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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대답해.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상권 「날다」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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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은 아래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물가에 앉아 목을 축인 다음 갈대숲에 솟아 있는 개복숭아나무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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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은 아래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물가에 앉아 목을 축인 다음 갈대숲에 솟아 있는 개복숭아나무로 날아갔다. 흐벅지게 꽃으로 덮인 개복숭아나무의 절반은 갈대숲에 가려져 있었다. 지혜의 샘은 나무 아래로 내려가다가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옆으로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무모심이었다.

지혜의 샘은 “아, 예술가 놈이다” 하고 몸을 낮춘 다음 나무모심이 사라지는 곳을 보았다. 지혜의 샘은 오목눈이들을 늘 ‘예술가’라고 치켜세우면서도 틈만 나면 그들의 알을 훔쳐내려고 궁리하였다. 물론 그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지혜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갈대밭이나 덩굴숲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집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지혜의 샘은 더욱 그 예술가들의 알을 훔쳐먹고 싶었다.

며칠간 굶으면서 그 작은 예술가들을 추적하여 집을 알아낸 적이 몇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정말 집 한번 잘 지었군!” 하고 힘없이 감탄사만 내뱉으면서 씁쓸하게 돌아선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지혜의 샘은 숨을 죽이고, 오늘이야말로 그 예술가들의 알을 훔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지켜보았다. 나무모심이 갈대밭을 가로질러가더니 가느다란 병꽃나무에 앉았다. 그곳에 예술가들의 비밀스런 집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역시 나는 현명해. 내가 쫓아서 나갔더라면 그놈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갔을 거야. 히히히, 역시 나는 지혜로운 까마귀야.”

지혜의 샘은 부리에다 힘을 주었다. 조금 전에 번개부리한테 당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지혜의 샘은 누군가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고, 다른 새알은 숱하게 먹어보았으나 아직까지 맛을 보지 못한 오목눈이의 알이 떠오르자 배까지 고팠다. 오목눈이들의 집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거늘 이렇게 쉽게 찾아냈으니 결국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지혜의 샘은 다짜고짜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다. 나무모심이랑 거미모심이 세든 병꽃나무의 노란 꽃들이 기겁을 하면서 흔들렸다. 나무모심의 목소리도 다급하게 터져나왔다.

“비비비이~ 알귀신이다, 큰일났다, 알귀신이 습격해온다비이~비이!”

지혜의 샘은 거미모심이 뒤돌아보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거미모심은 살갗이 터지는 아픔을 느꼈고, 자신을 통째로 삼켜버릴 정도로 큰 입을 보았다. 그래도 집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혜의 샘이 폭풍처럼 바람을 일으키면서 집으로 내려앉자, 집을 떠메고 있는 병꽃나무가 새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기우뚱하면서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기울어졌다.

꽃송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갈대만 없었다면 땅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거미모심은 중심을 잃으면서 집에서 떨어져나갔고, 알들이 바깥으로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위험을 모면했다. 오목하게 파인 집이 조금만 얕았더라도 알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지혜의 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집주인을 강제로 몰아내고 알 하나를 꿀꺽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야비한 알귀신아, 어서 꺼져비이비이~!”

“비이비이~ 이 강도야, 어서 꺼지란 말야!”

오목눈이들은 자신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적의 출현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지라 죽음을 각오하고 이 악당한테 맞섰다. 나무모심은 악당의 눈앞까지 날아가서 위협하고 날개로 내리치고 부리로 쪼아댔으나 이 거대한 생명 덩어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쪽은 자신들의 알과 집을 지키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하였고, 한쪽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알을 삼키고 있었다.

지혜의 샘은 나무모심이랑 거미모심의 공격에 맞대응하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번개부리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무모심과 거미모심까지도 해치울 수도 있었다. 지혜의 샘은 알을 더 좋아했다. 자신의 무게 때문에 집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오히려 성가셨고, 나무모심의 부리는 지혜의 샘을 위협하지 못했다.

지혜의 샘은 알을 다 삼키고 나서야 작은 새 부부를 보았다. 작은 새들은 절망하면서 울어대고 있었다. 지혜의 샘은 트림을 하면서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희들의 집이 내 눈에 띈 것도 다 운명이다! 내가 일부러 너희들 집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고 날아갔다.

거미모심은 끝내 슬픔을 삭이지 못하고 집을 머리로 들이받더니 지혜의 샘이 사라진 골짜기 아래로 날아갔다. 갈대를 간질이던 바람이 위로 솟구쳤고 이내 숲의 비늘이 반짝거렸다. 숲이 심하게 뒤척이기 시작했다.


7. 아기들의 무덤

까마귀 지혜의 샘도 물러갔고, 족제비 교활한 목도리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하늘눈은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요 며칠간 햇살은 마음 놓고 봄타령을 하였으나, 지혜의 샘이 물러간 다음 날부터 해는 구름 속에 갇혀버렸고 싸늘한 바람이 숲을 몰아쳤다.

하늘눈의 몸과 마음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거의 나들이도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불안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하늘눈은 심장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먹이만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어떨 때는 물 몇 모금으로 하루를 지탱하기도 하였고, 어떤 날은 딱정벌레 한 마리로 하루를 감당하였다. 오직 알을 품고 있을 때만이 편안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배설하지만 않는다면 하루 종일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번개부리도 하늘눈만큼이나 야위어갔다.

번개부리는 오리바위 언저리를 맴돌면서 파수를 보았고, 야윈 초승달이 군부대 철탑에 걸리면 혼자 진달래나무에서 잠을 잤다. 어둠이 흐르는 골짜기는 더 깊어졌다. 알 속에서는 작은 생명체의 눈과 부리가 생겨났고, 날갯죽지와 발가락도 돋아났다.

온종일 숲 속을 들쑤시던 햇살가루가 바닥이 나자 구름이 들이닥쳤고 이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번개부리는 비를 반겼다. 비가 내리면 동물들의 움직임도 줄어들고, 그만큼 집을 위협하는 눈도 줄어든다. 번개부리는 산벚나무 꼭대기에서 오랜만에 긴장을 풀었다.

“비가 내린다. 가물었던 대지가 반긴다. 나무들이 반긴다. 풀들이 반긴다. 새들이 반긴다.”

그 옆에서 나무 쪼는 소리가 들렸다. 번개부리는 돌아다보지 않고도 딱따구리가 내는 소리라고 단정했다가 “비 온다, 서둘러” 하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박새 속임수였다. 번개부리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비가 내린다. 속임수가 나무 쪼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세상에다 비를 내린다.”

속임수는 더욱 크게 나무를 쪼아댔다. 속임수는 딱따구리 못지않게 나무를 쪼아대는 힘이 있었고, 나무줄기에 붙어서 제법 먹이를 구했다. 주로 땅에서 먹이를 구하는 번개부리는 그런 속임수가 재주꾼으로 보였다.

심술쟁이 청설모가 속임수네 집이 있는 오리나무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걸 본 속임수는 잔뜩 긴장하였다. 집 안에 있는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구멍이 작아 심술쟁이가 들어올 수는 없어도, 그놈은 마음만 먹으면 속임수네 집을 박살낼 수가 있었다. 그놈의 이는 이까짓 나무구멍은 단 몇 초 만에 넓힐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속임수는 심술쟁이 쪽으로 날아간 다음 자신이 가장 최근에 연마한 ‘교활한 목도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최대한 족제비의 얼굴이 그려지도록 목을 크게 돌렸고, “캭! 캭!” 하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멍하게 보던 심술쟁이는 순간적으로 교활한 목도리를 떠올렸고, “아니 그놈이 언제 여기에 올라왔지!” 하고는 반대편 나무로 몸을 날렸다. 뭔가 이상했지만 교활한 목도리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해서 뒤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심술쟁이는 족제비 교활한 목도리와 고양이 악마의 발톱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하늘눈은 바깥으로 나와서 똥을 싸고, 물방울에 부풀어가는 꽃몽우리를 보았다. 산벚나무는 한껏 물을 빨아올려 물감을 버무려서 몽우리마다 한가득 채워놓고 축제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눈은 밑으로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국수나무 줄기마다 물방울이 가득 열려 있었다. 가늘고 길게 늘어진 줄기에는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순에 매달린 물방울이 더 영롱해 보인다. 물기 먹은 나뭇잎이 스스슥 소리를 내면서 빗방울을 맞이했다. 줄기를 씻어내리는 빗물은 나무 밑동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 하늘눈은 하얀 거품을 보다가 나뭇잎을 부리로 물어서 옆으로 던졌다. 그때마다 거미며 작은 딱정벌레들이 바삐 움직였으나 하늘의 부리도 빨라서, 달아나는 녀석들 중에서 몇 마리는 희생을 당했다.

비가 내리자 기온이 내려갔다. 알을 품은 하늘눈은 몸을 푹 가라앉혔다. 어느새 얼굴이며 발까지 제 모습을 갖춘 아기들은 달디단 양수로 목을 달래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서 자꾸만 발을 꼼지락거렸다. 어미의 작은 몸짓에도 아기들은 예민했다. 아기들은 알 속에서 어미의 모든 행동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추우면 춥다고 움직이면서 발로 알 껍질을 차댔다. 하늘눈은 알을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품었다. 하늘눈도 알 속에서 발길질하는 아기들의 소리를 들었다.

은빛 알갱이들이 비에 섞여서 내렸다. 우박이었다. 이미 몸이 썩어서 문드러진 나무들은 온몸으로 빗물을 빨아들였다. 새 부리가 쪼아대지 않아도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죽정이 가지들이 문덕문덕 떨어졌다. 그들은 이미 흙이나 다름없었다. 흙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비가 오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두르고 있었다. 파인 작은 구멍마다 하얀 우박이 박혀 있었다. 천둥과 번개까지 야단이었다. 새들도 날개를 접었다. 소쩍새들도 움직이지 않았고, 박쥐들도 굶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눈은 요란하게 벌통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비바람이 점점 사나워졌다. 한창 쫑알거리면서 새잎을 내밀던 나무들이 바람멀미를 일으키면서 어린잎을 토해냈고, 그 하나하나의 몸짓이 출렁거림으로 변해서 숲 전체가 몸살을 앓았다. 빗물은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스며들었다. 나무뿌리는 지렁이들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흘러든 물을 빨아들였다.

오리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절벽은 천년세월을 묵혀왔으며, 자꾸만 갈라지는 틈을 보완하려고 진달래와 소나무에게 자기 살을 내주어서 살게 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나무의 뿌리도 여린 빗물의 흐름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빗물은 자꾸자꾸 스며들었고, 어느 한순간에 거대한 바위는 힘을 놓아버렸다. 갈라지고 부서졌다.

수많은 뿌리가 감싸고 있는 바위의 뼈와 살이 흩어지고 있었다. 순응하고 있었다. 져주고 있었다. 큰 것들이 강한 것들이 자꾸만 작아지는 밤이었다. 부러지고, 갈라지고 그러면서 작아지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수백 수천 년간 은밀하게 진행되다가 오늘밤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떨어진 바위들은 낮은 곳으로 몸을 굴리다가 다른 바위에 부딪히면서 다시 수백 개로 갈라졌고, 앞으로도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쯤 살아야 할 나무들을 쓰러뜨렸다. 그 많은 바위 중에 하나가 오리바위 측면을 들이받았고 그 충격으로 벌통이 튕겨져나갔다. 벌통은 다래덩굴 아래로 굴러가다가 쓰러진 나무에 걸렸다. 벌통으로 시뻘건 물이 달려들었다.


하늘눈은 정신이 없었다. 잠을 자다가 뭔가 쾅 하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떴으나 이내 정신을 잃어버렸다. 어디론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위옷이랑 인간들이 버린 온갖 물건들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머리가 아팠다. 벌통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하늘눈은 바위옷을 털어내면서 자꾸만 몸을 떨었다.

“이건 꿈이야. 우리 알들…… 아, 이건 꿈이야, 절대 현실이 아냐.”

하늘눈이 외치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번개부리가 있는 곳까지 메아리치지도 못했다. 설령 번개부리가 알았다고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었다. 하늘눈은 집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하늘눈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자신을 달래면서 집으로 올라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자기 살을 쪼아보았고,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다가 날갯짓을 하다가 마구 벌통 벽을 쪼아대면서 번개부리를 불렀다. 밖으로 나가는 구멍도 막혀 있었다. 아무리 하늘눈이 부르짖어도 그 목소리는 벌통 안에서만 맴돌이칠 뿐 바깥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늘눈은 옆으로 쓰러졌다. 더 이상 소리치고 파닥거리는 날갯짓조차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게 끝났어, 끝나버렸어, 아아…….”

이대로 생을 끝내고 싶었다.

“어찌 이런 일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하늘눈의 목소리는 낮고 착 가라앉아 있었다. 울림이 깊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하늘눈은 머리까지 눕히고 흐느끼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서 벌통 벽을 타타다닥 쪼아대면서 “아니야, 아니야!” 하고 격렬하게 소리를 질러대고, 집에 앉아서 알을 품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빗소리는 잦아들었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왔다.
번개부리는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오리바위로 날아갔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번개부리는 동동걸음으로 오리바위를 뛰어다녔다. 집이 있는 벌통은 다래덩굴 밑에 처박혀 있었고, 나뭇잎이며 동강난 나뭇가지들이 짓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가 없어. 아아 믿을 수가 없어.”

번개부리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고개를 흔들어대다가 뒤늦게 하늘눈을 떠올렸다. 번개부리가 벌통 위로 앉아서 작은 나뭇가지를 부리로 물어내면서 하늘눈을 불렀다.

“괜찮지? 무사한 거지? 제발 대답해, 괜찮다고 대답해. 당신만 무사하면 돼.”

하늘눈은 대답하지 않았다. 번개부리는 애가 탔다. 부리로 벌통을 쪼아대면서 어서 대답하라고 소리쳤고, 꽁지로 벌통을 치면서 다시 하늘눈을 불렀다. 벌통 위에 얹힌 나뭇가지며 나뭇잎을 대충 치우고 구멍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구멍은 벌통 밑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번개부리는 이 벌통을 들어올릴 힘도 없었고, 이 벌통의 벽에다 구멍을 뚫어낼 재주도 없었다. 번개부리의 뇌리에는 이런 경우에 어찌해야 하는지 저장된 세포가 없었다. 딱따구리라면 구멍을 뚫을지도 모른다고 그 강력한 부리를 떠올렸을 뿐이다. 번개부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애절한 목소리로 하늘눈을 불렀다.

“제발 대답해.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늘눈은 번개부리의 목소리를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울부짖으면서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번개부리의 마음만 아프게 할 뿐 희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늘눈은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의 생이 이대로 마감되는 현실이 억울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살고 싶은 욕망도 강렬하지 않았다. 번개부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걸 자신이 떠안고 가고 싶었다. 집에 있어야 할 알들이 사라져버렸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모든 삶의 의욕을 놓아버렸다.

해가 떠올랐다. 다른 새들은 간밤에 일어난 무시무시한 참사를 무관심한 표정으로 넘겨버렸다. 오직 번개부리가 새벽부터 노을이 번질 때까지 벌통 위에서 애타게 하늘눈을 불러대고 있었다. 하늘눈은 끝내 한마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축 늘어져 있던 하늘눈의 귀에 “엄마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눈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막 알에서 나온 아기가 벌통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기는 안간힘을 다해서 빠져나오려고 하였다.

“오오, 아가아, 아가아!”

하늘눈은 아기를 부리로 물어서 잡아당겼다. 아기는 낮고 짧은 목소리로, 간신히 하늘눈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로 어미를 찾았다. 조금씩조금씩 아기가 끌려나왔다. 하늘눈은 아기를 집에다 눕히고 얼른 품었다.

하늘눈은 또 다른 아기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으나 깨진 알만 눈에 들어왔다. 하늘눈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기적이었다. 아기가 세상으로 무사히 나왔다. 기적이었다. 하늘눈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아기를 살려내겠다고 부리를 다물었다. 아기는 이내 안정을 되찾고 자꾸만 하늘눈의 살을 부리로 쪼면서 배고프다고 보챘다. 안타깝게도 하늘눈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냥 아기를 품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내려다보았더니 아기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너무도 짧은 삶이었다. 허탈했다. 알이 여기저기 구르면서 그 안에 있던 아기도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간신히 깨진 알 사이로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은 세상으로 나올 때가 아니었다. 하늘눈은 죽은 아기를 보자마자 벽에다 머리를 찧어대면서 남편을 불러댔다.

“어딨어. 제발 나를 죽여줘. 죽고 싶어. 더 이상 못 보겠어.”

아기들의 무덤으로 변해버린 이 벌통 속이 저주스러웠다. 하늘눈은 머리로 계속 벌통을 들이받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왼쪽 날갯죽지에 상처가 났고, 이마에서도 뭔가 흘러내렸다.
바깥에 있는 번개부리도 하늘눈의 소리를 듣고 울부짖었다. 그뿐이었다.
벌통 안에 갇힌 아내를 구해낼 방법이 없었다. 번개부리는 부리가 으스러지도록 벌통을 쪼아보기도 하였고, 바닥에 깔린 구멍을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헛수고였다. 뭔가 희망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절망의 무게가 번개부리의 몸을 짓눌렀다.

번개부리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약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어둠이 무르녹아서 다시금 새벽이 밝아올 즈음 번개부리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생강나무 위로 날아갔다. 이제 벌통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을 잃어버린 건 번개부리만이 아니었다. 운이 좋게도 도토리황제네 집은 그 비바람을 견디어냈으나 고물상네 집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물론 알도 잃어버렸다. 고물상은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 종일 슬프게 울부짖었으며, 저녁 무렵에는 괜히 도토리황제한테 시비를 걸어서 한판 요란하게 싸움을 하였다.

도토리황제는 화가 나서 다른 친구들까지 불러댔고, 고물상몶 질세라 자기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그래서 골짜기가 까치와 어치들 싸움판이 되었고, 온갖 동물들이 그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한동안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번개부리만이 그들의 요란한 싸움판을 구경하지 않았다. 번개부리는 그렇게 싸울 힘이라도 남아 있는 고물상이 부러웠다. 고물상은 집과 알을 잃었을 뿐이다. 그것도 슬픈 일이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절망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번개부리는 고물상이 더 부러웠다. 그 정도의 슬픔이라면, 옆에 아내만 살아 있다면 그 어떤 슬픔이라도 다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지금 그에게 아내가 없었다. 그 슬픔은 살고 싶다는 의지마저 꺾어버렸다. 무엇인가를 먹고 싶지도 않았고, 눈을 뜨고 싶지도 않았고, 바람이나 햇볕 따위를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그런 슬픔이 번개부리를 짓눌렀다.

하늘눈은 간신히 눈을 떴다. 심장의 움직임이 멈춰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눈이 떠졌다. 살아 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요구하는지도 알았다. 피가 온몸을 돌고 있을 때는 마음대로 심장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죽음으로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하늘눈은 나뭇가지와 바위옷들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는 곳에 누워 있다가 고개를 들었고, 어디선가 빛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워낙 희미해서 거의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빛이었다. 하늘눈은 여기저기 부리를 내밀고 입에 물리는 바위옷을 몇 차례 잡아당겼다. 한결 빛이 밝아졌다. 나뭇가지도 물어냈다. 빛이 쏟아졌다. 구멍이 보였다. 빛을 보자 살고 싶다는 본능이 강하게 요동쳤다. 힘이 생겨났다. 바깥으로 나가는 구멍이 있는 쪽이 바닥에 닿아 있었으나 작은 몽근 돌에 걸려서 약간 떠 있었다. 하늘눈은 그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간신히 몸을 웅크리면서 기어갈 수 있을 정도의 여백이 있었다. 하늘눈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눈이 부셨다. 날갯짓을 하였다. 날아올랐다. 자신의 몸이 날아올랐다. 맨 처음 하늘을 날았을 때보다 더 신기했다. 더 떨렸다. 하늘눈은 목표 없이 날았다. 날개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초록 물결이 출렁거리는 산등을 두 개나 넘었다. 이렇게 날아야만 슬픔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뒤에서 번개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눈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칠 때까지 날갯짓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살았음을 확인하였고, 앙가슴 속에 응어리진 슬픔의 앙금을 토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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