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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에는 박지성과 오아시스가 있다!
오아시스, 연장 대신 기타로 성공하다
오아시스는 단순한 인기밴드가 아니었다. 비틀즈부터 섹스 피스톨즈까지, 록의 역사를 총집합시켜 주름제거 수술을 하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은 후 운동회를 시키는 듯한 이 앨범에 평단이 열광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화려한 사운드도, 심오하거나 난해한 가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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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4월 11일, 오아시스의 <Supersonic>이 발표됐다. 차트 성적은 오아시스의 싱글 중 가장 낮은 31위. 그러나 신드롬은 시작되었다. 이어서 <Shakemaker> <Live Forever>가 줄줄이 발매됐다. 정규앨범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오아시스는 이미 스타였다. 무대 위로 몰려드는 관객들을 피해, 노엘은 마지막 곡이 끝나기도 전에 대피하다시피 빠져나오곤 했다. 관객 수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표를 구하지 못해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9월, 그해의 여름은 그제야 시작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Definitely Maybe>가 발매된 것이다. 이 앨범은 영국음악 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는 데뷔앨범이 됐다. 앨범차트 1위는 그에 비하면 퍽 소소한 기록이었다. 그러니 데뷔앨범의 첫 곡을 「Rock ‘n’ Roll Star」로 한 것은 교만도, 희망도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그 순간 록스타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맨체스터의 가난뱅이 노동자였던 그들이 자고 일어나니 신분이 바뀐 것이다.
오아시스는 단순한 인기밴드가 아니었다. 비틀즈부터 섹스 피스톨즈까지, 록의 역사를 총집합시켜 주름제거 수술을 하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은 후 운동회를 시키는 듯한 이 앨범에 평단이 열광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화려한 사운드도, 심오하거나 난해한 가사도 없었다. 그저 몰아치는 기타와 귀를 향해 꽂히는 멜로디, 단순하고 강력한 코드, 역시 단순한 리듬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록은 그리 폭발적으로 젊은이들을 열광시켜왔는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Definitely Maybe>에 들어 있었다. 누구도 시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시비를 걸었다. “요즘 음악계는 재미가 없다. 뮤지션들이 왜 경쟁하지 않고 서로 칭찬만 하고 있는가”라던 닐 테넌트(펫 샵 보이스)의 말에 “그쵸? 형님? 다 죽여야죠?”라 답하듯 동료 밴드들에게 거침없는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오아시스는 음악계를 스포츠계로 만들어놨다”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시비 걸 사람이 없으면 노엘과 리엄, 그리고 본헤드는 술과 약에 취해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난투극을 벌였다. 시장과 평단, 그리고 타블로이드에게까지 그들은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록스타가 갖춰야 할 모든 것 이상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성실과 겸손 따위는 록스타의 덕목이 아니니까.
해가 바뀌었다. 직전에 크리스마스 싱글로 발표한 <Whatever>는 차트 3위에 올랐다. 이 로큰롤 야만인들이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얼마나 격앙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싱글이자, 다음 앨범의 다양성에 대한 예고였다. 영국이 오아시스의 새 앨범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 90년대 영국음악계의 가장 큰 이벤트였을 블러 vs 오아시스의 ‘브릿팝 전쟁’이었다. 원래는 오아시스의 <Roll With It>이 8월 14일, 블러의 <Country House>가 8월 7일에 발매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블러가 발매일을 한 주 늦추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두 밴드가 차트 1위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 것이다. 단순한 인기 밴드의 대결이 아니었다. 노동자계급, 잉글랜드 북부를 상징하는 오아시스와 중산층, 잉글랜드 남부를 상징하는 블러. 이것은 계급투쟁을 상징하는 것이자 경쟁 관계인 잉글랜드 남북의 전쟁이기도 했다. 음악을 넘어 스포츠, 아니 정치였다. 이른바 브릿팝 시대의 폭발이 만들어낸 이벤트였던 것이다. 결과는? 블러의 승리였다. 27만 4천 장 대 21만 6천 장. 허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Country House>의 가격은 1.99파운드였던 반면, <Roll With It>은 3.99파운드에 팔렸다. 양측의 팬이 아닌 부동층이 어느 쪽을 샀을까? 그러나 어쨌든 차트 1위는 블러의 차지였다. 싸움은 원래 무조건 이기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그 싸움이 전쟁이 아닌 전투에 불과하다면? 그들의 대결이 그랬다. 블러의 3집 <The Great Escape>와 오아시스의 2집 <(What’s The Story)Morning Glory>는 각각 그해 11월, 10월에 발매되었다. 블러의 <The Great Escape>는 결코 나쁘지 않은 앨범이었다. 블러다운 밝은 음악이 가득 들어찬, 재기 넘치는 앨범이었다. 다만, 이미 세상은 오아시스의 차지가 된 이후였다는 게 그들의 유일한 불운이었다. <(What’s The Story)Morning Glory>는 <Definitely Maybe>에 있는 모든 것과, <Definitely Maybe>에 없는 모든 것들을 갖춘 앨범이었다. 영국 차트에서 10주간 1위를 차지했고 전 세계적으로 1900만 장이 팔렸으며 영국역사상 세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데이터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하면.
1997년 8월 발매된 <Be Here Now>는 그 모든 걸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물론, 거대한 성공에는 반드시 관성이 따른다. 수용자의 판단은 마비된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평단의 상찬도 이어졌다. 허나 추동력이 떨어진 공은 상승을 멈추고 하향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 법. 곡은 지나치게 많았고 노래는 길었으며 기타로 뒤범벅된 사운드에는 중심이 사라졌다. 스트레이트한 로큰롤의 러닝화 뒤축은 닳아 있었고, 아름다운 발라드의 혀는 웅얼대고 있었다. 세일즈 행진, 비평적 찬사의 기세도 꺾였다. 노엘 역시 이 앨범의 홍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Stand By Me」 「All Around The World」 같은 훌륭한 싱글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아시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주류문화에 진입한 인디록은 매스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끝없이 소비되었으며, 90년대 중반 브릿팝이 갖고 있던 쿨하고 시크한 엣지를 갖춘 앨범은 역시 1997년 발표된 버브의 <Urban Hymns>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상 브릿팝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또한 노엘 갤러거는 다우닝 가에서 열린 토니 블레어의 당선 축하파티에 참석, 그와 악수하는 사진을 남기며 노동계급 영웅으로서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말았다. 게다가 그해 「Look Back In Anger」의 자리는 로비 윌리암스가 부른 「Angel」의 몫이었다. 그가 이듬해 글래스톤베리 헤드라이너로 참석, 10만여 관중의 합창으로 「Angel」을 부른 후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됐어!”를 외쳐대던 순간이 상징하는 건 하나였다. 굿바이 브릿팝 시대. 오아시스의 최전성기가 끝났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Be Here Now>를 끝으로 갤러거 형제의 동네친구였으며 오랜 밴드동료였던 두 명이 팀을 떠났다. 본헤드와 귁시. 갤러거 형제와 앨런 화이트 셋이서 새 앨범 녹음을 끝내야 했다. 지난 앨범의 실패 때문이었을까. 오아시스는 변화를 추구했다. 90년대 후반의 주요한 흐름이었던 일렉트로니카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Be Here Now>에서 추구하려 했던 사이키델릭한 색채를 좀 더 강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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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는 최대 규모의 월드투어를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한국도 있었다. 이제 갓 록에 입문한 10대들은 ‘거장’을 보러 왔다. 그들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30대들은 ‘상징’을 만나러왔다. 이 땅의 음악 커뮤니티에서 잊혀져가나 싶었던 오아시스는 그렇게, 9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밴드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한국에서 리셋버튼을 누르고 갔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한국 내한공연 시장의 시제도 일본 등과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오아시스는 그 후 두 번 더 한국을 찾았다. 2009년 초의 두 번째 내한공연이 끝날 무렵, 모든 멤버들이 한국의 폭발적인 반응에 격앙되어 내려갔다. 노엘은 다른 멤버들보다 늦게 퇴장했다. 객석을 응시하며 이 밤을 기억하려는 듯했다. 여유, 마음으로부터의 기쁨, 그리고 성취감으로 가득 찬 그때의 얼굴은 말하는 듯했다. 갈수록 다른 멤버들이 곡 작업에 참여하는 비중을 높이며 독재를 완화하고 있지만, 결국 오아시스의 오늘을 만들어내고 지켜온 건 노엘 자신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듯했다. 변방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뮤지션 그 누가 의기양양하지 않겠냐만, 노엘이 유독 특별해 보였던 건 바로 그 순간 때문이었다.
맨체스터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록큰롤 소년이, 그저 ‘피’의 힘으로 존경받는 왕세자와는 다른 권위를 스스로 일궈낸 중년이 된 것이다. 끝은 돌연히 찾아왔다. 그 해 여름, 지산 밸리 록페스티벌을 통해 한국에서의 세 번째 공연을 마친 지 한 달가량 지나서였다. 오랫동안 밴드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노엘과 리엄의 반목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말도 섞지 않고 투어 이동시에도 따로 다니던 그들은 결국 사소한 계기로 거대한 주먹다짐을 했다. 노엘은 다음날 탈퇴를 공식선언했다. 얼마 후 리엄도 “오아시스는 이제 끝났다”며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했다. 노엘은 탈퇴의 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8년은 정말,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시간들은 한 소년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웠던 기억들을 간직하겠습니다.” 2009년 여름, 맨체스터에서 만난 그들 또래의 사내는 “오아시스? 맨체스터 사람이라면, 특히 우리 또래 노동자계급 사람이라면 다 자랑스러워할 수밖에 없지. 난 그들이 데뷔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할 수 있어. 존나 잘나가는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했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생각해봐. 그게 인생이야. 안 그래?” 맨체스터 음악 신의 역사를 다룬 책 『The North Will Rise Again』은 노엘 갤러거의 진술로 시작한다. “물론 스톤 로지스는 맨체스터 출신이다. 그들이 거기 아니면 어디 출신이란 말인가? 스미스와 조이 디비전은 또 어떻고? 이언 커티스는 어디 출신이지? 팩토리 레코드는? 하시엔다는 어디 있었지? 존나 자연스러운 거다. 북부 잉글랜드의 이 좆만 한 장소에서 엄청난 음악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엄청난 음악의 정점은 바로 오아시스일 것이다. 그 정점에 꿈을 이룬 소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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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특집으로는 ‘교과서 비판’을 다뤘다. 청소년들이 가장 오랫동안 붙잡고 싸워야 하는 대상이 교과서다. 교과서는 왜 청소년들에게 싸움의 대상이어야만 할까. 교과서는 능동적이며 창의적이어야 할 청소년들에게 ‘상상력의 덫’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일방통행의 사고를 주입까지 한다. 그럼에도 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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