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부당거래>는 날을 세우고 현실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영화였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어쩔 줄 몰라 하던 류승완 감독이 2013년 새롭게 선보이는 영화는 첩보 블록버스터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을 통해 기대 가능한 생생한 한국형 액션 영화에 ‘첩보’라는 장르적 특성을 녹여냈다. 오랜 시간 그와 짝패를 이뤄 온 정두홍 무술감독을 통해 익숙하게 보아왔던 맨몸의 거친 액션에 첩보물에 어울리는 총기 액션을 더한데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기술적 성과를 보이는 카 레이싱 장면까지 더해져
<베를린>은 첩보 액션 블록버스터의 튼튼한 구조를 선보인다.
게다가
<부당거래>를 통해 장르 영화 속에서도 이야기의 흐름과 주제, 인물 사이의 갈등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심리적 액션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한 류승완 감독이라 더욱 기대가 된다.
<베를린>의 줄거리는 배우 복잡하고, 그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표현해내는 것은 배우들의 세밀한 감정 연기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화려한 액션에 더해
<베를린>은 인물들 사이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신경 써서 배신과 누명 속에 제거 대상이 되어 쫒기는 표종성과 련정희의 이야기를 품어낸다. 여기에 조국에 배신을 당하는 표종성이 겪는 내면의 갈등은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지만
<베를린>은 여전히 ‘류승완’ 표 영화다. 1998년 한국형 첩보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렸던 <쉬리>의 한석규를 15년 만에
<베를린>에서 만나는 것도 매력적이고, 어떤 장르의 영화에서도 제 몫을 다 하는 하정우라는 배우를 만나는 것도, 지독한 악역에 푹 빠진 류승범을 만나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게다가
<도둑들> 이후 재발견이라는 평가를 받는 전지현이 이번에는 강한 남성들의 액션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베를린>에서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낸다. 가련하지만 강인한 여성이지만, 극히 감정을 절제하며 속으로 삭히는 역할이라 만만치 않았을 텐데, 기대 이상의 배우적 역량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리고 4명의 주인공 이외에
<베를린>의 또 다른 주인공은 ‘베를린’이라는 도시 그 자체이다. 도시가 가진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기운과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남북관계의 정서가 더해져 더 없이 훌륭한 로케이션 장소로 활용된 베를린은 냉정하고 한기가 느껴질 만큼 추워 보인다. 주인공이 처한 가슴 시린 상황과도 잘 어울리는 배경이다. 베를린의 번잡한 기차역과 브란덴부르크 문, 그리고 각 잡힌 대사관과 유대인 학살 추모비 등 도시와 공간을 활용하는 법도 훌륭하다. 베를린에서 다 담지 못한 로케이션 장면은 라트비아에서 진행되었는데, 최근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의 노르망디 전쟁 장면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다. 아직 개발이 덜 된 자연의 풍광을 고스란히 담아낸 라트비아의 촬영은
<베를린>에 고전 첩보영화의 느낌을 담아내는데 큰 일조를 한다.
하층민의 거친 삶을 현실로 끌어올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류승완을 처음 세상과 만나게 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무척 거친 영화였다. 순제작비 6천만 원으로 제작된 4편의 단편을 연작형식으로 이어붙인 이 영화는 코미디, 호러, 액션이 뒤섞인 영화로 자기의 의지를 벗어나 통제 불능의 상태에 놓인 하류 인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스스로 ‘싸구려 장르영화’라고 명명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B급 정서를 가진 젊은 감독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01년 임원희 주연의 <다찌마와 리>는 당시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한국형 컬트 영화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키치’의 미학을 류승완은 억지로 차용 한다기보다 ‘키치’의 정서를 날 것 그대로 영화에 녹여낸다.
2002년 첫 장편 상업영화인
<피도 눈물도 없이>는 투견장의 개싸움처럼 사람들이 뒤엉켜 싸워대는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류승완은 개처럼 싸우다 개처럼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이혜영과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캐스팅부터 파격적이었다. 필름 누아르의 장르적 관습 속에 한국적 정서를 녹여낸 이 영화는 그만큼 낯설고 이질적인 영화였다. 해학과 비애를 녹여내지만, 잔혹한 묘사에 비해 인물간의 유대와 갈등은 충분히 농익지 못했다. 2004년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한국의 타란티노라는 별명을 얻은 그의 스타일을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였다. 유명한 영화를 패러디하거나 그 감성을 인용하는 것도, 익숙한 스타일을 키치적 감성으로 녹여내는 것도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주먹이 운다>
2005년
<주먹이 운다>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영화로 기억된다. 장르적 관습을 이용한 B급 감수성에 직접 몸담아 체득한 하류 인생의 거친 단면 대신 이 영화는 인물의 감성과 슬픈 정서에 더 주목하는 영화이다. 전작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주먹이 운다>를 통해서는 그 내밀한 관계까지도 들여다본다. 장르적 관습과 하류 인생을 바라보는 감독의 정서 속에 드라마의 세밀함까지 담아내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짝패>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라>
2006년
<짝패>는 그의 짝패인 정두홍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직접 주인공을 맡아 선보이는 끈끈한 액션영화였다.
<주먹이 운다>에서 선보인 드라마 대신
<짝패>는 그의 초기작품인 액션 영화에 방점을 찍는다. 복수극이라는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정두홍과 류승완은 ‘액션’ 영화가 류승완 표 영화라는 자의식을 이 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뒤로 물러서 있다가 주인공이 되어 부각된 정두홍은 훌륭한 무술감독이자 훌륭한 배우이지만,
<짝패>는 어떤 점에서 충분히 익숙하고 새롭지는 않았다. 2008년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라> 역시 류승완 표 영화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영화였다. 2001년 <다찌마와 리>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통해서 류승완 감독은 뻔뻔하고 과감한 패러디와 B급 영화의 유희정신을 신나게 풀어 놓는다.
<짝패>와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라>를 통해 류승완은 감독으로서의 자기 증명을 하고자 하지만,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뉜다.
<부당거래>
2010년
<부당거래>는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새롭고 고무적인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류승완 표 영화라는 자의식을 최대한 감추고, 장르영화에 대한 찬양도 하지 않는다. 그의 앞선 영화가 지속적으로 놓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통해 시대의 징후를 비판하는 방법을 액션이 아닌, 드라마로 드러내면서 관객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에는 사회 하층민의 삶 속에 깊이 투명된 감독의 시선이 지상으로 올라와 세상의 ‘계급’과 그 구조를 읽기 시작했다는데서 시작된다. 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인 류승완은 날카로운 칼날 같은 시선으로 모순적 계급 구조를 비판한다. 따라서 앞선 그의 영화 속 인물들에게 그가 가진 것이 ‘연민’ 이었다면,
<부당거래> 속 기득권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분노’의 날선 감정을 품어낸다. 연민과 분노가 만나, 한국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비판하는 경지에 이른 영화가
<부당거래>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10여년, 류승완의 영화가 너무 앞서가거나, 파격이어서 관객과 발맞춰나가는 호흡이 엇박자였다면
<부당거래>를 통해 찾게 된 균형감은
<베를린>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그동안 쌓아온 장르 영화의 테크닉과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야기를 축조하기 시작한 감독이 만들어내는 첩보 블록버스터라니 그 누가 기대 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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