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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미로에서 길찾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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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쯤인가. 시간이 몇 시인지 상관없이 분명히 비가 내리고, 젖은 거리를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노면과 바퀴가 빚어내는 마찰음이 귓가에 크게 반사된다.

비가 온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새벽 4시쯤인가. 시간이 몇 시인지 상관없이 분명히 비가 내리고, 젖은 거리를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노면과 바퀴가 빚어내는 마찰음이 귓가에 크게 반사된다. 그러나 엄연히 실존하는 사물들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데 별뜻 없이 지워진다.

목이 마르다.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 이유를 정확히 제출하기 어렵다. 거의 동시에 현실과 상상이 겹쳐진다. 어느 쪽이 실존의 분명한 국면인지 구별할 수 없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사물들과 종잡을 수 없이 풀어지는 뜻 모를 생각들, 내가 빠져들어가는 곳은 어디일까. 비가 오는 거리일까 그 너머의 어느 곳일까. ‘질문’이 발생한다.

혼돈 속에서 무언가 시작되려는 조짐, 생각이 어떤 곳을 향하려는 움직임─지향성─이 형성된다. 이런 순간을 시집 『순금의 기억』을 쓴 김정환은 단순한 ‘풍경’이 지향성을 갖는 ‘광경’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목마름은 ‘충만함’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을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다. 자기 전개 욕구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결핍감은 커진다. 결핍은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현실에 질문한다.

질문은 어떤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망 자체임을 스스로에게 말한다. 질문은 상상력의 다른 이름이다.


해답이 없는 질문은 그래서 무지(알 수 없음)로 이끈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이념)들을 지운다. 옳고 그른 것, 아름답고 더러운 것들이 지닌 현실의 습성과 차이를 넘어선다. 합리적이라고 믿어왔던 ‘앎’으로부터 새로운 ‘출구’를 만들어낸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노인들」 전문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액자 속의 풍경이 아니라 “목을 분지르며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즉시성의 광경이다.

내면화된 나뭇가지는 노인들로 전환(비유)되면서 극적인 모멘트를 이룬다. 봄빛에 “기다렸다는 듯” ‘떨어져나가는 나뭇가지들’과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서로 반대편에 배치되어 극명한 대칭을 이룬다.

두 현상은 ‘고통스러움’과 ‘추악함’을 드러내는 심리적인 반응을 불러온다.

봄빛이 좋은 날 우연히 발견한 풍경에서 기형도의 지향성이 다다른 곳은 낡은 것들의 ‘뻔뻔스러움’이다.
“날렵한 가지” “추악하다” 등은 사소한 감각이자 주관적인 감정이다. 물론 이 광경 전체는 노인들에 비유된 심상들일 뿐이다. 굳이 심상에서 윤리적인 가치나 선악을 추출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기형도가 발견한(상상한) 감각이 움직이는 대로 함께 느끼거나 거스르면 된다. 단지 내용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시정신의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더 많은 것을 만날 수 있다.

나뭇가지와 노인들로 개괄화되는 무자비한 단순성은 사심 없는 관심은 아니다.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는 고백(스스로를 절대화할 때만 가능한 종교적 형식이다)은 가학적이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김수영, 「성(性)」 중에서


자칫 외설스럽고 요즘의 성 모럴로 보면 변태적이라고 면박을 당하기 쉬운 소재인데도 김수영은 자아 내부의 파탄을 제어한 경험을 섹스 행위를 통해 고백한다. 위험한 것은 오브제나 어휘, 또는 포즈나 어조의 강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60년대 김수영이 등장한 이후 고백적 자아의 자기 진술은 ‘진정성’을 입증하는 진지한 시적 태도로 받아들여져왔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은폐하는 윤리적 방어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를 강하게 의식했던 김수영은 자신의 말대로 “풍자냐 해탈이냐”를 시적 태도의 화두로 삼았지만 풍자에도 해탈에도 이르지는 못했다.

풍자와 해탈은 그 어느 쪽도 개인과 집단 전체의 윤리적 프레임(그것은 분단이나 독재 같은 정치사회 전반의 문제의식을 끌어안는 개인적 자아의 존재론적 지평이자 전형적인 근대의식이다)을 넘어서는 진정한 모험은 아니다. 김수영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기형도의 「노인들」이나 국민 애송시가 된 윤동주의 「서시」와 같은 시들은 고백의 탁월한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세계의 불가피성 또는 무출구성을 지워버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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