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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사람들이 가장 쉽게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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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는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나는 엎드려 만화책을 읽고 있고, 건우 오빠는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다. 물을 반쯤 담은 종이컵, 얇은 붓 하나, 종이 위로 알록달록하게 번져가는 수채색연필 자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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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는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나는 엎드려 만화책을 읽고 있고, 건우 오빠는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다. 물을 반쯤 담은 종이컵, 얇은 붓 하나, 종이 위로 알록달록하게 번져가는 수채색연필 자국들.

─ 풀잎이 너도 그려볼래?

건우 오빠가 내게 묻고, 그제야 나는 내가 거실 유리문에 기대어 오빠의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건우 오빠는 선뜻 자기 스케치북에서 종이를 한 장 뜯어 내민다. 낡은 색연필이 빽빽하게 꽂힌 둥근 연필꽂이도 함께. 나는 갑자기 주어진 이 놀라운 자유?기회 앞에서 깜짝 놀라고 만다.

내가 그 종이를 받아들고 그림을 그렸던가. 어둑한 방에 누워 이 꿈같은 기억을 끝의 끝까지 더듬어갔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그림소풍의 마지막 그림만 떠올랐다. 수채색연필을 쓰겠다고 꺼내놓았었지. 그러곤 하지 못했다. 견지 형이, 내가 건우 오빠의 사촌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틀이나 작업실에 가지 못했다.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견지 형을 대해야 할지 몰랐다. 왜 미리 말 안 했는지 말해야 할까. 견지 형은 화가 났을까.
학교에 와서도 영 집중이 되질 않아 낙서만 끼적이는데, 점심때쯤에 계림 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 왜 안 왔느냐고 묻는 문자인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내일, 토요일은 작업실 페인트칠 하는 날! 헌 옷 준비해 오세요.

페인트칠? 핸드폰 액정이 까매질 때까지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견지 형의 마음이 읽히기라도 할 것처럼.


토요일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앞서 걸어가는 내 그림자가 진한 파랑 빛으로 보였다. 그림자는 몇 번이나 발을 멈추었다. 작업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그림자는 몇 번이나 비틀거렸다.
큰방도 페인트칠을 하는지, 일반부 사람들도 많이 왔다. 헌 옷에 면장갑에 머릿수건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아줌마 아저씨 들로 좁은 복도가 붐볐다.

“학생, 위에 입을 건 가져왔어? 옷에 페인트 묻으면 못 지워!”

혀를 차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하고 쭈뼛거리며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엔 이미 신문지가 덮였고, 선생님들과 아이들 몇 명이 창문과 탁자를 신문지로 덮고 있었다. 가운데 서 있던 견지 형이 나를 돌아봤다.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여기.”

“네?”

견지 형은 새 페인트 붓과 장갑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그게 다였다.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이환이 들어오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아, 형, 갑자기 무슨 페인트칠이에요.”

“나 저거 다 어쩌라고. 네?”

빈 벽에 사진과 그림을 붙여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둔 강강이도 칭얼거렸다. 견지 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더러워졌잖아. 너희들 보기도 안 그래? 새로 칠하면 기분도 좋고, 그림도 잘 그려진다.”

정샘이 페인트 통을 열자 확, 페인트 냄새가 번졌다. 견지 형은 손뼉을 짝 치고 외쳤다.

“자, 그럼 시작!”

하얗게, 덮여간다. 작업실 곳곳에 하얀 불이 붙어 점점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우, 내 걸작을 지우게 하다니. 견지 형, 성격 나빠. 이런 거 그대로 두면 나중에 엄청 뜰지도 모르는데.”

벽에 꽤 공들여 그려놓은 나무 그림 위로 페인트를 칠하며 이환이 투덜댔다.

“한 오십 년 뒤에?”

묘은 언니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이환은 말을 이었다.

“잘라서 팔 수도 있는데.”

아쉬워하면서도 한번 칠하기 시작하자 흥이 돋는지 이환도 에잇, 다 없어져버려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팔을 움직였다.

“근데 견지 형이 페인트칠을 하겠다고 나서다니, 웬일이야?”

이환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했다. 견지 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다.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김초우, 페인트 흐른다. 바로 칠해야지.”

묘은 언니가 말했다. 그 말에 정신차리고 붓을 고쳐 잡았다.

“묘은이 네가 온 뒤로 페인트칠 처음 하는 거지?”

이환이 묘은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여기 다닌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내가 묻자 묘은 언니는 잠깐 눈을 찡그렸다.

“나? 한 이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런데 그림은 정말 안 늘었어.”

이환이 툭 끼어들었다. 묘은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뭐, 나는 미대 갈 것도 아니고.”

깜짝이야. 당연히 모두 입시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여기에 왜 다니는 거냐고 물었더니, 취미라고 했다.

“언니 공부 되게 잘하나봐요. 이럴 여유도 있고.”

“여유가 아니라 허세지. 여기가 없었음 머리가 터져버렸을 거야.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남들에게 계속 말할 수 없었다면.”

고3 치고는 굉장히 배부른 소리를 하는 묘은 언니는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벌써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환은 자기가 읽어봤는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말하고는 묘은 언니에게서 한 대 맞았다.

“너 책 내면 내가 거기에 그림 그려줄게.”

이환은 맞고서도 금방 방글거리며 말했다.

“이해도 못하는 글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냐?”

“그러니까 그림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으로…….”

됐다, 고개를 저으면서도 묘은 언니는 언제나처럼 픽 웃었다.
강강이랑 태현이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열심이었고 주영이도 완전 몰입해서 말없이 페인트를 칠했다. 그에 비하면 고참이랄까, 고3 무리들은 대충대충 하는 게 뻔히 보였다. 목상은 아예 책을 펴들고 읽으면서 느리게 붓을 움직였고 이환의 나무를 한 번 덮어 칠한 묘은 언니와 이환은 바닥에 깔아놓은 옛날 신문기사를 읽으며 수다를 떨었다. 아운이와 나는 가까이에서, 서로 종이테이프를 붙여주고 옷소매를 걷어주기도 하면서 일했다. 경하는 사다리에 올라 높은 곳을 칠했다. 가끔 눈을 들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움직이는 경하의 팔과 등이 보였다.

한 겹 한 겹 페인트를 칠하면서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일할 때는 자장면을 먹는 거라면서, 견지 형이 시켜준 자장면도 먹었다. 페인트 냄새 풍기는 방 안에서, 신문지 깔고 앉아 자장면을 먹고 있으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봄의 초록까지 같이 불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페인트칠은 날이 어둑해진 후에야 끝났다. 밖이 어두워지자 안이 더 밝아 보였다.

“와, 좋다!”

아까 투덜거렸던 것은 잊었는지 강강이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나 역시 그랬다. 하얗게 칠해진 작업실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직접 칠했기 때문일까, 마치 꼭, 내 작업실 같았다.
다들 짐을 챙기고 나서는데,

“초우 잠깐 나 좀 보자.”

견지 형이 총무실로 나를 불렀다.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엇을 묻든 솔직하게 답하겠다고 각오하고서 총무실로 들어갔는데, 견지 형은 딴말을 했다.

“내일부터는 윤샘하고도 해봐. 기본을 잡아야 하니까.”

내가 들으리라고 예상한 말은 아니었다. 왜 견지 형은 내게 건우 오빠에 대해서 묻지 않는 것일까?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 여기서 계속해도 돼요?”

이런 질문이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굳이 묻지도 말고 아무 일도 아닌 척 굴면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될까. 그게 나을까.
견지 형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면, 야단치면 고개를 숙이려 했다. 잘못했다고 빌고, 그래도 다니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견지 형은 물었다.

“그림을 왜 배우고 싶었니?”

생각 못 한 질문이었다.

“저는, 전, 그리고 싶었어요.”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돼요?”

여기 있어도 되나요? 그리고 싶은 만큼 다 그려도 되나요? 건우 오빠의 동생인 초우가 아니라, 그냥 김초우로 있어도 되나요?
견지 형은 아주 긴 것 같은 잠깐 동안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샘은 여러 의미에서 견지 형의 정반대인 듯한 선생이었다. 느낌도, 태도도, 가르치는 것도 다 정반대였다. 쌀쌀맞고, 정확하다.

“저게 이 비율로 보이니? 김초우, 먼저 봐야 해. 보지도 않고 그리는데 맞게 그릴 수 있어?”

“보고 있는데요.”

마지못해 대답하는데, 내가 보는 게 보는 게 아니야, 옆에 앉은 이환이 노래가사를 바꿔서 흥얼거렸다. 상황파악 못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윤샘 손가락을 보며 꾹 참았다. 윤샘은 손가락도 차갑고 정확하게 생겼다.

“뭘 보고 있는데. 말로 설명해봐.”

“바구니, 롤휴지, 해바라기…….”

“바구니 폭과 높이의 비율은? 꽃의 높이와의 차이는? 바구니 면적과 휴지의 크기 차이는?”

수학문제를 푸는 기분으로 대답하자 윤샘이 말했다.

“자, 그럼 네 그림을 봐. 아까 너 뭐랬어. 일 점 오 배라 그랬지. 근데 네가 그린 건 몇 배야?”

“……두 배요.”

“제대로 봤음 이렇게 그리지 않았겠지.”

봤는데…… 입술로만 웅얼거렸는데, 역시나 제대로 보는 윤샘은 바로 읽어냈다.

“그림을 그리려면 지금까지 봐왔던 식으로 보는 걸로는 부족해. 다시 봐. 정확하게 봐.”

윤샘은 내가 두 시간 동안 열심히 그려놓은 연필 정물화 위에 꼭 자기처럼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선으로 제대로 된 구도와 비율의 사물을 덧그렸다.

“다시 그려. 똑같은 구도로.”

윤샘이 손댄 그림을 들고, 이걸 밑에 대고 베껴볼까 고민했다. 종이가 얇았다면 그렇게 편법을 썼을지도 모른다. 새 종이를 이젤에 올려놓았지만 지금껏 했던 식으로 아무렇게나 일단 시작할 수도 없으니 막막했다. 끙끙대며 그리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는데, 주영이와 부딪칠 뻔했다.

“아, 미안.”

내가 돌아올 때까지도 주영이는 내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틀렸는데요.”

주영이가 손을 뻗어 한 부분을 가리켰다.

“어디?”

“여기, 비뚤어졌어요.”

어디가 어떻게 비뚤어졌다는 건지 봐도 모르겠다. 주영이는 플라스틱 자를 가지고 와서 종이 왼쪽 끝에서 내가 그려놓은 물병까지의 간격을 재었다.

“여기요. 위에는 십칠 센티인데 아래는 십구 센티잖아요.”

그렇게 알고보니 비뚤어진 것이 보였다. 선이 수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내려왔다. 나 눈이 삐뚤어졌나봐. 이걸 어떻게 또 고치지. 한숨이 나왔다.

“아, 진짜.”

“참견해서 미안해요.”

야단맞을까봐 겁내는 아이 같은 목소리여서 내가 도리어 미안해졌다.

“가르쳐줬는데 뭐가 미안해.”

주영이는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주영이가 눈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뭐랄까, 주영이는 그림 그리는 애 같지 않았다. 열심히 영어지문을 읽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아이.

“언니!”

막 작업실에 들어온 강강이가 내게 달려들자 주영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강이가 의도적으로 주영이를 밀어내거나 멀리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주영이가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주영이는 조용히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마음에 걸렸다.
주영이는 어떻게 그리나 궁금해져서 스트레칭하는 척하고 주영이 그림 쪽에 가봤더니, 이건 딱 윤샘의 수제자 작품이었다.

“잘 그렸다…….”

하아, 한숨이 섞인다. 주영이가 돌아보았다.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뭐가 잘 그려요.”

“너도 자학하냐. 그거 정신건강에 진짜 안 좋아.”

일부러 실없이 말했다. 주영이는 웃을까 말까 하는 얼굴. 그러고 보니 주영이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괜히 큰소리를 내며 주먹 불끈 쥐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돌아온 윤샘은 아까보다는 나아졌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다시 지적 들어갔다. 비뚤어진 거, 비율 틀린 거, 위치 잘못 잡은 거, 명암이 틀린 거…….
마무리는 저기 걸려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네가 그린 거랑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봐라, 로 끝났다. 윤샘은 완전히 나를 입시생 취급을 한다. 전 미대 안 갈 수도 있는데요, 말하려다가 변명처럼 들릴까봐 입 다물고서, 가서 그림을 봤다. 모르는 사람이 그린 것도 있고 강강이와 아운이와 경하, 주영이 것도 있었다. 휴. 언제, 어떻게 저기까지 가지.

“나한테는 안 보여요. 못 보나봐요.”

총무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필요 이상으로 투덜대었다. 나는 견지 형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경험해보았다면, 이런 일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양 지나갈지도 몰라. 하지만 내겐 모든 게 처음이어서,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그래서 괜히 어리광을 부렸다.

“못하겠어요, 지겹기만 하고.”

“지겹고 힘들고 어려울 때 그만두는 거, 누가 못하냐. 나쁠 때 그만두는 게 어딨어. 그 뒤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버티고 넘어가면 다른 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만두려면 좋을 때 그만둬야 하는 거야.”

견지 형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견지 형의 말을 곰곰 되새겨봐야 했다. 그러느라 잠시 내 고민은 잊었다.

“좋으면 계속하는 거지, 어떻게 좋은데 그만둬요?”

“좋은데, 그 좋은 것이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어질 때. 그 순간만 반짝하고 그 순간이 지나면 막막해질 때. 밋밋하고 감흥 없어질 때 그만두는 거지.”

견지 형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환 너! 커피 가져가지 말랬지!”

“아유, 참. 형도.”

이환은 살살 웃으며 컵을 손으로 감쌌다. 선생님들 마시라고 늘 뽑아두는 원두커피였다.

“돈 내고 마셔!”

“너무한다. 수강생 복지는 생각 안 해줘요?”

총무실 문가에 기대선 묘은 언니가 거들었다.

“내 복지 챙기기도 바빠.”

“자판기를 놔주든지요.”

“사람이 몇 명 있다고 자판기를 두냐?”

“여기 서비스가 영 아닌데.”

“맘에 안 들면 서비스 좋은 데로 찾아가시든지요.”

견지 형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어쨌거나 커피를 빼낸 이환과 묘은 언니는 의기양양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견지 형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너 아직도 여기에 있냐, 하는 표정이었다.

“남들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리라는 건 아니야.”

“그래봤자 정물은 순 외우는 거잖아요.”

아는 척했더니 그런 소리 할 정도로 그릴 수는 있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초우 네게는 분명 특별한 점이 있어.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온 사람의 특징이기도 하지. 왜곡되고 집요한 거. 그게 매력이긴 해.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도 있어. ……모르겠다. 그 높은 곳을 깎아서 낮은 곳을 메우는 일, 평균적으로 만드는 일은 나도 하고 싶지 않은데.”

견지 형은 뭔가 설명하고 싶을 때의 표정이 되었다.

“생각해봐. 모든 사람은 하나의 기계…… 계산기 같은 거야. 예를 들어 일이라는 숫자를 입력했다고 쳐. 그럼 사람마다 내놓는 결론이 다 달라. 누구는 칠, 누구는 십오, 아님 엉뚱하게 바다, 커피, 이런 답이 나오는 거라고. 그렇게 다른 계산이 나오게 하는 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시스템인 거고. 그러면 결국 똑같은 걸 보고 그려도 다 다른 답이 나와야 하잖아. 근데 막상 보면 비슷하게 하는 애들이 훨씬 많아. 왜 그럴까? 자기 자신을 이용하지 않아서야.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자기 안에 넣고, 정직하게 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머리로 외운 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그냥 그럴듯하게 그린단말이야.”

견지 형의 말에 압도됐다.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이 또렷한 이미지로 떠올랐다.

“자기만의 답을 찾으려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해. 사실은 다들 두려워서 못 그러는 거거든. 내게 정말 보이는 대로 그렸다가는 엉망이 될까봐, 그럴듯한 게 안 나올까봐, 자기 자신을 못 믿어서 그래. 솔직히, 믿어선 안 될 때도 있을지 모르지.”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그리기.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

“그러니까 초우야, 먼저 잘 봐야 해. 밖에 있는 것들도 제대로 봐야 하지만 네 자신을, 네 안에 있는 것들을 잘 봐야 해. 네가 어떤 인간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매어 있고 무엇 때문에 힘을 얻는지. 네가 정말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해. 보기 싫다고 귀찮다고 넘어가지 말고.”

말끝에 견지 형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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