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부니 슬슬 소식이 날아든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한다는 소식. 결혼이라는 거사(?)를 치르기에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인가 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도 마치 n이 무한대로 수렴하듯 이야기는 결혼으로 끝난다. 대부분의 고민은 이것으로 요약된다. “나이가 들수록 괜찮은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과 “결혼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어 연애를 시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관계를 시작하기가 이렇게 힘드니 막상 연애를 할 때 되도록 실패를 줄이기 위해 과거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방법이 동원된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접근하는 법, 밀당의 기술을 알려주는 직업인 ‘픽업 아티스트’에게 연애 강습을 받는 일이 그것이다. 이 괴상한 신조어를 보고 경악했던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사이 이 직업을 소재로 한 드라마까지 나왔다. <연애를 기대해> 이야기다.

여기 두 커플이 있다. 첫 번째 커플은 상대와의 거리감 유지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이들, 주연애(보아)와 정진국(임시완)이다. 예쁜 얼굴 때문에 남자들에게 인기는 많지만,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집착하는 성향 탓에 남자들에게 차이기 일쑤인 주연애(보아)는 학교에서 우연히 수강하게 된 연애 강좌가 영 못마땅하다. 설상가상으로 몰래 바람을 피운 전 남자친구에게 산낙지를 던지는 자신의 동영상이 일명 ‘산낙지녀’로 온라인에 유포되고, 그것을 자신의 잘못이라며 비난하는 강사에게 그녀는 마구 쏘아댄다.

나쁜 놈 만나 뒤통수 맞은 건 여잔데, 왜 여자만 바보 취급이에요? 집착 좀 하면 어때서…. 사랑하니까 지키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깟 권력 좀 줘 버리면 또 어때서… 사랑하는 사람 이겨서 어디다 쓸 건데?

- <연애를 기대해> 중에서

그러나 주연애는 자신이 경멸했던 ‘픽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정진국(임시완)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무늬만 멀쩡할 뿐, 사실은 ‘모태솔로’인 남자친구 진국은 주연애가 마냥 좋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무엇이든 그녀에게 맞추려 한다. 각종 이벤트와 선물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의 연애는 뜨겁다.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불도 땔감이 없으면 금방 사그라진다. 다가가는 것과 물러서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진국의 사랑 앞에서 연애는 점점 지쳐 간다.

한편 이들과는 전혀 다른 온도의 커플이 여기 있다. 치의대 졸업생 최기대(최다니엘)은 부유한 집 딸인 최새롬(김지원)과 연애 중이다. 능력은 있지만 가난한 남자와, 그 남자를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는 여자의 만남은 서늘할 정도로 완벽하다. 그들에게는 다툼도 오해도 없다. 새롬은 외부에 보이는 이미지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여자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직접 산 운동화로 ‘없어 보이게’ 프러포즈를 받느니 자신이 직접 원하는 반지를 고르고, 미리 짜 둔 멘트와 함께 친구들 앞에서 화려하게 받는 프러포즈를 더 좋아한다.

내가 이만큼 사랑받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고 내가 결혼할 사람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다 인정받고 싶어. 오빠를 자랑하고 싶은 거라고 난!
- <연애를 기대해> 중에서

처음에는 과하지 않은 감정 소모가 좋아 연애를 지속해 왔던 기대(최다니엘)도 점점 이 연애에 대해 회의가 든다. 아무리 결혼은 현실이라지만 감정 없는 현실 속에서 메말라 갈 자신의 모습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을 차려 주면 감지덕지’라는 말을 듣는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이토록 뼛속까지 시린 연애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비로소 그들은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사랑이었는지 깨닫는다.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연애였지만 거기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연애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 있을 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하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바뀐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사랑의 모습이다.

이제 알 것 같아. 내가 나쁜 놈이라고 몰아세운 숱한 남자들… 그 사람들도 사랑이 쉽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거. 이별할 때마다 부렸던 진상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어. 붙잡고 싶어서가 아니라 버림받는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짓밟힌 내 자존심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던 거야. 연애를 잘 하는 방법 같은 거 사실 없어.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게임이라는 거지.
- <연애를 기대해> 중에서

사랑은 온도가 중요하다고, 그들은 생각했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감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 끌리는 마음을 두고서는 거부할 수도, 멈춰 설 수도 없는 그들이었다. 그들은 깨닫는다. 가장 좋은 연애의 온도는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상대방의 체온이라고. 결국 그들은 서로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한다. 이런저런 기술이나 조언을 다 떼어 버리고, 그저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나 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연애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그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오직 진심으로 무장한 진국의 등장 앞에서 이들의 연애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기대(최다니엘)는 연애에게 마지막 조언을 건넨다. 이번 연애에서는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며. 어쩌면 연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내어 상대의 편에 서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났음을 깨닫는 사람이라고.

산낙지녀에겐 자존심이 우선이라고 했지? 그 사람에겐 무엇보다 네가 우선인가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우도 있어. 그게 진심일 때….
- <연애를 기대해> 중에서

파일럿 편성이었던 이 드라마는 4년 뒤 그들의 재회라는 여지를 남기고 끝났다. 그동안 그들은 여전히 힘든 연애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레는 시작과 달리 늘 상처만 받고 끝났던 이전의 연애들처럼. 너무 뜨거웠던 그녀와 너무 차가웠던 그의 연애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연애가 힘든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될까. 진짜 연애를, 기대해 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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