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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연재] 박영란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③

학교에 가지 않는 것과, 엄마와 연락이 끊긴 것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견디기 힘드냐면 학교에 가지 않는 쪽이 당장은 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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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학교에 갈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말은 학교에 못 가는 고통뿐만 아니라, 다른 괴로운 일들까지 다 생각나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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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①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②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④


학교에 가지 않는 것과, 엄마와 연락이 끊긴 것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견디기 힘드냐면 학교에 가지 않는 쪽이 당장은 더 힘들다. 엄마가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학교에 갈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말은 학교에 못 가는 고통뿐만 아니라, 다른 괴로운 일들까지 다 생각나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중 하루, 일요일만큼은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일요일에는 산타로사 빌리지 밖으로 나갈 수도 있어서 나는 일주일 내내 이날을 기다린다.

오늘 나는 사라인선 언니를 따라 라구나 언덕 위에 있는 AUP 대학 캠퍼스 내에 있는 교회에 갈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만나려고 교회에 가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예수님 어깨에 내 인생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AUP 언덕 그 자체를 순수하게 좋아한다. 무슨 거대한 숲도 아니고, 엄마가 좋아하는 라일락 꽃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AUP 언덕이 AUP 언덕이라는 사실만으로 좋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 데 거창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은 촌스러운 짓이다. 그냥 좋으면 좋은 거다!

내가 AUP 언덕을 좋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언덕에 서 있는 망고나무들과 망고나무 높은 가지에 걸린 녹슨 의자와 또 망고나무 아래 깔린 개똥까지도 다 나를 좋아하는 것만 같다. 개똥도 알고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 개똥이 없는 잔디밭이나 초원이 얼마나 시시할지 상상해보면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망고나무 가지에 걸린 의자에 올라가 앉아볼 작정이다. AUP 언덕의 망고나무는 진짜 근사한 나무다. 나무가 아니라 무슨 거대한 영혼 같다. 나무 아래 개똥이 깔렸든 말든 허리에 붉은 페인트 글씨가 칠해졌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싸, 싸, 싸, 몰려나가는 소리를 내는데 얼마나 근사한지 모른다. 엄마한테도 한번 들려주고 싶다. 엄마도 한번 보면 그까짓 털북숭이 아저씨한테 잘 보이려고 나를 여기까지 유학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므로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겸손하게 보이는 옷으로 골라 입어야 한다. 고민 끝에 파란색 반바지와 흰 티셔츠로 정한다. 사라인선 언니도 잘 골랐다고 한다. 블랑카가 화장실에 가고 없는 틈에 사라인선 언니가 내 손에 오십 페소짜리 한 장을 쥐여준다. 헌금바구니에 넣으라는 돈이다. 사라인선 언니에게 헌금할 돈까지 신세지는 일은 미안하지만, 헌금바구니에 빈주먹만 넣었다 뺄 때 느끼는 수치스러운 기분에 비하면 견딜 만한 일이라서 받는다. 사라인선 언니가 주는 돈을 받으면서 내가 고맙다고 하자 언니가 그런 징그러운 말은 집어치우라고 한다. 생활비의 소중함을 모르는 철없는 블랑카는 사라인선 언니가 왜 내 말을 징그럽다고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게 편하다. 나도 블랑카의 이런 점이 편하긴 하다.

제임스는 교회에 다니는 일을 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교회 가는 아이들에게 승합차를 제공해준다. 아마도 제임스는 아이들이 단체로 교회에 다녀오면 좀 더 통제하기 쉬운 아이들로 변해서 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여기서는 아이들에게 제임스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서 그가 권유하는 일을 아이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사실 일요일 하루 정도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보내주어야 제임스도 좀 쉴 수 있다. 사람이 쉬지 못하고 계속 일에 시달리다보면 신경질적이 되게 마련인데, 제임스의 신경질이 바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지 못해서 생기는 영혼의 병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제임스도 우리 엄마만큼이나 고달프게 생활비를 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까지 미워할 마음은 없다.

승합차를 타고 총알이 장전된 총을 허리춤에 매단 가드가 지키는 산타로사 빌리지의 정문을 통과할 때면 왠지 모르게 흥분된다. 이런 기분이라면 혼자서 마닐라 공항까지 달려가 비행기를 타고 영종도 공항에 가는 일쯤은 문제없을 것 같다. 갑자기 세상이 좁아지고 모든 지리가 내 손바닥에 올려진 느낌이 든다.

산타로사 빌리지에서 AUP 언덕까지 오르는 길은 정말 감질난다. AUP가 언덕이라고는 하지만 등고선 간격이 엄청나게 벌어진, 크게 완만한 경사라서 이 길이 언덕을 오르는 길인지 그저 조금 경사진 길인지 잘 구분하지 못할 정도다. AUP가 언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때는 이십 분에 걸쳐 마침내 도달한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이다. AUP보다 높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AUP 아래 느리게 펼쳐져 있다. 저 멀리 지평선 끝에 마닐라 공항이 있고, 거기서 비행기를 타면 서울에 갈 수 있고, 거기에 가면 엄마가 있다.

따갈로그와 영어가 뒤섞인 예배의식이 거의 끝나고 마침내 헌금바구니가 내 옆 사람 무릎 앞에까지 왔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오십 페소에 대한 계산이 굴러다니기 시작한다. 나는 허쉬초콜릿이 먹고 싶다. 그것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이 돈이면 그것을 살 수 있다. 예배 끝나고 AUP 구내매점에 가서 꼭 초콜릿이 아니어도 달콤한 무엇인가를 사고 싶다. 드디어 검은 융단으로 감싸인 헌금바구니가 내 앞에 도착했다. 내 마음속에서 망설임의 북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 주먹을 펼치면…… 내가 주먹을 펼치지 않는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북이 세차게 울린다. 나는 주먹을 펼친다. 페소가 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대신 자유가 내 북을 가라앉힌다. 아멘! 바구니를 블랑카에게 전해준다. 바구니는 다시 사라인선 언니 쪽으로 전해진다. 나는 기도한다. 예수님! 페소를 드렸으니 엄마한테서 연락이 오게 해주세요. 그래야 서로 계산이 맞는 겁니다. 아멘!
누구든 맨입으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부탁할 일이 없는데도 헌금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아주길 바란다.

교회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빌리지로 돌아갈 아이들은 모두 제임스의 승합차에 다시 모인다. 하지만 나는 사라인선 언니의 보호 아래 오늘 하루 사라인선 언니와 함께 보내기로 되어 있다. 블랑카는 나와 함께하고 싶지만 오후에 첼로 개인교습이 있어서 빌리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블랑카가 우리와 함께 다니지 않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다행이다. 정신연령이 어린 친구와 동행하는 일은 피곤하니까. 게다가 사라인선 언니를 나 혼자 독차지하는 즐거움도 있다.


사라인선 언니도 데니슨 아줌마의 딸들처럼 치과의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서 대학을 다니는 언니나 오빠들은 치과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많다. 나로서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사라인선 언니 말에 의하면 필리핀은 물 사정이 나쁜데, 그 물 사정이 사람들의 치아에 영향을 주고, 다시 그 치아 사정이 의학분야 중에서 치의학 분야에 영향을 주어서 결과적으로 치과대학이 발전했다고 한다.
아무튼 사라인선 언니 말에 의하면 치아는 인간의 신체 중에서 아주 중요한 기관이라서 이곳이 잘못되면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사라인선 언니가 이다음에 서울에 가서 치과를 차리면 나는 감기에 걸려도 그 치과에 갈 것이다. 나는 사라인선 언니의 큰 키도 좋고, 널찍하고 튼튼해 보이는 등도 좋다. 훌륭한 치과의사가 되려면 저 정도 체격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라인선 언니가 존경스러운 점은 여기 필리핀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오늘 사라인선 언니와 나의 첫 방문지는 AUP 캠퍼스 내에 사는 나의 옛 가정교사 라니네 집이다. 사 개월 전까지 라니는 나의 영어 가정교사였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사라인선 언니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AUP 대학 졸업생이기도 하다. 나는 AUP 언덕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좋아 보이기 때문에 라니의 방을 방문하는 일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라니는 아들까지 있는 삼십대 아줌마이고 사라인선 언니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친한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니는 AUP 내에 있는 사택의 방 한 칸에 산다. 정확히 말하면 방 한 칸이 아니고 소파 한 개에 산다. 라니가 사는 집에는 방 두 칸에 거실 한 칸, 주방 한 칸이 있다. 방 두 개는 AUP 대학 학생이 세들어 살고 라니는 거실에 세들어 사는 것이다. 거실에 있는 긴 소파가 라니의 침대이자 방인 셈이다. 라니는 이 소파 하나에서 네 살 난 아들 케빈과 입양 딸?지 데리고 산다. 라니의 입양 딸 줄리는 AUP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아버지가 없고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줄리를 보살필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라니가 학교도 보내고 데리고 산다고 했다. 여기서 너무 가난한 사정이라는 말은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주워서 다시 튀겨먹는 사정이라는 말이다.

입양 딸 줄리와 아들 때문에 라니는 월급이 적뫀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버리고 한국인 유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나도 생활비 때문에 고통받는 입장이라서,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불안정하다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라니네 집에서는 물 한 모금도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라니는 사라인선 언니의 방문을 이미 알고서 기다렸다는 듯이 반긴다. 말할 기회를 놓쳐서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사라인선 언니와 나는 교회 볼일이 끝나고 AUP 구내매점에 들렀었다. 거기서 언니는 오 킬로그램짜리 봉지쌀과, 식빵, 깐톤, 망고, 양배추, 그리고 버터크림 케이크와 몇 가지 불량해 보이는 과자들을 샀다. 바로 그 봉투를 사라인선 언니가 내밀자 라니가 얼른 받아들고 우리를 거실이 아닌 주방으로 몰고 들어온 것이다. 낮에는 간혹 다른 세입자의 방문객이 있기 때문에 거실에 있으면 안 되고 부엌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있어야 할 주방에는 벽 쪽으로 바싹 밀어붙인 둥근 식탁과 한쪽으로 몰려 있는 의자 네 개가 있다. 우리 셋이서 들어서자 꽉 차는 주방이다. 셋이서 퍼즐 돌리기처럼 서로 비켜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좁다. 이 좁은 주방마저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쓰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은 라니가 미리 양해를 구해서 얻어놓은 거라고 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라니가 주방 뒷문을 열고 밖에 의자 두 개를 내놓는다. 나는 그리 나가서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뭐 좋다!

나무도 우거지고 개 밥그릇을 넘보는 꼬리 긴 까만 닭도 있고, 닭을 경계하는 개도 있으니까 따분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여튼 나는 나무를 좋아하는데, 그곳이 어디건 큰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어지간한 걱정거리는 잊을 수 있다.

“저애는 어떻게 되는 거래?”

라니가 사라인선 언니만 들으라고 묻는 말이지만 나도 다 듣고 있다. 사라인선 언니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아마 잘될 거라고 말해서 내 마음이 아주 구겨져버리지는 않았다.
내가 버려졌든 구원을 받았든 그것은 어쨌든 나의 문제이고 라니는 사라인선 언니가 사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느라 바쁘다. 이 집은 주방뿐 아니라 냉장고 속까지도 세들어 사는 사람들 구역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라니가 자기 칸을 꽉 채우고 남은 양배추를 들고 서서 남의 칸에 넣어야 할지 밖에 빼놓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라니의 고민이 어쨌든 텅 비어 있던 라니 칸이 꽉 차는 것을 보니 내 생활비가 들어온 것처럼 든든하기만 하다.

덩치 큰 양배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라니가 쌀을 씻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라니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게 분명한 틸라피아를 꺼내 세 마리는 튀기고 세 마리는 찌개를 끓이겠다고 한다. 나는 틸리피아 튀김을 먹어본 적이 있어서 그 맛을 안다. 필리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아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맛있는 틸라피아를 먹을 수 있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입맛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물고기가 틸라피아다.
식사준비를 하는 와중에 라니는 자기의 귀여운 아들 케빈이 갈아입을 옷도 변변히 없다느니, 자기의 입양 딸 줄리의 학비가 밀렸다느니, 불편한 잠자리가 계속되어 몸이 여기저기 쑤신다느니 등등의 하소연을 한다. 사라인선 언니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러는 동안 밥은 끓다가 조용해지고 틸라피아가 튀겨지고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연두색 찌개가 끓는다. 식탁이 차려졌다.

라니가 눈은 자기 고조부를 닮아 에스파냐식으로 움푹 파이고 피부는 원주민식으로 갈색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못생기기는 했지만 요리는 잘한다. 식사가 한창인데 라니의 입양 딸 줄리가 라니의 아들 케빈을 안고 들어온다. 라니의 아들은 라니를 보자마자,

“썸띵!”

하고 손을 내민다. 그러자 사라인선 언니의 지갑이 열린다. 사라인선 언니는 오백 페소짜리 지폐 한 장을 라니의 어린 아들 손에 쥐여준다. 그러자 라니가 지폐를 얼른 빼앗고 동전 하나를 대신 준다. 나는 라니 가족의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 사라인선 언니가 나쁘게 생각할까봐 걱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라인선 언니는 자기 주변에 있는 필리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런 행동들을 비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은 적이 있다. 사람은 생활비에 쪼들리면 누구나 비굴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는 법이고, 더구나 라니처럼 두 아이를 책임진 엄마가 된 여자라면 비굴해지지 않으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생활비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라니네 집 방문을 마치고 나서 사라인선 언니와 나는 AUP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망고나무숲으로 올라갔다. AUP 언덕 위의 망고나무 중에서도 가장 크고, 높고, 옆구리에 상처가 가장 깊게 파인 망고나무 가지에 걸린 철제의자가 없어졌다. 그 녹슨 의자에 한번 올라가 앉아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하지만 망고나무 가지 사이에 걸려 있던 철제의자가 사라지고 나니까 어쩐지 망고나무가 더 자유로워 보인다. 바람결 따라 더 대담하게 잎사귀들을 날려보내는 것만 같다.

싸. 싸. 싸아.

망고나무 가지 위의 철제의자 대신 나무 아래 곰팡이 핀 나무판자 의자가 생겼다. 양쪽에 벽돌을 몇 장씩 쌓아올리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척 걸쳐놓은 긴 의자다. 여기 AUP 언덕의 망고나무숲은 나와 사라인선 언니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마음에 담아둔 장소가 틀림없다.

AUP 언덕 아래 산타로사 빌리지나 파세오 상가에 있을 때는 바람이 없는 것 같아도 여기 언덕에만 오면 바람이 분다. 바람도 자기가 지나고 싶은 길이 따로 있어서, 그 길로만 부는 것이다.

싸. 싸. 싸.

사라인선 언니와 나는 나무판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망고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몰려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둘 다 별로 말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조용한 가운데 망고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오래도록 들을 수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바람소리와 망고나무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생활비 문제와 엄마와 연락이 끊어진 문제들 모두 먼 별나라 다른 아이의 문제처럼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나가 홀가분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을 나는 일주일 내내 기다리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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