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스에서 온 그대
카디프 소년과 함께하는 긴 여정의 시작
2008년 여름, 웨일스 카디프 시티의 17살 미드필더를 두고 아스날과 맨유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의 이름은 아론 람지(Aaron Ramsey). 나의 첫 인상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잘생겼다.”
2010년 2월 27일, 악명 높은 스토크 시티 원정. 점수는 1:1, 승리가 절실한 아스날로서 매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후반전 20여분이 흘렀을까. 스토크의 라이언 쇼크로스는 아스날의 공격을 차단했지만, 공이 흘러나왔고 그것을 태클로 막아내기 위해 아론 람지가 뛰어들었다. 공을 걷어내려고 했던 쇼크로스의 킥은 그대로 공이 아닌 다리를 향했다. 고통을 호소하며 피치 위에 쓰러지는 람지.
그동안 축구를 보면서 선수들이 부상당하는 장면을 참 많이 목격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심판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다급한 얼굴로 의료진을 향해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머리를 감싸쥐며 주저앉은 베르마엘렌. 흥분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세스크. 스토크 선수들을 향해 격하게 화를 내는 캠벨... 카메라는 쓰러져있는 람지를 비췄고 그의 오른쪽 다리는 상상할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리고 5년 후, 역사는 되풀이되는 듯 했다. 이번에도 맨유 공식 홈페이지에 카디프 구단과 아론 람지의 이적에 합의했고, 개인 협상과 메디컬 테스트만 남았다는 뉴스가 벌써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는 좌절했다. 또다시 이렇게 맨유에게 당하는 것인가. 하지만, 웬걸 정확하게 10일 뒤, 아론 람지는 아스날과 사인했다. 동시에 맨유 공식 홈페이지의 이 설레발은 두고두고 축구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후 밝혀진 람지 이적에 대한 뒷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자면, 카디프는 맨유, 아스날, 에버튼 세 곳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맨유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공개적으로 뉴스를 띄우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마치 계약이 성사된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더불어, 카디프도 아스날이나 에버튼보다는 맨유로 이적시키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맨유는 람지를 카디프로 재임대하여, 1년 더 그곳에서 머물 수 있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람지와 그의 부모, 그리고 에이전트는 대화를 위해 맨유로 향했지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휴가중으로 자리에 없었다. 아스날의 감독 아르센 벵거 역시 유로 2008 관람차 스위스에 체류하면서 클럽에는 부재중이었는데, 이때 벵거는 람지 가족을 개인 제트기로 자신이 있는 스위스로 모셔와 점심 식사에 초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벵거는 이 자리에서 람지를 설득했다.
아론 람지 “내가 아스날에 입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르센 벵거와 만나 나를 위한 그의 계획들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어린 선수들을 데려와 기회를 주고 훌륭한 선수들로 길러냈다. 아스날은 나에게 비행기를 보내 벵거와 만날 수 있도록 해줬다. 감동받았다. 나는 고작 17살이었는데 세계 최고의 감독이 나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한다니. 아스날로의 이적은 내 나이에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스날로부터 나를 더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나를 위한 계획도 더 낫다고 생각했다.”
(2013. 11. 8. 텔레그라프)
2008-09 시즌, 이렇게 아론 람지는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아스날이 직접 길러낸 어린 선수들 중 가장 촉망받는 재능의 16살 잭 윌셔와 함께 1군 스쿼드에 올랐다. 이 두 선수를 바라보는 내 눈은 당연히 하트가 되었다. 아직은 어리고 부족한 탓에 팀에 큰 보탬은 되지 않겠지만 점차 성장해서 아스날의 미래를 책임질 ‘브리티시 코어’들이었으니까. (아스날의 1군 스쿼드는 항상 외국인 선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잉글랜드 클럽이면서 잉글랜드 선수가 없다는 비아냥을 듣곤 했다. 그래서 아스날은 잉글랜드 혹은 영연방 선수들을 팀의 핵심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들을 ‘브리티시 코어’라고 불렀다)
이미 팀의 에이스가 된 세스크와 함께 높은 잠재력을 지닌 람지와 윌셔가 함께 피치 위에 서는 날에는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아스날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패스워크에 브리티시의 투쟁심이 더해진 미드필드. 막연히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그 누가 알았을까. 고작 1년 반만에 아론 람지에게 대형사고가 날 줄은.
아론 람지 “나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 태클이 들어간 이후 내 다리가 부러져서 다른 각도로 매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충돌 이후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다시 봤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으니 여기에 너무 매달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번 시즌 나는 잘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부상은 정말 좌절스럽다. 하지만 나는 어리고 미래가 있다. 지난 주에 수술을 받았고 내 다리가 회복되기 위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나는 이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었고 예전보다 더 튼튼하고 강해지길 바란다. 수많은 아스날팬들과 심지어 다른 클럽들의 팬들로부터도 굉장한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고 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아스날 선수임이 자랑스럽다.” (2010. 3. 5. 아스날 오피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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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벵거 “1년 전에는 사람들이 ‘그(람지)는 아스날에서 뛰기에 부족하다’고 말했던 것을 잊지 말자. 하지만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본인의 노력 덕이다.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해냈다. 알다시피 그를 보며 참을 수 없어하던 시선들이 있었다. 감독으로서 이런 시기에 직면하면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를 더욱 밀어붙여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야할까? 아니면 휴식을 주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할까?’ 이러한 문제는 항상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선수의 정신적인 상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떨어져있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아론은 늘 자신감 있는 소년이었다. 우리는 그가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는 또다른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숨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실수를 할 때에도 숨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능력이다.” (2013. 11. 16. 스카이스포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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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