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바다 소년의 포구 이야기
바다에서 하모니카 연주하는 남자가 멋진 까닭
하모니시스트 고! 전남 강진군 칠량면 봉황 포구
포구 사람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마주해야 한다. 바람에는 몇 가지 소리가 있을까. 바람은 거칠고 매섭지만 때론 세상의 모든 악기만큼 다채롭고 아름답다. 하모니카는 분명 바람이 내는 악기다. 내 귀를 적신 멋진 하모니는 바다의 물결처럼 나타났다 얼른 사라져 버렸다.
하모니카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난다
언젠가 아버지는 나에게 하모니카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내 방에 하모니카가 있는 것을 아버지가 알고 계실 줄 몰랐다. 아버지는 하모니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맞혔다. 내 책상 세 번째 서랍 구석에 있었다. 서랍 속에는 타원형으로 생긴 주황색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그것을 열면 은빛 하모니카가 들어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색 하나 안 변하는 거 봐라.”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집어서 옥수수 알을 씹듯이 입술을 포개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미끄러진 하모니카에서는 놀랍게도 뱃고동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하모니카에 대한 흥미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하모니카는 제 집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버지가 하모니카로 낼 수 있는 소리라고는 뱃고동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모니카 연주자인 전제덕을 좋아하게 되어 책상 서랍을 뒤졌을 때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아버지에게 하모니카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텔레비전 드라마에 집중할 뿐. 그즈음 나는 일본으로의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선물 목록에 하모니카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잊지 않고 하모니카를 사왔다. 아버지는 내심 좋아하며 뱃고동 소리로 화답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뱃고동 소리밖에 연주할 줄 모른다. 바닷바람이 파이프 관, 그 어두운 굴(窟)을 지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내는 최초의 울음이 바로 뱃고동이다. 하모니카에서 뱃고동 소리가 난 것은 아마도 같은 원리이기 때문이다. 한평생 바다에서 살아온 아버지의 숨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포구로 떠날 때면 아버지의 하모니카를 꼭 챙겨가곤 했다.
막상 포구에서 하모니카를 불어본 적은 많지 않다.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이라고는 ‘등대지기’가 전부다. 봉황 포구를 찾았을 때에야 비로소 하모니카와 바다의 조화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고 선장의 구슬픈 가락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스몄다가, 서서히 흩어진다.
낯선 마을을 향기롭게 걷다
전남 강진군 칠량면 봉황리의 작은 포구를 찾은 것은 황금빛 갈대가 황홀하게 일렁이는 늦가을이었다. 칠량천과 강진 바다가 만난 갯가에는 습지식물과 부리가 긴 새들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선창에 올라서자 날이 선 된바람이 발목을 휘감았다. 바다 날씨는 이미 겨울이었다. 선창에는 2톤이 되지 않는 예닐곱 채의 작은 배들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배가 묶이지 않았어도 떠밀려갈 걱정이 없는 시간이었다. 썰물 때라 바닷물이 육지에서 저만치 밀려났기 때문이다. 봉황 포구 앞바다 전체가 속을 훤히 드러내며 볕을 쬐었다. 개펄 생물들이 내놓은 숨구멍에선 물방울이 솟았다. 더없이 한가로운 포구의 오후였다.
마을로 들어서자 단층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철문은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벽에는 ‘해녀촌’ 문패가 세로로 걸려 있었다. 건물 맞은편 정자에 할머니 세 분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들은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낯선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무 문패와 할머니들의 주름진 민낯을 번갈아 보았다. 할머니 중 한 분이 나의 인사에 화답하며 손을 천천히 올렸다가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자를 시작으로 바다와 마을 사이에 좁은 도로가 이어졌다. 차 2대가 동시에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았기 때문에 경운기나 리어카가 그 길의 주인이었다. 왼편으로 지붕이 낮은 집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집에서 서너 발자국만 내딛으면 바로 바다에 닿았다. 이렇게 바다 가까이 집을 짓고 사는 마을을 본 적이 없다. 순간 뒤에서 자전거 벨이 울렸다. 수염이 짙게 난 어르신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자전거 안장에는 녹색 우유박스가 올려 있었다. 그 안에는 막걸리 두 통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자전거는 어느새 마을 안길로 슬쩍 빠져 보이지 않았다.
40미터정도 아저씨를 좇아 잰걸음을 놓자, 비닐하우스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볼 수 있었다. 우유박스 안에 있던 막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밀어보니 속도가 나지 않는 구식 오토바이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자전거 옆으로 오토바이를 세운 아저씨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제야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은행이 익어가는 시간
비닐하우스 안쪽에는 짚단이 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둥근 식탁 서너 개가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각종 조리 기구가 올려 있었다. 한가운데 있는 풍로의 온기로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아저씨 세 분과 아주머니 한 분이 풍로를 중심으로 둘러 서 있었다. 오토바이를 탔던 아저씨가 나에게 손짓하며 풍로 가까이로 이끌었다. 30년째 이 마을에서 장어잡이를 하는 김이남 씨였다. 스포츠머리에 다부진 체격만 봐도 영락없는 뱃사람이었다.
그가 까칠하고 두터운 손으로 풍로 위에서 샛노랗게 익어가던 은행 몇 알을 골라냈다. 한 알 한 알 입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한 후 엄지와 검지만으로 둥근 열매를 눌러서 툭 터트렸다. 껍질 안에서 노르스름하게 익은 연초록의 은행 알이 나왔다. 그는 그 작고 둥근 알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내가 곱게 익은 은행을 차마 먹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자, 이번에는 다른 한 알을 이로 깨물어 까주었다. 손바닥 위의 그 작은 선물은 더없이 따뜻한 환영인사로 느껴졌다. 나는 은행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 뒤로 쌉싸래한 향이 올랐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어르신 모두가 은행을 씹으며 미소를 내보였다. 포구 어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든 이 비닐하우스는 바람을 피하는 대피소였고, 회의를 하는 회관이었으며, 막걸리로 흥을 내는 정겨운 놀음판이자 낯선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이었다.
아직 해가 넘어가려면 두어 시간은 남았다. 그럼에도 어민들은 이미 조업을 마치고 난 후였다. 연유를 묻자 김이남 선장님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바다의 날씨가 육지와 다르듯이 시간도 육지 사람들과 다르다. 바다는 물이 들고 나는 물때가 있다. 월력(月力)으로 생기는 조석현상에 의해 간조와 만조의 시차가 생긴다. 조류의 세기를 숫자로 표현하여 초하루, 여덟물, 초여드레 등으로 날짜를 계산한다. 요즘에는 과학적으로 조석표를 정리하여 어민들이 보기에 참 편해졌다. 하지만 자칫 물때를 놓치게 되면 배를 타고 나가지 못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야 옛이야기라 치더라도 나날이 비싸지는 기름 값을 공치지 않으려면 물때에 맞춰서 부지런해야 한다.
예술가의 마을
자전거를 탔던 아저씨가 막걸리를 권했다. 그러고 보니 비닐하우스에 술병이 제법 진열되어 있었다.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렇게 모여앉아서 막걸리로 회포를 푸는 것일까. 장어 잡는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졸랐더니, 뜬금없이 아주머니가 옆에 있던 아저씨의 등을 떠밀며 한 곡조 청했다. 고창현 선장, 아주머니의 남편인 듯 싶었다. 아주머니는 봉항 포구가 예술가의 마을이라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봉황리는 옹기로 유명한 마을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동네 자랑에 한 수 거들었다. 예전에는 봉황 옹기가 전국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때도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제 정윤석 씨도 아직까지 바다를 마주하며 옹기를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옹기라는 말에 눈이 번뜩 뜨였다.
포구에 들어서기 전에 ‘옹기’라는 간판을 본 기억이 났다. 바다만 바라보다가 포구와 옹기라는 그 이질적인 언어의 질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렸다. 옹기에 대한 궁금증이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 노래 한 가락 뽑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말도 들렸다. 고 선장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한곡 할 시간이 되었다는 듯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보다 먼저 빈 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막걸리를 가득 따라 주었다. 술을 벌컥벌컥 마신 그는 한참이 지나도록 노래를 할 품이 아니었다. 살짝 붉어진 그의 얼굴이 청년처럼 앳돼 보였다. 그는 안주머니에 주섬주섬 손을 넣었다. 이내 작은 하모니카를 꺼냈다.
하모니시스트 고!
고 선장은 하모니카를 다소곳이 쥐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모니카가 입술 위에서 미끄러지자 화려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손을 파르르 떠는 비브라토로 음의 끝처리를 맺었다. 깔끔하고 노련했다. 고 선장의 선곡은 나훈아의 ‘불효자는 웁니다’였다. 그의 표정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이에 나는 온 정신을 뺏겨버렸다. 구슬픈 가락이 비닐하우스를 채웠다. 연주가 절정에 치달을수록 고 선장의 목덜미가 부풀었다 얼른 가라앉았다. 들숨과 날숨이 바삐 이어졌다. 조화로운 연주는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저만치 멀어졌다. 비닐하우스 안은 너른 바다가 되었다가 거친 그의 숨이 되었다. 숨은 손가락 사이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 연주엔 고 선장이 살아온 삶이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한평생 장어잡이를 한 선장이 아닌 하모니카 연주자, ‘하모니시스트 고!’였다.
연주를 마친 고 선장에게 언제부터 하모니카를 불었냐고, 왜 불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연주에 대한 감상을 말할 여유도 없이 제법 다급하게 물었던 것 같다. 연주 내내 놀라움에 더하여 아버지의 하모니카가 생각났다. 나는 가방 안에 들어있는 그 작은 하모니카의 무게를 느끼며 재차 물었다. 비단 선장에게 묻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 젊은 시절부터 외항생활을 했고, 아직까지 바다와 함께 사는 또 한 명의 선장에게 하는 물음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풍로 앞에서 손바닥을 비빌 뿐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선장의 대답을 대신했다.
“바다에 나가면 외로우니까 부는 게지. 소리 듣고 장어가 많이 잡히면 더없이 좋은 날이고, 안되면 그냥 돌아오는 거고.”
포구 사람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마주해야 한다. 바람에는 몇 가지 소리가 있을까. 바람은 거칠고 매섭지만 때론 세상의 모든 악기만큼 다채롭고 아름답다. 하모니카는 분명 바람이 내는 악기다. 내 귀를 적신 멋진 하모니는 바다의 물결처럼 나타났다 얼른 사라져 버렸다. 고 선장은, 아버지는, 바다 위에서 얼마나 많은 물결을 지워나갔을까. 대답할 수 없는 인생이야 말로, 그의 하모니카가 구슬픈 까닭이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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