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바다 소년의 포구 이야기
부산 다대포에 가면 연인을 만날 줄 알았다
부산 다대포, 노을이 남기고 간 자리
시간이 흘러 그 애의 얼굴이 사라지고 다대포라는 이름만 남았다. 이후로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서, 그리고 락 페스티벌을 관람하기 위해서 다대포를 두어 번 찾았다. 원래 다대포는 부산의 3대 해수욕장(해운대, 광안리, 다대포)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해수욕장보다는 항구로서의 명성이 더 컸다. 제주도 바다에서 나는 고등어, 동해에서 나는 오징어, 근해에서 잡히는 아귀, 낙지, 물메기 모두 다대항으로 모였다.
남학생은 왜 아디다스 축구화를 샀는가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을 즈음, 나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급식 제도가 시행되어 3단 보온 도시락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학교 복도에 개인 사물함이 생겨 실내화 주머니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은 벽에 등을 대고 키를 재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보다는 30cm 정도 작은 때였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했다. 아마도 이성(理性)을 자각하게 된 게 그 즈음이 아닐까 짐작한다. 아니, 이성(異姓)이라 정정해야겠다. 그 당시에는 아디다스 축구화가 유행이었다.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은 애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다. 소년들은 축구 골대에 모여 펠레나 마라도나를 흉내냈다. 하지만 축구 연습이라기보다는 애정 공세에 가까웠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교문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보여줘야 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말로는 전하지 못하고 몸으로 표현했던 철부지들은 그렇게 이성을 찾아가곤 했다. 공 없이 오버헤드킥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 역시 다이빙헤딩이나 오버헤드킥을 두어 번 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애는 소녀 대부분이 그랬듯, 축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 애와 가까운 곳에 살았다. 한 달에 한 번 학교 앞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깎았다. 손이 따뜻한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에 꾸벅꾸벅 졸다가도 이발이 끝나면 그 애 집 근처에서 온종일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등굣길이나 하굣길에서조차 그 애를 본 적이 없었다. 더 큰 변화가 필요했다. 그 애가 다니는 속셈학원은 회비가 비싸기로 유명했다. 부모님에게 성적으로 증명하겠다며 속셈학원에 다니게 해달라고 졸랐다. 결국 그 애와 같은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학원을 마치면 그 애를 데려다 주기 위해 일부러 돌아가기도 했다. 편지도 쓰고 작은 선물도 사보았지만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애태우길 수일이었다. 그러다, 그 애가 다대포로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펐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세상에서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다대포는 머나먼 나라의 이름처럼 아련한 곳이 되었다.
영도에서 살았던 나에게 혼자서 가장 멀리 가 본 곳은 버스로 여섯 정거장, 남포동이었다. 남포동은 내게 세상의 끝인 셈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11번 버스를 타고 끝까지 가보리라 결심을 세웠다. 11번 버스의 종점은 다대포였다. 물론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녀를 만나러 다대포에 가다
삐삐가 보급되었고, 장난 전화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 나는 그 애의 집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기도 전에 항상 먼저 끊고 말았다. 몸을 아끼지 않으며 오버헤드킥을 하던, 학원을 옮겨가며 마주치고 싶어 했던 그 용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러던 어느 날, 까까머리에 중학교 교복을 입은 나는 그 비싼 학원을 무단으로 빼먹고는 11번 버스에 올랐다. 남포동이 지나도 하차 벨을 누르지 않았다. 구덕운동장이 지나도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괴정, 사하, 신평, 낯선 동네를 지나치며 점점 다대포와 가까워졌다. 어느새 어둠이 찾아왔다. 손님들이 하나 둘 내리고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한 정거장씩 지날 때마다 심장이 뛰어 속이 울렁거렸다. 조금 있으면 종점이었다. 나는 창밖으로 다대포의 밤 풍광을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다대포를 만난 순간이었다.
그날, 버스가 거의 끊길 때까지 다대포 해수욕장을 걸었다. 늦은 시간까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사람들 속에서 모래 발자국을 세며 걷다 또래의 목소리만 들려도 두리번거렸다. 그 애를 만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막처럼 넓은 모래사장과 춤추는 갈대, 끝이 보이지 않는 고요한 바다는 다대포를 환상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 애의 얼굴이 사라지고 다대포라는 이름만 남았다. 이후로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서, 그리고 락 페스티벌을 관람하기 위해서 다대포를 두어 번 찾았다. 다대포는 부산의 3대 해수욕장(해운대, 광안리, 다대포)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해수욕장보다는 항구로서의 명성이 더 컸다. 제주도 바다에서 나는 고등어, 동해에서 나는 오징어, 근해에서 잡히는 아귀, 낙지, 물메기 모두 다대항으로 모였다. 다대포 재래시장은 문전성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다대포의 명물 중 으뜸은 파래였다. 다대포 바다는 낙동강 하류와 만났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풍부했다. 게다가 유속이 빨라 자연적으로 노폐물이 세척되었다. 봄에 씨를 넣고, 여름 내내 보수를 하고 겨울에 수확하는 일년 농사가 다대포구(옛 선창포구)를 살아 있게 했다. 이곳 어민들은 기계를 쓰지 않고 수작업으로 파래를 채취했다. 상처를 내지 않고 고유한 빛깔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다대의 자랑, 파래
다대 포구를 취재하게 되었을 때, 작은 배를 타고 몰운대 뒤로 펼쳐진 양식장에 나갈 수 있었다. 바다가 얼 정도로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어민들은 바다에 손을 넣어 파래를 걷었다. 나는 출렁이는 파도도 견디지 못해 뱃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함께 나간 노부부는 능숙하게 파래를 채취했다. 그늘 없는 곳에서, 바람 부는 곳에서, 노부부는 찬 바다에 손 넣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파래 특유의 초록빛과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냄새는 바다의 신비와 어민들의 정성을 그대로 증명했다. 걷어온 파래는 색색의 리어카에 담았다. 리어카를 끌고 골목을 지나 공판장으로 모였다. 어민들은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하루의 수고를 자판기 커피로 달랬다. 공판장 옆에는 나무로 지어진 오래된 선창이 있었다.
오래된, 이 단어의 느낌은 다대포가 가진 많은 이미지에 스며있다. 오래된, 골목과 바다와 선창, 그 모든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나는 다대포의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음을 느꼈다. 내 기억 속의 다대포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그래, 나는 그 시간 속에 잠시 멈추었던 적이 있었다.
이십대 후반 즈음 다대포 ‘할매집’이라는 오래된 횟집의 단골이 되었다. 그날 잡은 생선을 큼직하게 썰어주었기에 회 맛을 일품으로 즐길 수 있는 집이었다. 할매집을 알게 된 것은 소설가 함정임 교수님 덕이었다. 동료 소설가, 시인, 평론가가 부산을 찾으면 교수님은 그들을 할매집으로 이끌었다. 바싹하게 구운 파전을 다 먹으면 접시가 넘치게 담긴 회가 나왔다. 나는 존경하는 문인들 사이에 끼어 문학의 열병을 온몸으로 앓았다. 그러면서도 달빛이 술잔에 내려앉을 때면 아련한 추억이 깃든 다대포의 밤바다를 슬쩍 바라보곤 했다. 내 젊은 날의 수많은 질문들이 그 바다 어딘가에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는 어떤 표정도 없이 무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흐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훌쩍 커버린 나 자신이 보였다. 다대포의 색과 향과 질감은 시간에 휩쓸려가는 나를 붙잡아주었다.
2년 동안 낙동강 하구 가까이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강은 흘러 다대포 바다와 만났다. 나는 해질녘이면 다대포까지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탔다. 달리다가도 노을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설 때가 많았다.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아름다운, 절대적인 순간이었다.
여전히 나는 다대포를 동경하고, 그리워한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