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내 꿈은 탤런트였다. 웃거나 피식거리거나 “말도 안 돼. 네가?” 하며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나는 많은 탤런트 시험에 문을 두드렸다. 장동건 씨가 시험을 봤던 해에도 차태현 씨가 시험을 봤던 KBS 슈퍼탤런트 대회에도 이태란 씨가 배출된 SBS 공채에도 지원했다.
물론 예상대로 다 떨어졌다. 그것도 1차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사진을 첨부해야 하는 1차 시험, 정녕 그것이 사진 때문이었을까? 나도 물론 염치가 있다. 지금 언급한 그들처럼 주연배우를 하겠다는 꿈은 없었다. 주유소 직원도 좋고 주인공과 함께 사는 친구라도 좋았다. 유해진 씨 같은 개성파 주연이나 조연급이 내 목표였고, 연기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했지만 수상 소감을 연습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은근히 동경했고 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에서 그 역할로 살아보고 싶었다.
코미디 활동만 하고 있던 2004년, 나에게 주말연속극 <부모님 전상서>라는 작품에서 섭외가 왔다. 그것도 김수현 작가님의 작품에 말이다. 주인공의 제일 친한 친구, 대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매회 두세 신은 꼬박꼬박 나오는 비디오가게 주인 ‘신철’이라는 역할이었다. 눈치 없이 할 말 안 할 말 다하는, 실제 나하고도 굉장히 비슷한 캐릭터였다. 내가 그곳에 캐스팅된 걸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김수현 작가님은 모든 캐릭터와 출연자를 섭외한다고 흔히 알고 있는데, 다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내 역할 같은 경우는 밝은 캐릭터이면서 극에 웃음을 줄 수 있는 역할, 즉 코미디언 정도가 맡아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고, 조연출이 조혜련 선배에게 전화해서 정준하, 문천식 말고 드라마 안 해본 개그맨 후배 중 연기 잘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단다. 때마침 조혜련 선배가 고맙게도 나를 추천해준 것이다.
첫 대본 연습 모임에서 소름 돋는 극찬까진 아니었지만 ‘개그맨치고, 처음 연기하는 애치고 나쁘지 않네?’ 정도로 합격점을 받고 드디어 합류하게 되었다. 훗날 혜련 선배에게 왜 날 추천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혜련 선배한테 몇 개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얘기해줬고 자지러지게 웃던 그녀가 “네가 그 자리에 있었어?”라고 물었다. “아니? 전해 들었지, 나는” 하고 내가 대답하자, “어쩜 그 자리에 없었는데 거기 있었던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살려내니? 너 연기해라”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 이다음에 연기해라”라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연기란 그런 것이란다. 그 자리에 없었으면서도 마치 있었던 것처럼 능청맞게 전달해주는 것, 실제로 그 사람이 아니면서 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그간의 상황과 함께 혜련 선배가 그 조연출에게 내 자랑을 엄청나게 했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이뤄낸 것이라는 자만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후에 드라마를 한 작품 했다. 물론 드라마를 많이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탤런트가 아니라 엄연히 코미디언이니까. 나는 암만 멋진 옷을 입어도 웃기기만 할 테니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할 확률도 매우 낮다. 내 역할은 주로 주인공 친구 정도다. 내 인생이 없다. 주인공의 인생을 묻고 걱정하고 울어주고 숨겨주기 바쁘다. 내 대사는 주로 주인공이 우리 집에 인상을 쓰고 들어오면 시작된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더 심각할 땐 “여기 앉아봐” 그런 식이다. 개그맨이 드라마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너희 코미디에서 주인공 하던 애가 왜 드라마 가면 조연만 하냐? 시트콤은 하더라도 드라마는 좀 그렇지 않니?”
“뭐 어때? 영역 확장 면에서도 다양하게 공부하고 좋지.”
주로 이런 이야기인데, OX 퀴즈처럼 둘 중에 정답이 하나 있으면 좋겠지만 정답 같은 건 없다. 무엇이든 내가 결정하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부모님 전상서>는 30퍼센트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드라마 종영 후 전 멤버에게 4박 5일간 괌행 포상휴가를 보내줬다. 예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김수현 사단’이라며 농담 섞인 오버도 해보았다. 환경도 낯설고 사람들도 새로웠지만, 카메라도 달랐다. 처음 보는 카메라가 옆에서 찍고 멀리서 찍고 여러 각도에서 찍기를 반복하는 신기한 장면은 예능에서 몇 대의 카메라를 쭉 놔두고 한 호흡에 달리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긴장하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면서 10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17회를 마치고 18회부터는 사투리로도 연기했다. 하루는 김수현 작가님이 대본 연습이 끝난 후 나를 부르더니 “너 경상도 출신이니?” 하고 물었다. 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그간 서울사람처럼 보였나? 하는 마음이었다. 처음 선생님은 내가 개그맨이라 이상한 어조가 있는 줄만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알아봤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다음 회부터 사투리로 바꿔줄까?” 하고 물으셨다. 잠깐 고민이 되었다. 끝까지 이겨내고 서울말을 쓸 것인가, 아님 내가 잘하고 편한 사투리를 택할 것인가. 결국 내가 편해야 이 팀들도 편하고 시청자도 편할 거라는 생각에 경상도 사투리로 연기했다. 옆에서 송재호, 김해숙 선생님은 “선생님이 진짜 너 예뻐한다, 얘!” 그러시면서 “맘에 안 들면 보통 유학을 보내거나 간밤에 아파서 죽은 걸로 처리하기도 하는데 말이야”라고 놀림 반 칭찬 반으로 들리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튼 작품 속에서 난 살아남았고 사투리로 연기를 무사히 마쳤다.
프로그램 게시판엔 ‘김영철 사투리 연기 너무 자연스러워요. 누가 보면 정말 경상도 사람인 줄 알겠어요’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글도 있었다. ‘표준말 할 때는 못 느꼈는데 사투리로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한 듯, 연습 더 하셔야겠어요.’
난 삶에 대해서 단언을 잘 안 한다. 맹세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다시 드라마를 하나 봐라. 뭐, 내가 다시 너랑 연락하나 봐라’ 이런 식의 단언 말이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또 드라마를 해보는 쪽을 택할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는 부담 섞인 슬럼프와 동시에 낯선 드라마 환경에서도 적응해야 했던 그 시절. 드라마 출연만 하면서 남는 모든 시간은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보냈다. 촬영 스케줄이 많이 잡히면 월수금 혹은 화목에 학원에 갔고, 스케줄이 드물 때는 매일 다녔다. 그렇게 학원에 다니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적어도 ‘난 왜 일이 없지? 시간이 너무 많아. 할 일이 왜 이렇게도 없지? 휴, 사는 게 재미없다’라는 마음은 가지지 않았다. 대신 ‘왜 내게 기회를 더 많이 주지 않지?’ 같은 불평과 불만은 조금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는 생각에 책도 보고 영어 단어도 외우고 부지런히 감각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코미디언이 드라마를 한다고 꼭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동욱이라는 멋진 배우와 좋은 친구가 된 것은 그 드라마를 통해 내가 받은 값진 선물 중 하나다. 현재 <강심장>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예능에서도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그는,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에도 나와주는 등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이제는 나의 대표적인 개인기로 자리 잡은 김희애 선배 흉내도 그 드라마를 하면서 자연스레 발굴한 소재였다. 우울한 시절이 있더라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온 힘으로 해나가노라면 선택지는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
- 일단, 시작해 김영철 저 |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이루고자 하는 꿈과 삶의 목적을 위해 꾸준히 배움의 길을 걸어온 김영철이 20~30대 젊은이들에게 전해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삶의 우여곡절이나 대단한 서사라고 할 만한 게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혜안과 그가 읽었던 책의 교훈과 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했던 흔적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배움이고 학습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독자들에게 나눠주고자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