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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에는 박지성과 오아시스가 있다!

오아시스, 연장 대신 기타로 성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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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는 단순한 인기밴드가 아니었다. 비틀즈부터 섹스 피스톨즈까지, 록의 역사를 총집합시켜 주름제거 수술을 하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은 후 운동회를 시키는 듯한 이 앨범에 평단이 열광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화려한 사운드도, 심오하거나 난해한 가사도 없었다.


우리에겐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잘 알려진 맨체스터는 ‘자본주의의 요람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자본주의의 무덤이 된 도시’다. 산업혁명의 수혜로 급성장한 후, 70년대 후반 영국에 들이닥친 IMF로 하루아침에 몰락한 도시였다. IMF 이후 집권한 대처정권 치하의 냉혹한 구조조정 속에서 도시의 산업기반은 무너졌다. 범죄율은 치솟았고 치안은 불안정해졌다. 계급간의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가진 것 없는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건 셋 중 하나였다. 노동자와 축구선수, 혹은 록스타. 그래서 맨체스터에는 영국음악의 획을 긋는 뮤지션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것은 꿈을 이루는 과정임과 동시에 현실도피를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노동자계급이면서 ‘유럽의 흑인’이라 불리는 아일랜드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두 형제가 있었다. 형의 이름은 노엘 갤러거, 동생은 리엄 갤러거. 폭력적인 아버지의 구타는 매일 이어졌다. 맞다가 ‘떡실신’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온 가족이 아버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는 이혼했다. 형제는 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삶은 더욱 가난해졌다. 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해야 했다. 할 일이래 봤자 창고정리를 한다든가 하는 저품질 일자리가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악기에 익숙한 서구의 소년들처럼, 노엘은 열세 살 때인 1980년대 초반에 기타 한 대를 선물 받았다. 그는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다. 비틀즈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멋진 록음악을 들으며 고단한 하루를 이기곤 했다. 처음에는 취미였다. 취미가 꿈으로 바뀐 건 맨체스터 출신으로 후일 80년대 영국을 대표하게 된 스미스의 데뷔곡 「This Charming Man」을 듣는 순간이었다. 이 노동계급 소년은 그 이후로 줄곧 이 밴드의 기타 조니 마처럼 되기를 꿈꿨다. 만화 『20세기 소년』의 주인공 켄지가 줄곧 선망하던 기타를 누나에게 선물 받고 거울 하던 기타를 누나에게 선물 받고 거울 앞에 서서 미래의 록스타를 그렸던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밴드란 게 참 쉽지 않다. 한국에서도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아서 팀을 만들기란 운과 인맥이 좋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넘치는 게 기타고 베이스고 드럼인 동네에서는 어지간한 실력이 없으면 더욱 힘들 수밖에. 그런 노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8년, 역시 맨체스터 출신의 인기밴드였던 인스파이럴 카페츠가 새로운 보컬을 뽑는다는 걸 듣고 오디션에 응한 것이다.


기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록스타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 본래 친분이 있었던 인스파이럴 카페츠는 노엘에게 로디(밴드의 스태프)라도 할 테냐고 제안했고 그는 받아들인다. 밴드의 잡일을 돕고 투어를 따라다니고, 뭐 그런 재미없는 (그러나 창고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갤러거 형제의 엄마에게 동생인 리엄이 밴드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1991년 8월, 맨체스터 클럽에서 리엄의 밴드 레인은 첫 공연을 했고, 노엘은 이를 지켜봤다. 리엄은 노엘에게 자신들의 매니저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형의 로디 경력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였다. 노엘은 거절했다. 대신 기타리스트가 되겠다고 했다. 밴드의 노래를 만들고 이끄는 리더가. 리엄과 친구들은 수락했다. 노엘은 당장 이름부터 바꿨다. 오아시스로. 모두가 이상하다며 반대했다. “우리가 유명해지면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오아시스의 합주가 시작됐다. 당시의 맨체스터 밴드들은 모두 댄서블한 록을 추구하고 있었다. 노엘이 로디로 일했던 인스파이럴 카페츠, 스톤 로지스, 해피 먼데이스, 뉴 오더에 이르기까지. 매드체스터 사운드로 불리며 80년대 후반의 영국음악계에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경향이었다. 그러나 노엘은 오아시스의 방향을 정통적인 록에 가깝게 뜯어고쳤다. 베이스와 드럼에게는 기본적인 리듬만을 연주하게 했고, 앰프가 찢어질 만큼의 큰 소리로 기타를 쳤다. “스톤 로지스는 정말 훌륭한 밴드였다. 그러나 우리가 스톤 로지스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자작곡을 만들고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맨체스터 레이블들에게 오아시스는 이미 기피대상이었다. 음악은 훌륭했다. 허나, 무대에서의 싸움질이 계기가 되어 골칫거리로 찍혀 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건 맨체스터가 아닌 다른 지역의 인물이었다. 그들이 어거지로 우기다시피 글래스고 클럽에서 공연했던 1993년 5월 31일. 객석에는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앨런 맥기가 있었다. 프라이멀 스크림,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틴에이지 팬클럽 등을 제작했던 영국 인디신의 거물. 공연이 끝난 후 앨런 맥기는 오아시스에게 찾아왔고 그들은 「Columbia」 「Rock ‘n’ Roll Star」 등이 담겨 있는 데모테이프를 건넸다. 누가 그걸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당신은 그럴 수 있나? 앨런 맥기도 마찬가지였다. 오아시스가 크리에이션과 계약을 체결하는 데는 그 후 4일이면 충분했다. 브릿팝 신화의 신호탄이 장전되는 순간이었다. 1994년 당시, 누구나 ‘제2의 비틀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스톤 로지스는 소속사와의 분쟁 때문에 오랜 공백기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을 넘어 영국, 아니 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4월 5일, 스스로의 머리에 총탄을 쏘며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상실과 허무를 모토로 90년대를 열었던 아이콘이 한순간에 증발한 것이다. 너바나의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가. 영국으로 말하자면, 70년대 글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스웨이드가 있었고, 도회적 감성으로 무장한 블러가 있었다. 누구나 그 둘 중 하나가 패왕이 될 거라 예상했다.

 

그때였다. 4월 11일, 오아시스의 <Supersonic>이 발표됐다. 차트 성적은 오아시스의 싱글 중 가장 낮은 31위. 그러나 신드롬은 시작되었다. 이어서 <Shakemaker> <Live Forever>가 줄줄이 발매됐다. 정규앨범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오아시스는 이미 스타였다. 무대 위로 몰려드는 관객들을 피해, 노엘은 마지막 곡이 끝나기도 전에 대피하다시피 빠져나오곤 했다. 관객 수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표를 구하지 못해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9월, 그해의 여름은 그제야 시작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Definitely Maybe>가 발매된 것이다. 이 앨범은 영국음악 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는 데뷔앨범이 됐다. 앨범차트 1위는 그에 비하면 퍽 소소한 기록이었다. 그러니 데뷔앨범의 첫 곡을 「Rock ‘n’ Roll Star」로 한 것은 교만도, 희망도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그 순간 록스타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맨체스터의 가난뱅이 노동자였던 그들이 자고 일어나니 신분이 바뀐 것이다.

오아시스는 단순한 인기밴드가 아니었다. 비틀즈부터 섹스 피스톨즈까지, 록의 역사를 총집합시켜 주름제거 수술을 하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은 후 운동회를 시키는 듯한 이 앨범에 평단이 열광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화려한 사운드도, 심오하거나 난해한 가사도 없었다. 그저 몰아치는 기타와 귀를 향해 꽂히는 멜로디, 단순하고 강력한 코드, 역시 단순한 리듬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록은 그리 폭발적으로 젊은이들을 열광시켜왔는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Definitely Maybe>에 들어 있었다. 누구도 시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시비를 걸었다. “요즘 음악계는 재미가 없다. 뮤지션들이 왜 경쟁하지 않고 서로 칭찬만 하고 있는가”라던 닐 테넌트(펫 샵 보이스)의 말에 “그쵸? 형님? 다 죽여야죠?”라 답하듯 동료 밴드들에게 거침없는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오아시스는 음악계를 스포츠계로 만들어놨다”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시비 걸 사람이 없으면 노엘과 리엄, 그리고 본헤드는 술과 약에 취해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난투극을 벌였다. 시장과 평단, 그리고 타블로이드에게까지 그들은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록스타가 갖춰야 할 모든 것 이상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성실과 겸손 따위는 록스타의 덕목이 아니니까.

해가 바뀌었다. 직전에 크리스마스 싱글로 발표한 <Whatever>는 차트 3위에 올랐다. 이 로큰롤 야만인들이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얼마나 격앙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싱글이자, 다음 앨범의 다양성에 대한 예고였다. 영국이 오아시스의 새 앨범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 90년대 영국음악계의 가장 큰 이벤트였을 블러 vs 오아시스의 ‘브릿팝 전쟁’이었다. 원래는 오아시스의 <Roll With It>이 8월 14일, 블러의 <Country House>가 8월 7일에 발매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블러가 발매일을 한 주 늦추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두 밴드가 차트 1위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 것이다. 단순한 인기 밴드의 대결이 아니었다. 노동자계급, 잉글랜드 북부를 상징하는 오아시스와 중산층, 잉글랜드 남부를 상징하는 블러. 이것은 계급투쟁을 상징하는 것이자 경쟁 관계인 잉글랜드 남북의 전쟁이기도 했다. 음악을 넘어 스포츠, 아니 정치였다. 이른바 브릿팝 시대의 폭발이 만들어낸 이벤트였던 것이다. 결과는? 블러의 승리였다. 27만 4천 장 대 21만 6천 장. 허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Country House>의 가격은 1.99파운드였던 반면, <Roll With It>은 3.99파운드에 팔렸다. 양측의 팬이 아닌 부동층이 어느 쪽을 샀을까? 그러나 어쨌든 차트 1위는 블러의 차지였다. 싸움은 원래 무조건 이기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그 싸움이 전쟁이 아닌 전투에 불과하다면? 그들의 대결이 그랬다. 블러의 3집 <The Great Escape>와 오아시스의 2집 <(What’s The Story)Morning Glory>는 각각 그해 11월, 10월에 발매되었다. 블러의 <The Great Escape>는 결코 나쁘지 않은 앨범이었다. 블러다운 밝은 음악이 가득 들어찬, 재기 넘치는 앨범이었다. 다만, 이미 세상은 오아시스의 차지가 된 이후였다는 게 그들의 유일한 불운이었다. <(What’s The Story)Morning Glory>는 <Definitely Maybe>에 있는 모든 것과, <Definitely Maybe>에 없는 모든 것들을 갖춘 앨범이었다. 영국 차트에서 10주간 1위를 차지했고 전 세계적으로 1900만 장이 팔렸으며 영국역사상 세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데이터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하면.

여섯 곡이 싱글 커트되었으며 그중 두 곡(「Some Might Say」 「Don’t Look Back In Anger」)이 1위, 두 곡(「Roll With It」 「Wonderwall」) 이 2위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싱글 커트된 「Champagne Supernova」는 20위권 대에 머물렀지만 결코 라디오 친화적이지 않은 긴 시간을 생각한다면, 넘쳐흐르는 기타 솔로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이채로운 일이었다. 이런 사실도 역시 다음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1996년 8월에 열린 네브워스 공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잉글랜드의 대평원에서 그들은 3일간 총 25만 명을 앞에 놓고 공연했다. 그때까지 영국에서 벌어진 단독공연으로는 최대의 규모였다. 티켓을 구하기 위해 영국 인구의 20명 중 1명, 즉 750만 명이 응모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멸시받던 청년 하위문화는 당당히 영국문화의 중심이자 가장 쿨한 존재가 됐다. 블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오아시스는 노동계급의 영웅이 됐다. 많은 록스타 중 하나가 아닌 영국, 아니 서구를 대표하는 록스타가 됐다. 스미스에서 촉발된, 지지리도 가난한 맨체스터의 로컬밴드 무브먼트가 세계를 정복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그건 인기라던가, 대박이라던가 하는 세속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하고 흥분되며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자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전작을 계승해서 동등한 평가를 얻던가. 획기적인 변신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던가. 그 선택에는 탁월한 재능도 필요하지만 그전에는 필요하지 않았던 성실함이 요구된다. 불운하게도,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네브워스 공연 직후, 미국에서의 더 큰 성공을 위해 MTV 언플러그드에 출연하기로 했지만 공연 당일, 리엄이 목 상태가 좋지 않다며 공연을 거부한 것이다. 결국 이 공연은 노엘의 보컬로 진행되어야 했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리엄은 본래 어쿠스틱 세트로 노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형제의 불화는 깊어졌다. 다음 달에 시작된 미국투어에서 노엘은 며칠 만에 영국으로 돌아와버렸고, 투어는 중단됐다. 밴드는 해체설에 휩싸였다. 끝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새 앨범을 녹음하면서 밴드는 코카인에 절어 있었다. 아무도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1997년 8월 발매된 <Be Here Now>는 그 모든 걸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물론, 거대한 성공에는 반드시 관성이 따른다. 수용자의 판단은 마비된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평단의 상찬도 이어졌다. 허나 추동력이 떨어진 공은 상승을 멈추고 하향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 법. 곡은 지나치게 많았고 노래는 길었으며 기타로 뒤범벅된 사운드에는 중심이 사라졌다. 스트레이트한 로큰롤의 러닝화 뒤축은 닳아 있었고, 아름다운 발라드의 혀는 웅얼대고 있었다. 세일즈 행진, 비평적 찬사의 기세도 꺾였다. 노엘 역시 이 앨범의 홍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Stand By Me」 「All Around The World」 같은 훌륭한 싱글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아시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주류문화에 진입한 인디록은 매스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끝없이 소비되었으며, 90년대 중반 브릿팝이 갖고 있던 쿨하고 시크한 엣지를 갖춘 앨범은 역시 1997년 발표된 버브의 <Urban Hymns>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상 브릿팝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또한 노엘 갤러거는 다우닝 가에서 열린 토니 블레어의 당선 축하파티에 참석, 그와 악수하는 사진을 남기며 노동계급 영웅으로서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말았다. 게다가 그해 「Look Back In Anger」의 자리는 로비 윌리암스가 부른 「Angel」의 몫이었다. 그가 이듬해 글래스톤베리 헤드라이너로 참석, 10만여 관중의 합창으로 「Angel」을 부른 후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됐어!”를 외쳐대던 순간이 상징하는 건 하나였다. 굿바이 브릿팝 시대. 오아시스의 최전성기가 끝났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Be Here Now>를 끝으로 갤러거 형제의 동네친구였으며 오랜 밴드동료였던 두 명이 팀을 떠났다. 본헤드와 귁시. 갤러거 형제와 앨런 화이트 셋이서 새 앨범 녹음을 끝내야 했다. 지난 앨범의 실패 때문이었을까. 오아시스는 변화를 추구했다. 90년대 후반의 주요한 흐름이었던 일렉트로니카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Be Here Now>에서 추구하려 했던 사이키델릭한 색채를 좀 더 강화하기도 했다.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 2월 발매된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에는 트립합과 빅비트의 흔적이 고루 느껴지고 노엘의 기타가 곳곳에서 흩뿌려졌다. 그동안 모든 곡을 썼던 노엘은 동생이 만든 「Little James」를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다. 비록 썩 맘에 들어하진 않았지만.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냉담했다. 첫 주 1위를 차지했고 첫 싱글인 「Go Let It Out」은 그들의 최고곡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한번 흩어진 중심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비록 노엘이 코카인을 끊고 작업에 전념한 앨범이지만, 금단으로 인한 공황장애의 탓이었는지 이 정상급 송라이터의 감각이 무뎌진 것만 같았다. 형제의 불화는 계속됐고 투어 중단도 이어졌다. 그러나 명불허전. 앨범투어의 마지막이었던 웸블리 스타디움 라이브를 매진시킨 그들은 절정의 라이브를 선보였다. 이 공연의 첫 날은 DVD <Familiar To Millionaire>로 발매되기도 했다. 90년대 밴드로서는 라디오헤드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과시하는 오아시스였다. 그러나 더 이상 ‘젊은’ 밴드는 아니었다. 브릿팝 시대의 빈자리를 채운 건 콜드플레이, 뮤즈, 트래비스 같은 팀들이었다. 브릿팝이라기보다는 팝, 또는 록밴드라고 하는 편이 훨씬 잘 어울릴 만한 흐름이 새천년으로부터 발원하고 있었다.

그 시기를 맞아 오아시스 역시 새로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앤디 벨과 겜 아처를 새로운 식구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는 밴드가 더 이상 ‘친구들의 모임’이 아닌 ‘비즈니스 공동체’로 바뀐 걸 의미했다. 또한 새 멤버들과 함께 2002년 발매한 <Heathen Chemistry>에서는 모든 멤버들이 작곡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노엘 갤러거의 절대왕정이 끝나고 공화정이 시작됐다. 앤디와 겜 모두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일까. <Heathen Chemistry>의 작업은 이전과는 달리 지극히 순탄하게 진행됐다. 술과 약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없었고, 형제의 반목도 상대적으로 덜했다. 바야흐로 평화와 안정의 시대. 평단과 대중 역시 그런 변화를 따스히 맞아들였다. 첫 싱글 「Hindu Times」 역시 그동안의 관례대로 1위를 차지했으며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커트된, 리엄의 「Songbird」는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투어들과는 달리 투어 자체가 중단되는 일도 없었다. 물론 리엄이 공연 중 무대를 떠난다든지 하는 ‘작은’ 사고는 있었지만. 90년대의 광풍이 사라지고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시작한 영국사회처럼, 왕국에서 공화국이 된 오아시스 역시 이제 광풍을 모는 밴드는 아니었다. 대표적인 영국밴드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부활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5년 발표한, 그리고 팀을 떠난 앨런 화이트 대신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드럼 스틱을 잡은 <Don’t Belive The Truth>는 오아시스의 완벽한 부활을 불러왔다. 이를 위해 오아시스는 데스 인 베가스와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두 폐기처분하기도 했다. 졸속으로 급히 만들었던 <Be Here Now>의 전철을 밟지 않은 것이다. 또한 프로듀서를 불신했던 노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호주밴드 제트의 프로듀싱을 담당했던 데이브 사르디를 기용해서 지휘봉을 넘겼다. 그렇게 발매된 앨범은 <Morning Glory> 이후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으며 세일즈 또한 그랬다. 영국에서 1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보다 미국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미국에서도 12위에 올랐다. 이는 <Be Here Now> 이후 최고 기록이었다. 이 앨범의 미덕은 무엇보다, 노엘 갤러거의 중심이 돌아왔다는 거였다. 멜로디는 선연해졌고 구성 또한 단순하면서도 묵직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카사비안, 프란츠 퍼디넌드 등이 젊은 혈기로 영국음악계를 휘저었다면 이제 오아시스는 원숙함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팬들을 사로잡는, 바야흐로 중견밴드다운 면목을 완성한 것이다. 전성기의 기량을 되찾은 앨범이 있다. 무엇보다 과거의 대히트곡들이 있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오아시스는 최대 규모의 월드투어를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한국도 있었다. 이제 갓 록에 입문한 10대들은 ‘거장’을 보러 왔다. 그들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30대들은 ‘상징’을 만나러왔다. 이 땅의 음악 커뮤니티에서 잊혀져가나 싶었던 오아시스는 그렇게, 9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밴드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한국에서 리셋버튼을 누르고 갔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한국 내한공연 시장의 시제도 일본 등과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오아시스는 그 후 두 번 더 한국을 찾았다. 2009년 초의 두 번째 내한공연이 끝날 무렵, 모든 멤버들이 한국의 폭발적인 반응에 격앙되어 내려갔다. 노엘은 다른 멤버들보다 늦게 퇴장했다. 객석을 응시하며 이 밤을 기억하려는 듯했다. 여유, 마음으로부터의 기쁨, 그리고 성취감으로 가득 찬 그때의 얼굴은 말하는 듯했다. 갈수록 다른 멤버들이 곡 작업에 참여하는 비중을 높이며 독재를 완화하고 있지만, 결국 오아시스의 오늘을 만들어내고 지켜온 건 노엘 자신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듯했다. 변방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뮤지션 그 누가 의기양양하지 않겠냐만, 노엘이 유독 특별해 보였던 건 바로 그 순간 때문이었다.

맨체스터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록큰롤 소년이, 그저 ‘피’의 힘으로 존경받는 왕세자와는 다른 권위를 스스로 일궈낸 중년이 된 것이다. 끝은 돌연히 찾아왔다. 그 해 여름, 지산 밸리 록페스티벌을 통해 한국에서의 세 번째 공연을 마친 지 한 달가량 지나서였다. 오랫동안 밴드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노엘과 리엄의 반목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말도 섞지 않고 투어 이동시에도 따로 다니던 그들은 결국 사소한 계기로 거대한 주먹다짐을 했다. 노엘은 다음날 탈퇴를 공식선언했다. 얼마 후 리엄도 “오아시스는 이제 끝났다”며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했다. 노엘은 탈퇴의 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8년은 정말,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시간들은 한 소년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웠던 기억들을 간직하겠습니다.” 2009년 여름, 맨체스터에서 만난 그들 또래의 사내는 “오아시스? 맨체스터 사람이라면, 특히 우리 또래 노동자계급 사람이라면 다 자랑스러워할 수밖에 없지. 난 그들이 데뷔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할 수 있어. 존나 잘나가는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했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생각해봐. 그게 인생이야. 안 그래?” 맨체스터 음악 신의 역사를 다룬 책 『The North Will Rise Again』은 노엘 갤러거의 진술로 시작한다. “물론 스톤 로지스는 맨체스터 출신이다. 그들이 거기 아니면 어디 출신이란 말인가? 스미스와 조이 디비전은 또 어떻고? 이언 커티스는 어디 출신이지? 팩토리 레코드는? 하시엔다는 어디 있었지? 존나 자연스러운 거다. 북부 잉글랜드의 이 좆만 한 장소에서 엄청난 음악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엄청난 음악의 정점은 바로 오아시스일 것이다. 그 정점에 꿈을 이룬 소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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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딥마인드

『김미경의 마흔 수업』 김미경 저자의 신작.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절망과 공허함에 빠진 이들에게 스스로를 치유하는 말인 '딥마인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정한 행복과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는 자신만의 딥마인드 스위치를 켜는 방법을 진솔하게 담았다.

화가들이 전하고 싶었던 사랑 이야기

이창용 도슨트와 함께 엿보는 명화 속 사랑의 이야기. 이중섭, 클림트, 에곤 실레, 뭉크, 프리다 칼로 등 강렬한 사랑의 기억을 남긴 화가 7인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남긴 감정을 살펴본다. 화가의 생애와 숨겨진 뒷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현대적 해석은 작품 감상에 깊이를 더한다.

필사 열풍은 계속된다

2024년은 필사하는 해였다. 전작 『더 나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에 이어 글쓰기 대가가 남긴 주옥같은 글을 실었다. 이번 편은 특히 표현력, 어휘력에 집중했다. 부록으로 문장에 품격을 더할 어휘 330을 실었으며, 사철제본으로 필사의 편리함을 더했다.

슈뻘맨과 함께 국어 완전 정복!

유쾌 발랄 슈뻘맨과 함께 국어 능력 레벨 업! 좌충우돌 웃음 가득한 일상 에피소드 속에 숨어 있는 어휘, 맞춤법, 사자성어, 속담 등을 찾으며 국어 지식을 배우는 학습 만화입니다. 숨은 국어 상식을 찾아 보는 정보 페이지와 국어 능력 시험을 통해 초등 국어를 재미있게 정복해보세요.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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