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대기업이 TV광고에서 ‘ASK’라는 단어로 자신의 회사를 묘사했다. 이어서 광고는 질문이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광고를 보면 떠오르는 저자가 있으니 바로 한귀은 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다. 그녀는 인문학의 본질을 “교양과 상식을 의심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인문학 과격주의자라 소개하는 한귀은 교수. 그녀가 최근에 낸 책, 『모든 순간의 인문학』에는 그러한 의심으로부터 나온 글이 가득하다.
한귀은은 누구
책에 실린 ‘인문학 과격주의자’라는 저자 소개가 인상적이다. ‘인문학 과격주의자’라는 말을 좀 더 설명해 달라.
‘과격’이란 말도, ‘주의’란 말도, 별로 환영 받지 못하는 단어다. ‘급진주의’나 ‘강경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상투적이고 무겁고 소외받는 말을 가볍고 재밌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삶과 동떨어져 고매할 것 같은 ‘인문학’에 그런 단어를 붙이면 훨씬 친근할 것도 같았다. 똑똑하고 영리한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시대에, ‘모든 것이 인문학으로 가능하다’라는 타협 불허의 고집도 부리고 싶었다. 저자 소개의 맥락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인문학 과격주의자’는 일종의 유머다. ‘과격주의’란 말을 과장되게 써서 한 번 웃자는 의도다.
소재들도 과격하지 않던가? 스킨십, 냄새, 자위, 페티시, 단식, 콤플렉스, 성형, 복수 등, 개인들이 감추고 싶은 것, 수치스러워 하는 것들에 대해 따뜻하게 말하고 싶었다. 꼼꼼하고 섬세하게, 인문학적 품위를 잃지 않고서 말이다. 한편으로는, 게오르그 짐멜,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등 인문학을 삶으로 끌어내린 사람들도 인문학 과격주의자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들은 매우 사소한 물건, 현상, 감정 등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다.
우한용 전 서울대 교수가 이 책을 읽고 엽서를 보내주셨는데, “롤랑 바르트의 문체를 닮은 가볍게 정수리를 치는 사유와 도발적인 진지한 시선이 돋보인다”는 과찬을 해주었다. 덧붙여 “장례식장에서 축배를 들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글”이라는 말도 해줬는데, 책의 내용으로 봤을 때도 역시 내가 인문학 과격주의자라는 말인 듯하다.
자기관리
제목만 보면, 『모든 순간의 인문학』이 철학, 역사책일 것 같다. 그런데 서점에 분류되어 있기로는 ‘자기관리’ 쪽이다. 이에 대한 불만은 없나.
인문학과 자기관리에 걸쳐 있는 책이다. 인문학으로 자기관리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은 인문학적으로 ‘감성’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감성 사용법’을 말한다. ‘복수’에 대해 말할 때도, 우리가 갖는 복수 의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하며 썼다. 나의 복수 의식을 철저히 점검했던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나야말로 인문학으로 자기관리를 한 사람이다. 2010년에 낸
『이토록 영화같은 당신』은 상처의 인문학이며, 2011년
『이별리뷰』는 그것을 극복해갔던 과정을 인문학에 기반하여 쓴 책이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은 행복의 인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관리 책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의 인문학은 자기관리,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매우 광범위하게 쓰인다. ‘교양’, ‘일반 상식’ 정도로 넓게 쓰고자 하는가 하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처럼 학문적 주제가 명확하고 학문적 방법론이 있는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써 사용할 때도 있다. 저자는 어떤 편을 선호하는가.
나는 인문학의 의미를 특별히 정의하는 않는다. 인문학 자체가 통섭의 학문이다. 어떤 특정 학문의 권리 행사, 배타적 영역 확보는 인문학의 본질과 오히려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교양과 상식도 아니다. 교양과 상식을 의심하고, 삶의 진리와 정수를 통찰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 체화시키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그런 교양과 상식을 ‘키치’라고 했다. 그 키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 또한 인문학일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모든 것에 대해 논문을 쓸 수 있으니 주제는 무한대로 널려 있지요. 그렇게 해서 써낸 원고 뭉치는 자료실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그것은 무덤보다도 쓸쓸하지요.” 나에게 인문학은 쓸쓸한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변화를 이끄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전환기
인문학을 공부하기 전, 인문학을 공부한 후의 인생을 이야기해 달라.
가령, 이런 변화다. 예전엔 ‘마담 보바리’를 쇼퍼홀릭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녀는 ‘멜랑콜릭’이었다. 그녀는 르네 지라르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는 ‘속물’이었지만, 속물이라도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더 깊은 우물 같은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녀를 이해하게 됐다.
이런 통찰은 내 안의 ‘그림자’와 ‘콤플렉스’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내게 속한 보바리즘도 나는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틀었다. 바로, 경제관념 있는 ‘엠마 보바리’가 되자는 거다. 댄디의 취향은 갖지만 경제관념도 있어서 빚을 지지 않고(나름 재테크도 한다, 인문학적으로), 그 취향을 향유하는 삶을 추구하게 된 거다.
이 시대의 독자
『모든 순간의 인문학』은 어떤 계기로 집필했나. 이 책에서 독자가 꼭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작년 런던 올림픽이 열렸을 때 어머니, 아들, 조카와 경주의 한 호텔에 묵고 있었다. 개막식 때 폴 매카트니가 ‘헤이 쥬드’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그가 참 귀여운 남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좀 놀라웠다. 그래서 일상에서 내가 놀라는 일에 관해, 감성과 감각을 발휘해 계속 써보자 마음먹었다. 쓰다 보니, 그 감성이 상처에 닿아 있기도 하더라. 책에서도 미운 오리새끼도 미운 오리 새끼 하나만 더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썼다. 동화에서 미운 오리새끼는 알고 보니 백조였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미운 오리새끼들은 백조도 아니면서 스스로 백조라고 착각하는 오리들이거나 그냥 콤플렉스가 있는 착한 오리들이다. (정신의학 쪽에서는 전자의 증상에 ‘경계선적 장애’라는 병명을 붙이던데, 아니라고 본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증상인 것이다.) 이 ‘착각 오리’와 ‘착한 오리’가 스스로를 더욱 잘 이해하고 사랑하려면 자기만의 감성과 취향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 또한 감성과 취향을 계발하면서 내 삶이 더 의미 있게 여겨졌다.
버킷리스트
책에서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방대한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했다. 이중 다섯 작품만 고른다면 어떤 작품을 선택하겠나.
영화
<여름의 조각들>: 70대가 되었을 때 닮고 싶은 모습이 영화 속에 있다.
영화
<색, 계>: 아름답고 지독하다.
영화
<아무르>: 어디까지가 견뎌야 하는 삶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영화
<미스 홍당무>: 심리학자 융이 말한 그 ‘그림자’의 재기발랄함을 만끽하면서 봤다.
드라마
<연애시대>: 웃으면서, 울면서 봤다. 한창 삶이 힘들 때였다.
책
대학 강단에서 강의 중이다. 점점 사람들의 독서량이 준다고 하는데, 대학생은 어떤 편인가.
사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책을 ‘읽을’ 여유가 없다. 그들이 놓인 현실이 그렇고, 매체가 너무 다양하니 에너지를 독서에 집중시킬 수가 없다. 그들의 빡빡한 삶에 비해 오히려 많이 읽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많이 읽으려고 애쓴다. 갈수록 책은 은밀한 매체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책의 물질성을, 질감을, 형태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이별리뷰』에서 책과 애인의 공통점을 나열한 적이 있다. “때론 베개가 되기도 한다, 끝까지 읽는다고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외출할 때마다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짐이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 여행을 할 때에는 동반하고 싶다, 침실까지 따라올 때도 있다, 겉모양이 멋있다고 내용물이 충실한 것은 아니다, 크고 무겁다고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쓸데없이 비싸게 구는 것도 있다, 오래 묵히면 그것에서 추억의 냄새가 난다”였는데, 나는 사람들이 책을 ‘착한 애인’ 여기듯 아꼈으면 좋겠다. 침실에 데리고 들어가면 더 좋고. 그럼 더 깊이 읽게 된다.
교육
교육 철학이 있다면?
이 질문의 뜻을 ‘어떤 사람이 좋은 선생님인가’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답한다면, 가령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오는 ‘포레스터’ 같은 선생님이되, 좀 더 친절한 선생님이고 싶다. <일 포스티노>에 나오는 시인 ‘네루다’처럼 학생에게 내재된 잠재적 능력을 일상 속에서 이끌어내어 줄 수 있는 선생님이고도 싶다. 그리고 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이 교육을 할 때 ‘메타포’를 썼다는 것이다. 통찰력 있고 아름다운 메타포는 학생들로 하여금 삶과 세계의 신비를 탐색하고 해석하려는 욕망을 일깨운다. 아, 그런데 자식 교육은 그게 안 되더라. 메타포는 ‘여유’와 ‘시간’이 있어야 태어나는 건데,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그 ‘거리감’이 전혀 조성되지 않으니.
시간 활용법
강단에 서는 것만으로 바쁠 텐데, 독서나 영화 감상 등 문화생활은 어떻게 하나. 시간 관리 요령이 있을 듯하다. 바쁜 현대인을 위해 조언 부탁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잘 해야 할 터인데, 왜냐하면 충분히 오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전혀 바쁘지 않다. 강의를 하는 시간 이외에는 언제나 ‘집’에 있다. 사실 전화 받기가 민망할 정도다. 간혹 점심을 같이 먹는 교수들이 있는데 어디냐는 질문에 언제나 답은 ‘집’이다. 학교 관리자들이 보면 뭐라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엄연히 재택근무를 선호한다. 집에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말했듯 내게 집은 안정과 몽상의 장소다. 집에서 ‘명랑한 고독’을 즐긴다. 여기서 고독이란 ‘론리니스(loneliness)’가 아니라 ‘솔리튜드(solitude)’다. 폴 틸리히는 론리니스는 혼자 있는 ‘고통’을, 솔리튜드는 혼자 있는 ‘행복함’을 뜻한다고 했다. 고독을 향유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왕따가 되는 것도 아니다. 평생 고독을 즐겼던 루소도 그랬다. 고독을 진정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진정한 환대를 받는다고.
미래
앞으로 어떤 책을 쓰고 싶나. 집필 계획외, 별도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알려 달라.
한때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쓰려고도 했다. 저자 소개에서 ‘노희경처럼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2012년 봄에 드라마 대본을 써서 출품한 적이 있다. 물론 떨어졌는데, 감각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에로티시즘을 내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관상을 보는 지식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그 여주인공이 남자를 ‘촉상’하는 장면이 있다. ‘눈’으로 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손의 감각으로 얼굴의 선과 각도를 가늠하는 거다. 눈과 코와 귀, 입술을 스치고, 팔의 길이와 다리의 길이를 재는 장면이 있었다(관상에서는 몸의 비율이나 균형도 중요하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이 비슷한 장면(눈 먼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만졌던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내심 신기해했다. 어쨌든 지금 내겐 어쭙잖게 관상 보는 능력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어떤 장르의, 어떤 테마의 글을 쓰든, 나는 삶의 슬픔에 기반을 둔 유머가 있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글을 쓰고 싶다. 연극에서 가장 하찮고 조야하게 취급되는 것이 소극(笑劇, farce)이라는 장르다. 이 소극이 삶의 한 순간을 아이러니하게 절창으로 보여준다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 외의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면 모호해서 더 설렌다. 사실, 하고 싶은 게 없기 때문에 더 가슴이 뛸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도래할지 모르기 때문에.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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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저 | 한빛비즈
이 책은 지적으로 사유하는 힘, 깊이, 감성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나 드라마, 즉 ‘스토리’를 차용한다. 우리가 킬링 타임으로 쓰는 스토리를 통해 인문감성을 채움으로써 일상이 어떻게 의미를 되찾는지 보여준다. 특히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인 사랑, 이별, 관계, 상처 등 소소하고 사적이지만 중요한 삶의 순간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여 우리가 부대꼈던 모든 순간에 인문학적 감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한다. 저자는 깜짝 놀랄 만한 솔직함과 섹시한 지성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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