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사는 사람들
어느 햇살 좋은 날, 허리를 숙여 꽃을 집는 한 할머니를 보았다. 향을 그리워한 것인지, 색을 탐스러워 한 것인지, 노부인은 평생 같은 자세로 꽃을 고른다. 꽃은 하늘의 산물이 아니다. 비를 맞고, 해를 쬐며, 구름의 방향에 따라서 봉우리가 움직이지만 굳건히 디디고 있는 뿌리는, 줄기는, 결국에 떨어지고야 마는 잎사귀는 땅의 것이다. 꽃은 땅의 얼굴이다. 그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한다. 할머니는 허리를 숙여, 꽃을 골라낸다. 꽃 앞에서 나오는 표정에는 거짓이 없다. 아름다움을 대하는 표정은 아름답다.
시드니 모스만의 한 벤치에 앉아서 꽃을 사는 사람을 종일 본 적이 있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던가, 아니면 전시회나 연주회가 열리는가.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꽃이 좋아 사는 것이다. 운동복 차림의 젊은 여자는 칠리 화분을 집어가고, 비치에서 막 나온 맨발의 아주머니는 릴리를 한 묶음 사가고, 붉은 넥타이를 맨 사내는 빨간 장미를 고른다. 쉴 틈도 없이 꽃을 싸는 점원과 꽃을 들고 느긋하게 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자, 이 동네가 궁금해졌다. 식료품 가게, 서점, 카페, 사무실, 부티크, 레스토랑이 작은 도로 위에 즐비한 이 동네에는 어떤 삶이 있기에 저렇게나 꽃을 사가는 걸까. 교복을 입은 소녀와 노부인이 동시에 꽃을 고른다. 인사를 나눈다.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런 풍경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빵보다 바다
막 구워낸 빵이 선사하는 고소한 향이 침샘을 자극한다. 모스만의 주민들은 금세 빵 가게 앞으로 모여든다. 개를 끌고 산책하던 여자가 내가 앉은 벤치에 목줄을 걸어두고 빵 집으로 들어간다. 시베리안 허스키 녀석은 2월까지 여름인 이 도시에 대해서 어떤 의문도 없는 얼굴로 그저 코를 박고 화원에서 길어둔 물을 허겁지겁 마신다. 그나저나 해변과 썰매 개는 조금 안 어울린다 싶다가도 금세 생각이 바뀐다. 그(혹은 그녀인지 확인하진 못했다)의 조상대대로 시베리아에 살았을 터나, 어쨌든 녀석은 이주민의 삶을 살고 있으니 호주인의 정체성으로는 제격인 셈이다. 나 역시도 이방인이 되어 모스만 주민들을 은밀하게, 심지어는 개까지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호주에서는 여성이 1순위, 개가 2순위, 남성이 3순위라는 농담(현실!)도 떠오른 터라 벤치를 시베리아에서 온 늠름한 개에게 비켜준다. 어쩌면 그보다는 바다의 향이 나를 부르는 건지도 모른다고, 나는 언제나처럼 생각해본다.
바다는 내리막의 끝
산의 정상은 오르막의 끝에 솟아있고, 바다는 내리막의 끝에 펼쳐져 있다. 정상은 한 점이지만 바다는 무수한 점이다. 정상은 유일하지만 바다는 무한하다. 나는 바다가 좋다.
더없이 높아지려 하는 한국의 건축물 앞에서 몹시도 두려웠던 적이 여러 번 있다. 부산에 ‘영화의 전당’이 생기기 전,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위치한 시네마테크는 더 이상 그네를 탈 수 없는 어른들의 놀이터였다. 씨네필을 자처하며 들락거리던 여러 날 동안 단 한 번도 해운대의 건축물에 눈이 간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정취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수영만의 시네마테크가 영영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을 즈음, 무심코 하늘을 보다가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해무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 철제 건물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공포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시네마테크를 잃었다는 선고와 이유 없는 청춘의 반항이 뒤섞인 탓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로 위협적인 건물을 처음으로 마주한 경험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날이, 돌연 시드니의 한 바닷가에서 되살아나다니. 아무래도 높은 건물하나 없는 해변의 풍경이 역으로 생경한 것일 테다.
바다는 오르막의 시작
시드니 하버와 중동 항구 사이는 반도가 형성되어 비치마다 마을을 가지고 있다. (마을마다 비치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아무래도 이상해 한참을 고심했다.) 모스만의 발모랄 비치는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는 시드니의 대표 해변이다. 과거, 상어의 치명적인 공격에 철제 보호 장치를 항구에 설치했지만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철거되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지역주민들만 이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다. 부촌답게 호화요트가 바다 위를 부유하고, 선창처럼 길게 뻗은 방갈로 식당에는 머리카락이 젖은 사람들이 잔을 들고 있었다. 언제라도 타올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 기색이었다. 둥글게 산책로로 조성된 선창 안쪽은 수영장이나 다름없었다. 연인과 부부와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수영을 즐겼다.
세상 어느 곳이나, 바다가 있다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하물며 그곳에 바다가 없다한들 누구라도 시드니의, 모스만의, 발모랄 바다의 주인이 아니라는 법도 없다. 위대한 유산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벤치에 앉아 두꺼운 책을 읽는 노신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고, 해변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한 여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모든 게 여유롭고, 모든 게 느렸다. 느린 것은 땅이 넓고 비옥한 국가 특유의 생태적인 관습이 생활로 녹아든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노인들이 해변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인 듯 했다.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마주하며 서로의 몸을 닦아주는 풍경이란 다소 어색하면서도 금세 동화되어 버려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국의 삶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이국의 정취에 대한 매료가 아닌, 그저 깊은 관념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숙제일 것이다.
화원에서 꽃을 산 할머니도 이 비치 속에 계실까. ‘노인’이란, 보다 낮게 하지만 넓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오래된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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