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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b, 인문학은 b급이다
가라타니 고진, 슬라보예 지젝, 다자이 오사무 등 화려한 라인업 갖춘 출판사
도서출판 b. 2003년 슬로베니아학파 총서 시리즈 1편인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을 시작으로 80여 종의 책을 냈다. 출판사 이름을 접했을 때 의미가 궁금했다. 조기조 대표는 출판사 이름에 담긴 뜻을 묻는 질문에 ‘b급’이라는 말로 답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서출판 b가 다루는 저자는 A급 사상가, 작가(가라타니 고진,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다자이 오사무, 용수 등등)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탐내는 것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우리가 흔히 ‘명품’이라 부르는 것들 말이다. BMW 자동차, 라이카 카메라, 칼자이즈 렌즈, 롤렉스 시계, 에르메스 백 등. 대한민국 출판계에도 명품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있다. ‘좋아서 보는 인문학’에서는 인문 사회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는 출판사를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2편은 ‘도서출판b’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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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런 책을 보니?”
이 말을 들었을 때 필자가 들고 있던 책은 『성관계는 없다』였다. 슬라보예 지젝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라캉 연구자가 쓴 저서로, 야한 책은 아니었다. 다만 ‘성관계’라는 다소 민망한 단어가 책 제목을 장식한 터라,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할 만도 하다.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라캉이 내세운 것으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와 같은 다른 명제와 함께 숱하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언명이다. <좋아서 보는 인문학> 2편은 라캉과 지젝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 도서출판 b다.
도서출판 b. 2003년 슬로베니아학파 총서 시리즈 1편인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을 시작으로 80여 종의 책을 냈다. 출판사 이름을 접했을 때 의미가 궁금했다. 조기조 대표는 출판사 이름에 담긴 뜻을 묻는 질문에 ‘b급’이라는 말로 답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서출판 b가 다루는 저자는 A급 사상가, 작가(가라타니 고진,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다자이 오사무, 용수등등)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건만, 조대표는 왜 자신의 출판사를 b급이라 표현했을까. 그것은 인문학이 곧 b급이기 때문이다. 직접 조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출판사 이름에 담긴 의미가 궁금하다.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가 대문자 A다. 이것과 상대되는 의미로 소문자 b로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b급을 지향하는 출판사의 정체성과도 어울렸다. 당대를 지배하는 생각이 A급이면, 인문학은 현재의 지배적인 생각을 바꿔나가려는 노력이니 b급이다.
라캉, 지젝, 랑시에르, 발리바르 등은 각각 다소 다르긴 하지만 포스트모던한 서구 지식인으로 묶을 수 있을 테고. 헤겔은 서구 지성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다룰 법하다. 그런데 용수(나가르주나)나 다자이 오사무는 도서출판 b가 기존에 냈던 책과는 다소 색채가 다른 저자다.
우리는 상임 3명, 비상임 기획위원 5명인데, 이념이 맞는 사람끼리만 하는 게 아니다. 저마다 아이디어를 가져온다. 출판사 초기에 가라타니 고진을 번역하겠다고 조영일 씨가 제안했다. 모두 다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리즈로 냈고, 헤겔이나 지젝도 그랬다. 용수(나가르주나)도 후배가 와서 제안을 하더라.
가라타니 고진, 다자이 오사무, 헤겔 등 시리즈로 책을 낸다. 한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방식인데, 그 작가의 모든 책이 사랑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흔한 방식은 아니지 않나.
우리는 어떤 한 사상가를 잡으면 그 사상가를 집중해서 밀고 간다. 예를 들어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하고 싶다고 누군가가 왔다. 우리는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할 수 있다고 하면 해서 갖고 와 보라고 한다. 갖고 오면 낸다. 사실 이런 방식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미련한 방식이기도 하고. 10권 중에 한두권이 잘 팔려도 본전도 안 되고. 그래도 실력 있는 학자가 한 사상가를 밀고 나갈 수 있다면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계속 책을 낼 생각이다.
학계나 도서관에서는 좋아하겠다.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많이 안 사더라. 대학이나 도서관에서 주문 오면, 1권씩 하는 경우 있다. 도서관이라면 최소 2권은 비치해야 하지 않을까. (웃음)
도서출판 b 조기조 대표
가장 반응 좋았던 책은 뭔가.
사상가로 보자면 슬로베니아 학파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중에서는 작년에 나온 『세계사의 구조』, 그리고 『근대문학의 종언』. 현대철학사전 시리즈는 니체 빼고 4권이 나왔는데 의미 있는 책이다. 니체도 내년에는 낼 생각이다. 원고지 10,000매 정도 되는 분량으로 한국에서는 20~30년 안에 이런 방식의 책이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철학을 전체로 다룬 철학 사전은 있으되, 한 사상가를 이렇게 집중적으로 다룬 사전은 드물다.
한국에서 지젝, 고진이 인기 있다. 비결이 뭘까.
나도 학자가 아니라 논평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말하자면, 가라타니 고진은 이웃나라에 있으면서도 아시아권에서 이만한 학자가 없다. 초기에는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은 한국 대학원에서 교과서처럼 본다. 이 책으로 김윤식 교수의 베껴쓰기 논란도 있었다. 원래 경제학자였고 지금은 세계 경치경제학으로 전환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부터 마르크스를 재해석하려 한다. 사상사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이후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네그리나 고진 정도가 남았다. 사상가적 체계를 계속 갖춰나가는데, 독자들이 이러한 점에 기대한다. 지젝은 인기 요인을 잘 모르겠다. 그는 처음에 문화비평가, 문화이론가로 수입됐다. 20세기 후기구조주의 유행이 끝난 뒤에 새롭게 등장한 사상가 중 한 명인데 주제도 다양하고 발랄하다. 일목요연하게 체계를 잡아 저술한다기보다는 즉흥적인데,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 사상가다. 그런데 사실 지젝이나 고진이나 지금은 둘 다 꺾였다. 읽을 만큼 읽혔고.
그렇다면 지금 주목하는 사상가나 사상 조류가 있나.
없는 것 같다. 다만 앞으로 출판한다면, 중국의 최근 사상을 다루고 싶다. 또 하나는 한국 근대 초기, 개화기 이전. 서구 사상이 조선에 들어올 때, 유학자들이 글을 썼을 테다. 이런 자료를 찾아 묶으면 한국에서 근대의 맹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을 이해하는 데 도움도 되고.
한국에는 가라타니 고진, 사카이 나오키 같은 세계적으로 이름 난 사상가가 드문 이유는 뭘까?
글쎄. 아무래도 한국은 근대 역사가 짧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기도 하고. 해방 뒤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단됐다. 뭘 하면 종북으로 몰아가니,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지금은 공부하는 사람이 생기고 있다. 예전에는 일본을 통해서 했지만, 요즘은 독일이나 프랑스에 가서 사상가로부터 직접 배우기도 한다. 점점 나아지리라 본다.
10년째 책을 내고 있다. 정치와 인문학 간 관계, 어떻게 달라졌나.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는 인문학이 뭐가 필요하냐, 실용주의 노선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아직 인문학적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당이 집권하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든 출판과는 상관 없다. 진보든 보수든 인문학은 비판적 기능을 해야 하니까. 다만 도서정가제 문제, 이런 문제를 국회가 다뤄야 하는데 손도 못대고 있다. 제도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를 잘 해 줬으면 좋겠다. 출판사마다도 입장이 다르지만, 우리 입장은 정가대로 팔았으면 한다. 현재 도서정가제가 신간 10% 할인이지 않나. 2만 원이지만 어차피 18,000원에 판다. 그냥 18,000원에 팔면 되지 않나. 서점은 가격 외에 콘텐츠라든지 배송이라든지 다른 서비스로 경쟁하면 된다.
인문학 책이 안 팔린다는 말이 있다. 체감하기로는 어떤가.
그런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지냈다. 도서출판 b는 책을 내면서 매출은 꾸준히 높아졌다. 올해도 작년보다 20% 성장했다. 하지만 자세히 따지면 적자다. 지젝이나 고진과 같이 나름대로 인기 있는 저자 책을 내지만 평균 2천 권 정도 팔린다. 인문학 책만 내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도 하지만 그럼에도 견디고 있다.
다음에 나올 책은?
마음학 총서 시리즈 2권인 『유식사상과 현상학』, 그리고 『파노프스키의 상징 형식의 원급법』. 2월에는 다자이 오사무 전집 중 나머지 3권이 나올 예정이다.
인문학은 무엇이고 왜 필요할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생각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 생각을 묻고, 듣고, 받아들여서 다시 생각한다. 인간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생각한다. 그 방향을 고민하는 게 인문학이다. 여타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인문학은 늘 b급이다. 매번 새로운 게 앞선 것을 한 차원 높게 끌어 올리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고 재구성도 한다.
* 도서출판 b에서 낸 책
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저/조영일 역 | b(도서출판비)
종래의 맑스주의가 인류의 역사를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을 '교환양식'으로 바꿔서 재해석하는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시리즈의 10번째 책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양식'이라는 개념으로 원시공산제사회부터 현재의 자본주의사회, 나아가 미래의 전망까지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맑스주의를 새롭게 재해석함으로써 학술적 영역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의 최근 연구에서의 키워드는 국가 간 경제적 격차, 전쟁, 환경 파괴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현재의 자본제사회가 가져오는 가장 핵심적이고 필연적인 문제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극복해보고자 하는 연구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고진은 자본제 사회 이후라는 미래전망에 힘을 쏟으면서 세계혁명을 일으키자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세계동시혁명'이자 '세계공화국'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의 목표로서 지향할 수 있다는 규제적인 이념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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