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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한글을 로마자로 쓰는 세 가지 방법”

고종석의 한국어 글쓰기 강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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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8일, 바람이 꽤나 매서웠다. 강의실에 들어온 고종석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여섯 명쯤 와 있을 줄 알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방에서 보일러를 틀어두고 있었는데 나와 보니 날이 너무 춥더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몇 번이나 정말 여섯 명쯤 와 있을 줄 알았는데, 하고 되뇌이며 신기하다는 듯 수강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7시 30분, 어김없이 고종석의 한국어글쓰기 강좌가 시작되었다.



문자언어에서 힘이 센 것은 로마문자

열 번째 강의는 ‘한글과 한국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고종석은 현재 언어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영어지만 그만큼 문자언어에서 힘이 센 것은 로마문자라 말했다. 프랑스어나 독어와 같이 로마자를 사용하는 유럽 국가들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어처럼 로마자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도 로마자로 덮여 있을 정도다.

다른 문자 체계를 로마 문자로 바꾸는 것을 ‘로마니제이션(romanization)’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한글을 로마니제이션하는 법을 알아보았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매쿤-라이샤워식이다. George M. Mccune과 일본에서 태어난 Edwin O. Reischauer이 공동으로 주창한 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이 방법은 1984~2000년까지 오랜 기간 대표적인 표기법이었으며 간단히 MR방식이라고도 불린다.

'매쿤-라이샤워 방식'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이 방법대로 하면 '부산'은 Pusan, 평양은 Pyongyang이 된다. 이때, 한문이나 한글의 의미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 방법에서 ‘관광’은 ‘Kwangwang’이 된다. 한국사람들에게는 같은 소리로 들리는 ‘관’의 기역과 ‘광’의 기역이 다른 철자로 표기되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인은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외국인에겐 정확히 분리되어 들리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는 이 소리를 한 음소로 취급하기 때문에 한국인이 이 소리를 구분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 소리가 달라진다는 말에 수강생들이 신기해하자 고종석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했다. 한국인은 ‘달’, ‘탈’, ‘딸’에서 ‘ㄷ’, ‘ㅌ’, ‘ㄸ’을 구분할 수 있지만 유럽인들은 모두 ‘t’로 들린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그 음을 분류해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이 발음ㅇ르 구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연습이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문화관광부 표기법이 있다. 이 방법은 음소를 기준으로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흔히 맞춤법에서 사용하는 로마자 표기법으로 국립국어연구원을 통해 정확한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부산을 표기할 때, ‘Pusan’ 대신 ‘Busan’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 표기법에 따른 결과다.

마지막으로 예일식 로마니제이션이 있다. 이 Yale Romanization은 새뮤엘 마틴이라는 예일대 교수가 고안해 낸 방법이다. 지금도 미국의 언어학자들에게는 예일 표기법이 표준적이다. 이 방법은 뜻을 가진 가장 작은 단위, 즉 형태음소를 기준으로 한다. 예를 들어 ‘낯을’, ‘낯’, ‘낯만’에서 ‘낯’은 각기 다른 발음을 가진다. 이때, 이 말의 대표음소를 정해 표기하는 것이 예일식의 기본적인 법칙이다. 이 표기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니제이션된 글자를 다시 한글로 복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매쿤-라이샤워식의 경우는 한글 복원이 되지 않는다. 형태음소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예일식 표기는 조금 괴이하기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학자들의 경우 이 예일식을 선호한다. 한글로 복원된다는 점이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수강생 하나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 발음과 다른 표기를 하는 게 여전히 의아한 모양이었다. 고종석은 원음주의에 따르는 일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같은 로마자가 각각의 언어마다 다르게 발음될 때, 이것들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해서 표기할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외국 고유명사의 경우 더욱 복잡해진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의견이 있지만, 일단 고종석은 문화관광부에서 정한 표기법을 따르는 게 좋다고 말했다. 헷갈리는 부분은 국립국어원을 참고하라 덧붙였다.




논리적 흐름을 따지며 글 쓰는 것이 중요

설명을 마치고 교재 『자유의 무늬』에 실린 글 두 편을 함께 읽었다. 처음 읽은 글은 ‘유토피아에 반(反)해’였다. 이 글은 지구의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은 인류의 탄생이라 했다는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글쓴이는 이 말을 받아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소 염세주의적인 시선으로 그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무수한 이데올로기에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그렇게 선하지 않으며 너무 큰 사랑은 언제나 그만큼 큰 증오를 낳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글쓴이는 남을 도우려 애쓰기보다 남을 해치지 말라는 소극적 도덕을 내세우며 글을 끝맺는다.

고종석은 자신이 쓴 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가며 글을 읽어나갔다. 별다른 수정 없이 한 페이지를 읽어가다 ‘한 위대한 예술가가 자기 생애의’에서 ‘자기’를 빼고 ‘생애’를 ‘생’으로 줄였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을 발견한 그는 ‘민간어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간 어원은 학문적 근거가 없지만 그럴듯하게 만들어져 많은 민중들이 믿고 있는 어원을 뜻한다. 주로 연상작용에 의해 어원을 추론하기 때문에 어형과 의미의 유사성을 바탕에 두는 경우가 많다.

‘을씨년스럽다’가 을사년 이후 생긴 말로 을사조약을 맺던 해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나 ‘행주치마’가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을 도와 돌을 나른 여인들의 치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이 민간어원이다. 널리 알려진 ‘화냥년’에 대한 어원도 마찬가지다. 흔히 이 낱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절개를 잃고 고국에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 무관한 민간 어원이다.

설명을 마친 뒤,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갔다. 그는 ‘인류의 탄생이 지구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재난이라는 음악가의 발언이’에서 ‘음악가’는 윤이상을 뜻하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치명적인 재난’에서 ‘인’을, ‘인류의 역사’에서 ‘의’를 제외해 문장을 더 간단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지난 step에서부터 강조했던 부분이라 수강생 모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O), 금새(X)

고종석은 몇 문장을 더 읽어나가더니 꼭 기억해야할 게 있다고 말하며 ‘금세’를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이 ‘금세’를 ‘금새’로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는 수강생들이 책 위에 밑줄 긋는 모습을 바라보며 ‘금세’가 ‘금시에’의 준말이라 거듭 강조했다. 이어 ‘염치’라는 낱말이 나오자 이 말에서 ‘얌체’가 나온 거라고 어원을 밝혀 주었다. 물론, 그 의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많이 바뀌었다.

‘유토피아니즘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과학의 옷을 걸쳤던 마르크스주의’라는 부분에서 그는 수강생을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 부르면서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사회주의에 대해 공상적 사회주의란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필자가 ‘유토피아니즘이라는 말을 거부하고’라고 표현한 것이다. 고종석은 이 문장에 대해 한 가지 더 언급했다. 바로 ‘유토피아니즘이라는 말’을 간단히 ‘유토피아니즘을 거부하고’로 고친 것이다.




다름 아닌, 이제 자주 쓰지 않는 말

두 번째로 읽은 글은 ‘개인주의적 상상력(1)’이었다. 이 글은 거대한 집단주의에 개인주의적 상상력으로 맞서는 글로 지난 시간에 읽은 ‘개인주의적 상상력(2)’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문장은 ‘러시아 혁명 여든 돌이 슬그머니 지나고 있다’였다. 이 문장을 읽은 고종석은 수강생에게 러시아 혁명이 언제 일어났는지 물었다. 하지만 별 대답이 없자 곧 1917년에 일어났다 답하며 그래서 이 글은 1997년에 쓰인 거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갔다. ‘파시스트에 다름 아닌’은 잘못된 문장은 아니지만 일본식 표현이라 걸린다고 했다. ‘-에 다름 아닌’ 이라는 말은 어딘가 폼나게 느껴져 과거에는 자주 썼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표현이라 했다.

글을 읽어나가며 ‘모스크바 재판’과 ‘크메르 루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모스크바 재판’은 1930년대 후반,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숙청 재판을 의미한다. 당시 소련의 유명 혁명가들이 국외에 망명중인 트로츠키 및 제국주의자와 공모해 소련체제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공개재판에서 자백해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재판이 스탈린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는 항의가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처형당했다. 그리고 56년에야 그들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것임이 공개적으로 밝혀졌다.

‘크메르 루주’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운동 단체다. 이들은 정권을 잡은 뒤, 극단적 공산화를 통해 개혁을 추진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유터피아 건설을 명분으로 국민을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동시켰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농촌 중신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념 아래 도시 지식인층과 전문기술자들은 기회주의자로 마구 처형당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 때문에 이들은 20세기 가장 잔인한 정권으로 비판받았다.

이런 집단주의적 광기를 보여주며 글쓴이는 관념 속에 있는 집단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이야기한다. 주변에 숨 쉬고 일하는 개인을 위한 게 아니라 관념 속에 있는 위대한 노동자를 사랑하는 건 결국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일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일에 공모하는 것이다. 글은 최대 선이 아니라 최소 악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 도덕을 이야기하며 끝맺는다.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 고종석은 레드와인이나 코스모스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관념적 집단, 국가를 사랑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눈앞에,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개개인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이날 수정작업은 표현법을 고치기보다는 글 전체의 이야기를 파악하고 논리적 흐름을 따지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한국어다운 문장으로 고치는 훈련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수업이었다. 24주간의 긴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 글쓰기에 가까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수업은 딱 2주. 그 안에서 새롭게 알게 될 이야기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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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연빈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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