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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여자들에게 해로운 진짜 이유는…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누가 이 책이 여자들에게 해롭다고 했는가? 법에 걸리지 않나 싶을 만큼 너무 잘생긴 그 남자와의 연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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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쯤 살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남자가 어떨 때 질색팔색을 하느냐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보다 잘난 것 같을 때 질색팔색을 하고, 두 번째로는 다른 남자가 자기보다 잘났는데 여자들이 그 사실을 알 때다. 그리고 맙소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이 두 경우에 모두 해당된다.

30년쯤 살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남자가 어떨 때 질색팔색을 하느냐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보다 잘난 것 같을 때 질색팔색을 하고, 두 번째로는 다른 남자가 자기보다 잘났는데 여자들이 그 사실을 알 때다. 그리고 맙소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이 두 경우에 모두 해당된다. 그러니 ‘엄마들의 포르노’ ‘언니들의 포르노’라고 불리는 이 책이 싫다고 미국에서 남편들이 그렇게 이 책이 싫다고 난리를 쳤겠지. 음란하다 어쩌고 하며 남자들이 준엄하게 이 책을 바다 건너에서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맙소사, 남자들이 여자가 음란한 걸 싫어할 때란 자기 아닌 다른 수컷과 음란할 때밖에 없잖아!

그리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스물 한 살 짜리 ‘처녀’가 엄친아와 몇 권에 걸쳐 놀아나는데 이걸 좋아할 남자가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역시 남자들은 당당하단 말이야. 우리 여자들은 열 몇 살밖에 안 난 소녀들이 다리를 쩍 벌리고 봉을 붙잡고 업소 버금가는 민망한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며 열광하는 남자의 벌름대는 콧구멍에 마음이 불편해도 너 질투하지? 소리 들을까봐 말도 못 하거나 심지어 나는 쟤가 예쁜 것 같다며 같이 봐주기까지 한다!

어쨌거나 27세의 CEO, 크리스천 그레이는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의 표현에 따르면 이렇게 잘 생겨도 법에 걸리지 않나 싶을 만큼 잘생겼다. 뭐 기생오래비같이 생겨서 뭘 한담, 남자는 능력이지! 라고 생각한다면 돈이 너무 튀어서 출판사 에디터 경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출판사 하나 둘 정도 사 주는 건 어린애 팔 비틀기보다 쉽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야하고, 뭐가 그렇게 섹시하고 음란한지 싶어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집어들었다가 공처럼 데굴데굴 구르느라 바빴다.

알려진 대로 작가는 『트와일라잇』의 팬픽으로 시작했고, 『트와일라잇』의 그림자가 이 책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를테면 이 땅의 공산품이 아닌 것 같은 어떤 여자, 그리고 평범한 듯 하지만 그 여자의 매력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레이더를 지닌 어떤 남자, 그렇지만 나는 위험하다며 절대로 가까이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입하다가 이 여자가 가까이 안 오려 하면 냉큼 낚아채면서 계속 제 입으로 나 위험해 나 위험해, 하고 말하는 그런 남자. 테일러 로트너만 빠졌지 <트와일라잇의 50가지 그림자>라고 해도 봐줄 만하다.

하지만 이 책이 유해하다면, 그건 남자들이 이 책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크리스천 그레이를 조련시킨 ‘로빈슨 부인’은 학교라도 차려서 남자들을 단체로 교육 좀 시켜야 한다! 특히 한국 남자들은 듣자 하니 좀 괜찮은 안마방 같은 곳은 요즘 시세가 18만원쯤 한다던데 그 돈을 모아서 차라리 어학연수처럼 단체로 로빈슨 부인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더 남는 길일 것이다! 누군가 이 책을 유해매체로 판정한다면, 이 책이 여자들에게 해롭다면 그건 남자들은 섹스를 다 이렇게 잘하겠거니 생각하게 될까봐 상당히 위험하다. 그래서 성경험이 없는 여학생들에게 읽히기는 상당히 걱정스러운 책이다.

섹스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 나오는 것 같은 쾌락이 120% 느껴지는 섹스를 보통 여자들은 평생 가도 한두 번 경험할까 말까 한데, 무슨 마이더스의 손도 아니고 크리스천 그레이는 손만 댔다 하면 여주인공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아나스타샤 스틸이 그레이가 자신에게 손을 댈 때마다 ‘내 안의 여신이 비명을 질러댔다’ ‘내 안의 여신은 내 의견 따윈 생각지 않고 쾌락에 몸을 맡겼다’ ‘내 안의 여신은 이미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이 온 몸을 벌린 채였다’ ‘내 안의 여신은 만족한 채 기진맥진해 침대에 널부러져 있었다’ 따위의 여신 타령을 끝도 없이 재잘재잘대는 걸 보면 나중엔 좀 짜증이 날 정도다.

사실 섹스라는 건, 특히 아나스타샤 스틸처럼 물리적으로 처녀인 여성에게 섹스라는 건 대체로 쾌락과는 관련없는 폭력과 자학, 죄책감으로 시작되는 건데 뭐 이런 운 좋은 신데렐라가 다 있담. 21세기의 신데렐라는 남자가 신형 자동차로 낡은 비틀을 싹 바꿔 주는 건 물론이고 그녀 안의 여신이 미쳐 그르릉거리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숨이 막힐 듯한 쾌락까지 선물한다! 영양사를 보내 나긋하고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도록 관리하고, 좋은 음식을 먹도록 한다. 수갑을 채우고 모욕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래 봤자 아나스타샤 안의 여신은 꽁꽁 묶인 채 비명을 지를 뿐이다! 게다가 크리스천 그레이는 하다가 언제든지 STOP할 수 있는 싸인까지 그녀에게 맡긴다. 나는 SM을 잘 모르지만 이건 SM이라기보다는 그저 변주된 할리퀸 로맨스에 가까운 것 같은데.

어쨌거나 소녀들에게, 섹스가 이렇게나 훌륭하고 굉장하고 멋지고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해롭다. 그렇게 잘 하는 남자는 정말이지 드물단 말이다. 섹스란 땀이 나고 힘들고 가끔 질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나서 묘한 오해를 받거나, 잘 안 씻은 남자의 겨드랑이 냄새가 훅 끼쳐 오거나 저도 거근이 아닌 주제에 넌 가슴이 왜 이렇게 작냐고 불평을 듣곤 하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과 하게 될 때 행운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라도 해서 크리스천 그레이와의 섹스처럼 벼락이 치고 내 안의 여신이 울부짖는 경험 같은 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그림자를 책으로 써 봤자,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겠지. 그냥 뒤로 하면 텔레비전이나 볼 텐데, 하고 생각하는 섹스가 어떤 여자들에게는 평생 해 본 섹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게 진짜 음울한 그림자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아나스타냐, 복도 많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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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 L 제임스 저/박은서 역 | 시공사
대학 졸업반인 아나스타샤 스틸은 아픈 친구를 대신하여 청년 부호 크리스천 그레이를 인터뷰한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레이는 아나에게 기묘한 관심을 보이고, 아나 역시 예상보다 훨씬 젊고 잘생긴 그레이에게 끌리지만 자신과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며 애써 잊으려 한다. 며칠 후, 우연히 그와 만나게 된 아나는 그레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사랑임을 깨닫고 그를 잡는다. 그러나 그레이는 원하는 것은 평범한 연인관계가 아닌 깊고 어두운 그 무엇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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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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