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보면, 연기가 이상한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나는 서사전개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뭐, 다 먹고 살려고 하는데’하며 보는 편이다. 이건 달리 말해, 꽤 많은 배우들의 연기가 직업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연기를 보면서 ‘아, 저 배우 지금 예술을 하고 있구나’ 하며 느끼기란 꽤나 어렵다. 그렇기에 관성적 연기를 줄곧 봐오다가 나는 어느 순간, 연기 자체에 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 어느 정도는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한 배우의 연기에 유독 관심이 갔다. 그간 관심을 갖고 지켜봐왔던 배우는 숀 펜, 하정우, 브래드 피트, 크리스천 베일 정도였는데, 이들 보다 더 관심을 끈 배우가 있었다. 그는 바로 ‘매튜 맥커너히’였다(네. 오늘은 최초로 배우 특집).
매튜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불과 5분 정도 출연했다. 그런데, 극장문을 나설 때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이는 180분 동안 주구장창 나왔던 디카프리오가 아니라, 바로 그의 36분의 1분량으로 나왔던 매튜 맥커너히였다. 첫 출근을 한 신참 브로커인 디카프리오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 점심시간에 코카인을 쓰윽 빨아들이며 “월스트리트에서는 제 정신으로는 살 수 없다”며 “하루에 세 번씩 자위를 하고, 탐욕 외에는 모든 걸 버려라!”, 며 설파하는 그의 모습은 뇌가 지끈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뼈만 남은 육체로 광기어린 연기를 펼치는 캐릭터들을 몹시 좋아하는데, <파이터>의 크리스찬 베일이 그랬듯,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매튜 역시 그러했다(그러고 보면 둘 다 마약에 중독된 인물들이었다. 물론, 극중에서). 한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는 매튜 보다 더 마른 사람이 나온다. 그를 발견한 느낌은 뭐랄까. 90년대식으로 말하자면, 주윤발 때문에 <영웅본색 2>를 보러 갔다가, 장국영을 보고 나온 느낌이랄까(이 말을 이해한 당신은 나와 영혼의 동창생). <영웅본색 2>가 개봉했을 당시, 극장으로 들어가며 모두 주윤발을 언급하다가, 극장에서 나오며 모두가 장국영을 말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장국영에 해당하는 배우는 에이즈에 걸린 여장 게이 역을 맡은 ‘자레드 레토’였다. 칭찬에 인색한 내가 감히 말하자면, 그의 연기는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경이롭다는 단어가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아했다. 만약 내가 연기자였다면, 그런 연기 앞에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은 두 가지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절대적인 존경, 아니면 처절한 질투. 그의 연기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순수한 관객, 그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먼 언저리에서 글을 쓰며 나름의 창작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연기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의 봉인된 감정 같은 게 꿈틀거렸다.
실은 나도 연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에 ‘극예술연구회’라는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주로 개성이 강한 역할들을 맡았었다. 색욕에 빠진 대학교수, 살인자, 모델을 벗기기에 혈안이 된 촬영 감독 따위의 역할을 맡았다. 당연히, 철저한 연기가 아니면 소화해낼 수 없는 배역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혀 내 실제 캐릭터와 연관이 없다(니까요. 믿어주세요). 아무튼, 그때 나는 연기를 하기 위해선 평소에 다양한 인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심리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확하고 아름다운 표현은 철저한 관찰과 깊은 분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싸늘한 무대에서 몇 해의 겨울을 보내며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집을 짓기 전에 토대를 탄탄히 다지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글을 지어 밥을 먹고 사는데, 첫 소설을 쓸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뭐야, 이거. 연기랑 같잖아.’
특정 상황 속에서 철저히 극중 인물의 심정이 되어, 왜 이 인물이 지금 이때에 이 대사를 할 수 밖에 없는지, 왜 이런 말을 이런 식으로 했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은 연기와 다를 바 없었다. 글을 쓰는 것 역시 끈기 있는 관찰과 내밀한 분석이 있어야 가능했는데, 따지고 보면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된 게 두 가지 더 있다(이제는 글쓰기 특집). 하나는 그림을 그린 것과 다른 하나는 논문을 쓴 것이었다. 나는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어디 학원 같은데서 소설 창작 따위를 배운 적도 없었기에(이런 게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겠다. 실제로 있다면 난감한 생각이 들겠지만, 여하튼), 그저 여태껏 내 삶에 일어난 일 들 중에 그나마 가장 글쓰기와 가까운 ‘유사경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연기였고, 둘째는 깊은 관찰을 해야 했던 그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굉장히 현실적인 도움이 된 것은 ‘논문’을 쓴 경험이었다. 당연히 소설은 논증적 방식의 글쓰기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독자의 감정적 변화를 기준으로 볼 때 이것역시 설득적 글쓰기의 대상에 속한다. 그러므로 논문을 쓸 때 경험한, ‘쓸 것은 쓰고, 뺄 것은 빼야 한다’는 금언을 일단 실천했다. 쓰고 보면 굉장히 간단한 말 같지만, 막상 써보면 어느 것을 빼야할지 모를 때가 허다하다. 지금도 이 말은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어쨌든 연기를 말하다가 소설쓰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단 하나다. 연기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논문이든, 이 모든 것은 ‘삶에 대한 끈기 있는 관찰’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기본이고, 핵심이다. 즉, 내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삶의 파고를 견뎌내고, 어떨 때 웃음 짓고, 어떨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지 지치지 않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 이것으로 모두 통한다. 그리고 그건 비단, 창작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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