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의 대중적 파괴력이 절정이었던 때 그의 팬들은 강한 결속력을 드러내며 기존의 틀과 충돌했다. 그들은 공공연히 “이게 바로 우리 세대다!”라고 했다. X세대라 불리던 당시 청소년들은 이전에 말이 없다가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눈을 부릅뜨고 외치기 시작했다. 입시와 규율에 눌려 소외된 이들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뭉치게 한 인물이 서태지였다. 그들에게 서태지는 여느 스타처럼 오빠가 아니라 의식의 동지이자 사회적 리더로 솟아났다. 그는 누군가 부당하게 건드리면 용수철 튀듯 반발하곤 했던 새로운 세대의 꿈과 희망이었다. 그가 리더가 된 이유는 바로 당시의 세대의식을 발화시켰다는 데 있다. 서태지는 그 세대들과 새 질서를 찾아가는 자발적 혼돈을 주동했다.
하나 둘 셋 Let’s go 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 그 마음은 위험하다 /
자신은 오직 꼭 잘될 거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 /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환상 속의 그대」
난 신문을 오래 보면 눈이 뒤로 돌아가 / 내가 이루려던 꿈에 니가 깔리진 마 /
날 행복하게 만들 거라면 그러면 난 마당에 나가 잡초나 뽑아야지 / 말시키지 마
-「내 맘이야」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 고등학교를 지나 / 우릴 포장센타로 넘겨 /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 이젠 생각해봐 대학! /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 좀 더 솔직해봐 넌 알 수 있어
-「교실이데아」
1992년 3월, 그때 대중음악은 돌이켜 보면 지금에서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을지 몰라도 당시를 살아가던 음악관계자들에게도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늘 그랬듯 스타들은 즐비했다. 밴드 부활 출신의 이승철, 무한궤도에서 나온 신해철, 이승환 그리고 신승훈이 젊은이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수 지망생들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현식 같은 포효하는 가창을 모델로 삼았고, 작곡가들은 유재하가 되기를 열망했다. 대학생들은 김광석, 정태춘, 노찾사의 포크나 민중음악을 찾았다. 나이 마흔살을 넘겨서도 ‘꿈’을 히트시킨 조용필은 여전히 가왕이었고, 이선희는 여가수 대표였다. 트윈폴리오와 나훈아의 앨범은 스테디셀러 품목으로 늘 레코드 가게에 배치되어 구매자를 기다렸다. 모든 것이 무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정작 대중적 화제성으로 떠들썩했던 가수는 이 땅의 인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온 아이돌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1992년 2월에 있었던 이들의 내한공연에서 수십 명이 다치고, 급기야 한 명의 학생이 깔려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지자 갑작스레 청소년문화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외국의 댄스그룹에 열광한 틴에이저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은 부정적이었다. 얼마 후 한 신문에서는 ‘뉴 키즈 참극 벌써 잊었나?’하는 개탄조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뉴 키즈 사태에 몰매를 맞은 그 청소년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열혈과 집단 히스테리를 폭발시켜 줄 새 아이콘을 맞았다.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뉴 키즈 사태 한 달 후인 3월, 돌풍을 몰고 올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이 나온 것이다.
서태지는 아마도 뉴 키즈 사태를 통해 댄스의 파괴력, 적어도 10대를 삼키는 거대한 흡인력을 확인했을 것이다. 당시 가요계는 1980년대 말에 득세한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의 댄스로부터 변진섭, 이상우, 김민우, 조정현, 이정석, 신승훈 등의 발라드로 흐름이 다시 돌아간 분위기였다.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와 ‘보이지 않는 사랑’이 말해 주듯 발라드는 강했다. 하지만 메탈 밴드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치며 꿈을 다지고 있었던 서태지는 댄스의 괴력을 믿었다.
나중 TV로 비친 그의 다이내믹한 회오리춤은 그의 비장의 무기였다. 서태지는 그것이 아이들을 들뜨게 한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 흥분된 것을 좋아한다. 강한 댄스와 묶이면 그들을 더 흥분시킨다!”는 영국 무용교육학자 로이스턴 맬둠의 말 그대로였다. 당시 MBC의 쇼프로그램 PD 김종진은 ‘난 알아요’ 때의 회오리춤을 이렇게 기억한다.
“많은 가수들과 작업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카메라를 꽉 채운 가수는 처음이었다. 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목마르게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은 빠르게 그리고 집단으로 새 영웅을 맞이하였고, 마침내 폭발한 5월에는 단호하게 하나의 고정된 소속감으로 자진해 전열을 짰다. 그럴 수 있게 한 동력은 댄스로 표현된 다름 아닌 랩 음악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전은 물론 음악가들이 랩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해철은 방금 전에 터뜨린 히트곡 ‘안녕’에서 랩을 시도했다. 다만 그게 느린 템포였고 더구나 영어였다는 점에서 어떤 선을 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껄이듯 빠르게 토해 내는 래핑은 미국에서는 대박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좀 거북하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우리말로 랩 하기는 방정맞은 거 아닌가?” “그건 미국 애들 얘기지!”
포크, 록, 민중가요 그리고 무엇보다 발라드가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말 랩에 대한 도전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것을 했다. 랩이 마침내 국산화된 것이다.
난 알아요 /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
그 사실을 그 이유를 /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난 알아요」
이 단 하나의 곡으로 대중음악계 아니 사회 전체가 갓 나온 신인에게 굴복했다. ‘난 알아요’가 던진 센세이션은 변화에 대한 갈망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다. 우리말로 랩을 한 것은 어떤 점에서는 음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엄숙과 권위에 대한 비틀기였다. 적어도 현재 모습이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느꼈던 당시 10대 청소년들은 우리말 랩, 곡 구성, 의상, 회오리 춤 등 서태지가 모든 면에 치밀하게 구성한 파격적 기획에 속속 포섭되었다.
거기에다 서태지는 강렬한 록 기운을 곡에 불어넣었다. 뒤에 나온 ‘하여가’와 마찬가지로 그때까지의 대중적 히트곡 가운데 기타 노이즈를 대담하게 배치한 것은 서태지가 유일했다. 시나위 시절부터 자신의 근본이었던 록을 그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1집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에 이어 2집 ‘하여가’ 그리고 4집의 ‘컴백 홈’까지 랩은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록을 부각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젊은 세대를 등에 업은 서태지는 위풍당당했다. 1994년에 그는 아예 본색을 드러내듯 강력한 얼터너티브 록과 메탈로 채색한 3집 앨범으로 또 한 차례 격변의 기치를 들어올렸다. ‘교실이데아’ 같은 현실적, 도발적, 저항적 메시지의 노래는 교실은 물론 사회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부 교사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노래가 되었다. ‘난 알아요’가 음악적 광풍이었다면 이번은 사회적 쓰나미였다.
아마 많은 스타 가운데 기존 질서와 가치에 대해 대공세의 깃발을 휘날린 뮤지션은 서태지가 처음이다. 이 새로운 젊음의 공격적인 사고를 평자들은 X세대의 저항의식이라고 했다. 사회성이 덧붙여진 결과로 서태지의 존재감은 단순한 음악가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X세대에게는 계시와도 같은 사회적 리더로 폭등한 것이다. 10대의 대통령, 문화대통령, 대한민국 음악역사 바로 세우기 그리고 심지어 사교의 교주라는 요란한 별칭들이 당시 상황을 대변한다.
기성세대는 당황했다. 서태지의 음악은 전혀 들어본 경험이 없는 느닷없는 것이었다. 변화에의 적응 속도가 더딘 어른들은 정도의 차가 있었을 뿐 대체로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했다.
“서태지가 나오고부터 가요를 안 들었어!”
하지만 이전 세대가 들었던 포크와 발라드 그리고 민중가요는 대세를 넘겨줄 준비를 해야 했다. 서태지가 없었더라면 국내에 흑인음악 그리고 세대음악의 출현은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다. 그가 퍼뜨린 랩, 헤비메탈, 얼터너티브 록, 펑크, 갱스타 랩, 하드코어는 한마디로 아버지가 싫어하는 모든 음악들이다.
2000년 MBC <컴백 스페셜 서태지>에서 그의 선택은 하드코어였다. 그것은 메탈, 펑크, 랩 등 본래 소란스런 음악에다 볼륨과 스피드를 더 극대화한 초강성 굉음이었다. 거기서 음악팬들은 모처럼 현란한 춤이 아닌 통렬한 악기 소리를 들었고, 가수의 사나운 포효를 목격했다. 가요스타일이 변해야 한다는 젊은이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전성기 시절 서태지는 그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공연은 틴에이저의 설익은 감각의 애교형 댄스와 발라드가요 천지에서 사운드혁명의 깃대를 꽂는 일대 도발의 현장을 사람들에게 또다시 선사했다. 그것은 아마도 천편일률적인 기획상품들 HOT, 젝스키스, 핑클, SES, 클릭비 등 아이돌을 쏟아 낸 음악산업에 대해 한 음악인이 가한 린치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음악예술이 음악비즈니스로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때였고 음악인은 연예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하드코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태지의 한 열성 팬은 감격한 나머지
“이제 소리의 새날이 밝는다”고 울먹였다.
서태지에게 열정을 헌신하고 기꺼이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대부분 입시와 입사에 매몰된 숨 막히는 젊은이들이다. 서태지는 바로 이 세대를 묶어 새로운 제3그룹의 출현을 알렸다. 이 그룹은 물론 기득권층도 아니었으며 거기에 정치 사회적으로 대치한 그룹도 아니었다. 이들은 정치, 경제나 사회이념과는 뚜렷하게 분리된 문화예술세대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두면 아무 피해를 주지 않지만, 건드리면 자기주장을 용감하게 개진하고 자신을 드러내며 또 몸부림치며 제도권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특성을 보인다.
“지난 1996년 은퇴선언은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과하고 싶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과한다!”는 2000년 서태지의 대화에서 이 제3그룹 의식의 단편을 읽을 수 있다.
우리들이 힘든 일을 겪을 땐 그 곁에는 아무도 있어주질 않았어 /
다만 우리가 견딜 수 있던 건 너희들의 크나큰 사랑이었어 /
우린 약하지 않아 어린애가 아니야 마음을 서로 합하면 모두 해낼 수 있어 /
난 더 잘 하겠어.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 역시 영원토록 너희들을 사랑할 거야
-「우리들만의 추억」
내가 널 지켜줄게 / 니 가슴 짖어줄게 / 네 눈물 닦아줄 게, 믿어 날
-「인터넷전쟁」
서태지세대는 불굴의 저항의식을 수혈받아 세상에 눈을 돌렸고 뭉칠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사라진 것 같지만 실은 언젠가 때가 되면 전면에 나설 것이다. 사회 역동성과 변화는 과거에는 정치경제의 몫이었지만 앞으로는 문화가 주도할 것임을, 문화가 아니면 통할 수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음을 서태지 세대는 예고한다. 서태지와 함께 새로이 발견한 대중문화의 소셜 파워를 상정하지 않고는 지금의 우린 어떠한 것도 가능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서태지 음악과 위상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쏜 화살처럼 빠른 세월임을 느끼게 하는 서태지 20년이 알려 주는 것은 아티스트의 실험과 도전이야말로 대중예술을, 아니 사회전체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해 주는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담대하게 덤벼야 바뀌는 것 아닌가. K-POP의 해외공략과 인디의 분발에도 현재 우리 음악계는 서태지의 키워드인 도발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없는 게 아니라 가려진 것이겠지만 그만큼 우리 음악계가 상업성과 인기에 철저히 포박된 것도 사실이다. 서태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누구에게는 불편할 수 있겠지만 팬들에게는 재림의 바람이요, 음악계로서는 변화를 향한 타는 목마름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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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를 말하다 임진모 저 | 빅하우스
이 책은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20여 년간 축적한 인터뷰, 취재자료, 평론을 토대로 엮어 낸 가수와 가요 이야기이며, 우리 대중음악의 사료이자 자산이다. 60년대 미8군과 번안가요에서부터 70년대 대마초 파동, 80년대 팝을 이겨낸 가요, 그리고 90년대 우리음악의 혁명을 통해 마침내 우리 가요는 지금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로 향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음악과 가요를 탄생시킨 주인공과 최고의 가수에 주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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