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개인적 궁금증에서 탄생했다. 2008년 이후 너도 나도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임박한 파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경제학자들이 언론과 방송에 등장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자본가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과거에 역동적이었던 자본주의의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 출간한 『인민을 위한 자본주의』 에서 자유방임주의적인 입장에서 미국 자본주의의 장점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했던 루이지 징갈레스 같은 경제학자가 대표적이다. 물론 폴 크루그먼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경제학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이들은 침체에 빠진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경제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도 과감히 용인할 태세였다.
좌파든 우파든 금방이라도 자본주의가 끝나기라도 하는 양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미래의 징조처럼 ‘아랍의 봄’이라고 칭송되었던 이집트 혁명이 일어나고,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지는 99%를 자처하는 시위대로 채워졌다. 상황은 사뭇 달라진 것 같았다. 90년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거론되었던 다양한 이념들이 한낱 조롱의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였던 시기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탈정치와 탈이데올로기가 최신 유행어처럼 번져가던 것이 무색해졌다. 민주주의의 죽음을 이야기했던 정치학자들이 갑자기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복귀시키면서 정치철학의 문제의식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급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2008년 촛불을 경험했다. 내가 한국의 촛불에서 본 것은 새로운 운동의 도래라기보다 과거 운동의 종언이었다. 새로운 것이 오고 낡은 것이 간 것이 아니라, 운동 자체가 끝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지금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홀로 불을 밝히고 밤늦게 학구열을 불태우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책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빨리 출간된 책이라도 이미 2~3년은 지난 논의이기 일쑤였다. 거기에 참고할 통찰이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고찰도 필요했다. 혼자 파악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다른 조감도가 필요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을 차용하기로 했다.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책의 저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 말이다. 평소에 면식이 있던 이들에게 인터뷰를 청하자 흔쾌히 응해줬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지금은 어렵다는 답신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여하튼, 이들의 호의가 없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뷰는 2012년에 이루어졌다. 인터뷰 내용 일부는 2012년 2월부터 5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 형태로 실렸지만, 이 책에 수록된 것은 편집을 거치지 않은 전체 판본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목표로 삼았던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논평을 가감 없이 들어보는 것이었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자크 랑시에르, 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가야트리 스피박 같은 ‘거물’뿐 아니라, 사이먼 크리츨리나 알베르토 토스카노처럼 최근 부상하고 있는 소장학자들의 시선을 담는 것이 중요했다.
지젝, 랑시에르, 크리츨리, 그리고 토스카노는 내가 공부했던 영국에서 인연을 맺은 철학자들이다. 그렉 램버트는 들뢰즈 관련 학회에서 만나서 인연으로 발전했다. 지젝은 학술대회에서 랑시에르는 세미나에서, 그리고 토스카노는 대학원 수업에서 조우했다. 특히 토스카노는 최근 영국에서 “워릭 시기
Warwick Moment”라고 불리는 그 무렵에 만났다. 로렌조 키에사와 니나 파워 역시 토스카노와 함께 “이론적 열정”을 공유했던 대학원생들이었는데, 지금은 주목 받는 신진 학자로 영국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피터 싱어는 마르크스를 다윈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흥미로운 철학자이다. 최근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인터뷰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들을 호명해서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종합해볼 수 있다면, 훨씬 입체적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론가에 대한 평가도 물어봤다. 단순한 호사취미 때문에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각자의 입장을 들어보고 맥락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지젝과 앙숙 관계에 있는 스피박에게 지젝에 대한 질문을 던지거나, 지젝과 논쟁을 벌인 크리츨리에게 관련 사항을 물어본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인터뷰는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 또는 이메일로 진행했다. 미진한 경우에 추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랑시에르와 바우만 인터뷰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경우는 불어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최정우와 서용순의 도움을 받았다. 스피박은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회관에서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메일로 일정을 맞추고 전담 비서와 전화 한 통을 주고받은 상태에서 약속 장소로 가서 기다리는데,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스피박이 당도해서 인상적이었다.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해준 것도 어딘데, 맥주까지 대접 받는 호사를 누렸다.
몇 개월에 걸쳐 노력을 하긴 했지만 최초의 기획에 도달하는 책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알랭 바디우를 비롯해서 가라타니 고진이나 왕후이를 인터뷰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처음에 구상했던 사상의 지도를 완성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기획이 무엇이었는지 도입부에 붙여놓은 ‘약도’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을 인터뷰하고 보강한 뒤에 책을 내놓아야 하겠지만,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우선 마무리된 순서대로 선보이고자 마음을 먹었다. 인터뷰의 속성상 시의성을 놓치면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인터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철학자들의 대답은 한 마디로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최악의 방향을 향하여』 에 나오는 구절이다. 말하자면 철학은 실패에 대한 사유이다. 따라서 철학은 또 다시 실패할지언정 다시 시도하기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이 경제학자들과 다른 점을 여기에서 짚어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그 위기의 순간에 바로 철학은 새로운 체제를 사유한다. 위기의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본질이자 사명이라는 것이 이 책에 실린 철학자들 사이에 합의되어 있는 명제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비로소 사유의 혁명은 시작된다. 이 경계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들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은 답을 제시한다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그 답을 고민해보도록 주문한다. 이들의 육성을 따라가면서 이제 스스로 답을 찾아보는 사유를 시작해보자.
2013년 8월 15일
이택광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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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이택광 저 | 자음과모음(이룸)
문화평론가 이택광은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을 차용해 철학자 9명을 직접 대담장으로 소환해 일대일로 인터뷰한다. 때는 2012년이며 장소는 이택광이 직접 밝히듯이 그들이 면대면한 곳이거나 이메일을 통한 웹상이다.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지그문트 바우만, 가야트리 스피박, 피터 싱어, 사이먼 크리츨리, 그렉 램버트, 알베르토 토스카노, 제이슨 바커 등 학계에서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주목받는 철학자 아홉 명은 이렇게 해서 한 권의 책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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