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스터랩의 폭력성이 힙합씬을 지배하고 있던 1990년대 초반,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는 ‘평화’를 내세우며 등장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힙합씬의 ‘디스전’ 가운데 모 뮤지션은 ‘힙합 비둘기’로 오히려 조명을 받았었죠. 폭력과 비난, 비판의 물결 속에서 박애를 내세웠던 이들이야말로 원조 ‘힙합 비둘기’라 부를 수 있을 듯하네요. 이번주에는 1992년에 발매된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Arrested Development)의 <3 Years, 5 Months And 2 Days In The Life Of...>를 소개해드립니다.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Arrested Development) <3 Years, 5 Months And 2 Days In The Life Of...> (1992)
1990년대 초반 미국 힙합 씬에서 느닷없는 위ㆍ촉ㆍ오 삼국지연의가 펼쳐졌다. 가장 강성했던 위나라는 N.W.A를 시작으로 하여 일어난 닥터 드레(Dr.Dre), 아이스 큐브(Ice Cube)의 서부라 할 수 있고,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부터 시작하여 갱스타(Gang Starr), 피트 록(Pete Rock) 등으로 대표되는 동부는 오나라라 할 수 있었다. 중원의 패권을 두고 싸운 것은 주로 이 둘이었고, 1992년 기념비적인 <The Chronic>이 등장하면서 주도권은 서부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갱스터 힙합으로 천하가 평정되나 싶던 그 순간 의연히 출사표를 던지고 일어선 그룹이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촉나라’ 남부 애틀랜타에서 등장한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는 힙합씬에 홀연히 등장한 와룡선생과 같았다. 앨범 제작에 걸린 시간을 그대로 타이틀로 삼은
<3 Years, 5 Months And 2 Days In The Life Of...>는 발매되자마자 북벌을 단행하는 제갈량과 같이 거침없이 차트를 점령해나갔다. 하지만 시대를 지배하던 갱스터 랩의 폭력적 문법은 전혀 없었다. 이들의 무기는 ‘평화’였다.
보컬, MC, DJ, 드럼, 댄서, 정신적 지도자 등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는 음악 그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공동체에 가까웠다. 자연히 그들의 음악이나 메시지는 혼탁한 세상에 중지를 치켜들며 쾌락주의에 빠진 갱스터 힙합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힙합의 영역을 넘어 소울, 컨트리, R&B 등 흑인 음악의 각 요소들을 절묘하게 조합하여 남부 특유의 분위기로 버무려낸 음악은 분명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전설적인 펑크(Funk)밴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과 밥 제임스의 곡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People everyday」, 블루스 아티스트 주니어 웰스와 디제잉이 어우러진 「Mama's always on stage」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음악은 긍정적이었고, 또한 사색적이었다. 갱스터 랩이 미국 흑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사회에 대한 강력한 불만의 표출이었다면,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의 음악은 아프로-아메리칸 집단의 자부심을 상징했다. 때문에 앨범은 대체로 흥겹고 밝으며,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편안함을 가졌다. 드럼 비트가 넘실대는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Down of the dreads」 와 「Fishin' 4 religion」, 베이스 리듬이 주도하는 「Give a man a fish」 등이 대표적인 곡들이다.
여기에 음악 활동 이전부터 각종 칼럼을 작성했던 철학자 MC 스피치가 써내려간 가사들은, 당대 사회에 대한 다각적인 해석을 통해 흑인 커뮤니티에 새로운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것과 같았다. 신과의 대화 형식을 취하여 깊은 사색과 고뇌를 풀어낸 「Tennessee」, 노숙자의 삶을 그려내며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Mr.wendel」 은 당시 힙합 씬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반열에 올라 있는 곡들이다.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의 북벌은 성공적이었다. 앨범은 미국에서만 400만장이 팔려나갔고, 발매 이듬해인 199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이들은 ‘최고의 신예’, ‘최고의 랩 듀오/그룹 퍼포먼스’상을 거머쥐었다. 팝 매거진 《롤링 스톤즈》는 이들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했고, 힙합 그룹 최초로 어쿠스틱 라이브인 MTV 언플러그드에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랩 세력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성했고, 설상가상으로 가족 같은 공동체의 내부는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보컬이었던 디온 페리스가 솔로 활동으로 밴드를 탈퇴하고 나서 발매한 두 번째 앨범
<Zingalamaduni>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고, 결국 리더 스피치가 독립을 선언하며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장원에 진 별처럼 안타까운 실패였다.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가 펼치고자 했던 뜻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 재결성을 알린 밴드는 이후 아프리카 빈국 구제 등 각종 사회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계속하여 전파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모두가 비판과 폭력에 물들어가는 세상에 이들은 계속하여 이 땅에 박애를 심고자 한다. 한 시대를 지배한 것은 뒷골목의 갱스터들이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대에
<3 Years, 5 Months And 2 Days In The Life Of...>가 끼칠 영향력은 영원할 것이다. 3년 5개월 2일 동안 이들이 만든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화합의 하모니였다.
글/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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