타일인데, 일일 연재를 하면서 조금 바뀌었어요. 어쩔 수 없이 매일 써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성실해졌죠.

결혼하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나요?(웃음)

저랑 감정선 코드가 맞는 사람이거든요. 아무 얘기나 같이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이 있어서 좋은 것 같고요. 제일 좋은 건 “왜 결혼 안 하느냐.”는 소리를 안 듣는다는 것.(웃음)

그럼 혹시 결혼 이후에, 없었다가 생긴 고민도 있을까요?(웃음)

그런 거 많죠.(웃음) 소설가에게 안정감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상상하는 사람에게 안정감이 독이 될 거라고도 얘기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안주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오히려 혼자 있을 때는 더 독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나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런 독한 마음이 없어졌어요.(웃음) 빨리 도전할 수 있는 다른 걸 찾아야겠다,(웃음) 그런 생각을 하죠.

2009년 문학계 결산 뉴스를 보니까, 올해의 문학은 독자들을 위로하는 존재였다고 합니다. 소설 분야 판매가 가장 많았고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소설 독자가 늘어난 것은 좋은 현상 같아요. 아무래도 요새 책을 냈으니까. 가끔 책 판매 순위 같은 걸 보는데, 연말연시가 되니 참고서와 공부법이 순위를 치고 올라오긴 하지만(웃음) 독자들이 많이 찾는 게 소설이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민족이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작가들이 그런 기호에 부응을 완전히 못 해 드릴 수 있구나, 싶어서 죄송하기도 하고요.

이건 좀 다른 얘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소수의 몇 작가들이 시장을 움직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다양하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젊은 작가들 소설 보면 아깝게 묻히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요. 새로운 분야나 이름을 모르는 작가의 글도 많이 읽어주면, 그들에게도 격려가 되고 덩달아 한국 문학도 다양해지고 깊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고, 세상에 내 놓는다. 그게 전부다.’라는 작가의 말이 마치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장 같았습니다. 정말 진심을 전하기 어려운 시대에, 직선도 아니고 곡선인 문학적 언어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따른 어려운 점이나 자부심 같은 게 있으신지요?

우선, 작가의 말이라는 게 없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작가는 이렇게 두꺼운 소설로 얘기했는데, 작가의 말로 더 할 얘기가 있으면 소설을 더 썼을 것 같아요. 정말 마지막에 남는 말이 한 장, 한 자 진심을 다해서 썼다는 말이었는데, 진짜인 것 같아요. 세상에 어떤 소설가들도 진심을 다했을 걸요. 누구한테나 진심이 있는 거니까. 누군가 ‘넌 진심이 아니야.’라고 말해도 그 순간에 ‘내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건 진심인 것 같아요.

저와 독자의 진심이 닿는, 찰나 같은 순간이 있잖아요. 잠깐 닿았다 떨어질 수도 있고, 책을 덮고 나서 가족이나 자기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외연을 넓힐 수도 있고……. 짧은 순간이지만 그런 순간을 고대하면서 소설을 쓰는 것 같아요. 제 문장과 소설로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움직일 순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뭐로 움직이겠어요. 그냥, 그분들의 마음에 이렇게 닿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순간 같은 것…….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지는 못하겠지만, 이 자리에서 잠깐 흔들리게 하는, 그런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운동하지 않을 때랑은 정말 다른 순간이잖아요. 움직일 때보다 살짝 흔들릴 때 신비로운 것처럼. 그런 일들이 제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책을 읽은 독자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떤 분들에게 그런 느낌이 든다면 작가로서 그걸로 좋을 것 같아요.


2010년, 올해 새해 계획은 어떠세요?

단편을 쓰면서, 다음 장편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 모색해 보고 싶어요. 그 정도?(웃음)


잊히지 않는 눈짓이 되어야 하는 까닭

정이현 작가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할 때 결코 단정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럴 것 같다.’라거나 ‘그러지 않을까 싶다.’라고 했다. 작가의 펜 끝에서 나왔지만, 뚜벅뚜벅 걸어나가 제 삶을 사는 인물이기에 그녀는,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넌 나를 잘 알잖아.”라는 말에 종종 기대왔던 나에게는 조금 낯설었지만, ‘내가 너를 모른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야 너를 더 알 수 있으니까. 나 역시 네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니까.

이 작은 차이가 세계를 바꾼다. 알고 난 후의 세계는 그 이전과의 세계와 같을 수 없다. ‘너’를 유일한 ‘너’로 회복하는 일, 그건 결국 유일한 나를 회복하는 일과 같다. 다시 마르틴 부버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 세계에서 진정한 나를 되찾는 방법, 그건 ‘너’와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너에게 잊히지 않는 눈짓으로 존재하는 순간, (황홀하지 않을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How to? 세계가 바뀔지도 모르는 이 놀라운 경험을 위해서 당신이 부담해야 하는 노력은 어쩌면 사소하다. 너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고, 너와의 주관적인 경험을 거쳐야 한다. 정이현 작가의 말대로 진심이 닿는 찰나의 순간, 끈이 닿는 순간이 필요하다. 손등 위에 살짝 얹은 손. 말로 위로할 수 없을 때 스치듯 감싸준 어깨.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절로 맺어진 아버지, 어머니, 친구라는 객관적인 관계의 명명만으로는 결코 너를, 그리고 나를 알 수가 없을 거다.

이럼에도, 당신 옆에 있는 ‘너’를 알아야 할 간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이현 작가가 존경한다고 책 속에서 언급했던, 쉼보르스카의 다른 말을 소개한다.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 일어나지도 않는다 // 그런 까닭으로 /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실습 없이 죽는다. /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 서로 닮은 두 밤도 없다 //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 하나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딱 한 번뿐인 세상, 딱 하나뿐인 나와 너. 이 정도면 우리가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눈짓’이 되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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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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