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1888년 2월-18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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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613과 스케치 | |
613 1888년 5월 20일경
사랑하는 테오,
네가 그루비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지만, 그곳에 다녀왔다니 안심이야. 너는 무기력(극도의 피로감)이 심장병에서 생길 수 있고, 그 경우 포타슘 옥화물沃化物은 피로와 무관하다는 것을 생각해보았니? 나 자신 지난겨울 너무나 피곤해서 그림 몇 점을 그리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포타슘 옥화물은 복용하지 않았거든. 내가 너였다면 리베Ribet와 상의해서 그루비가 그것을 복용하지 않게 했을 거야. 여하튼 네가 두 사람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여기서 지금 나는 종종 그루비를 생각해. 나는 대체로 좋은 상태야. 순수한 공기와 따뜻함 때문이지. 파리의 번거로운 일들과 나쁜 공기 속에서, 리베는 사물을 자신이 본 대로 파악하여 천국을 창조하려 노력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고자 시도하지도 않았어. 그는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 사람들이 병을 무시하도록 해서 우리 기력을 유지시키려 했지.
따라서 네가 지금 단 1년만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면,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또 그는 너에게 여자와 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한정하고, 가능한 한 줄이라고 권유하겠지. 그런데 나는 그 점에 관한 한 잘하고 있어. 그것은
여기 나에게 일이 있고, 자연도 있기 때문이야.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우울에 젖어 살겠지. 너의 일이 좀더 매력적이라면, 또 인상주의가 잘한다면 더 좋을 테지만. 왜냐하면 고독, 걱정, 문제, 우정과 공감 결여 같은 것은 정말 좋지 않기 때문이야. 슬픔이나 실망 같은 정신적 충격은 방탕 이상으로 우리를, 즉 불규칙적인 심장의 행복한 소유자인 우리를 갉아먹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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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613 | |
포타슘 옥화물은 혈액과 순환계통 전체를 정화시킨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너는 그것 없이 지낼 수 있니? 그에 대해 리베와 솔직하게 말해야 돼. 그는 질투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나는 네 주위에 네덜란드 사람들보다 적나라하게 생생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 코닝은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예외이지. 여하튼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프랑스 친구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호의를 베풀어주련? 나의 덴마크인 친구가 화요일 파리에 가서 작은 그림 두 점을 줄 거야.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아스니에르의 부아시에르 백작 부인Comtesse de la Boissiere에게 드리고 싶어. 그녀는 볼테르 대로에 살고 있어. 클리시 다리 끝 첫 집 2층이야. 1층에는 페루쇼 할아버지의 식당이 있어. 그 그림들을 그녀에게 전하고, 내가 보낸 것이라고 말해다오. 또 내가 이번 봄에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 하고, 여기에 와서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겠니? 작년에도 나는 그녀와 그녀의 딸에게 소품을 두 점 주었어. 네가 그들과 알게 되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정말
가족이야.
백작 부인은 젊지는 않으나, 그래도 백작 부인이고, 게다가
귀부인이지. 그 딸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들이 올해도 같은 곳에 사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니, 네가 가보는 게 좋겠어(거기에 간 것이 몇 년 전이었는지 몰라도, 페루쇼가 주소를 알 거야). 이는 내 마음속 환상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나. 아마 그들이나 너나 기뻐할 거야.
도르트레히트를 위한 새로운 소묘를 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어.
이번 주에는 정물을 두 점 그렸다.
푸른 에나멜 커피주전자, 감청색과 금색 찻잔(왼쪽), 엷은 푸른색과 흰 체크의 우유주전자, 회색조 노란색의 도자기 쟁반 위에 놓인 흰색이 도는 푸른색과 오렌지 모양의 찻잔(오른쪽), 적?녹?갈색 모양이 있는 푸른 점토 또는 마졸리카 주전자, 마지막으로 오렌지 두 개와 레몬 세 개. 탁자는 푸른 보로 덮여 있고, 녹색조의 노란색이야. 따라서 여섯 가지 푸른색과 4, 5가지 노란색 그리고 오렌지색이야. 또 하나의 정물화는 들꽃을 꽂은 마졸리카 주전자야.
편지와 50프랑 지폐, 고마워. 짐 상자가 며칠 내에 도착하기를 빈다. 다음에는 캔버스를 틀에서 벗겨내 그림을 말아 급행열차 편으로 보낼 거야.
너는 그 덴마크 사람과 곧 친구가 될 거야. 그는 대단한 것을 그리지는 않지만, 머리가 좋고 친절해. 아마도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거야. 일요일을 조금 비워 두었다가 그를 맞으면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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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도개교」, 캔버스에 유채, 60?65cm, 파리, 개인소장, 1888 | |
나는 매우 좋아졌어. 피의 흐름도 좋아졌고 소화도 잘되고 있거든. 아주 좋은 식당을 찾았어. 바로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혀를 굳게 모아 “여자는 안 돼”라고 말했을 때의 그루비 얼굴을 보았니? 그런 얼굴은 멋진 드가 그림이 되지. 그렇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어. 하루 종일 계산하고 머리를 굴리며 거래하고, 머리를 써서 일해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기 때문이야. 지금 밖으로 나가서 상류사회 여성들과 만나는 게 좋아. 그러면 너에게 좋을 거야. 정말이야. 예술가나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성공하게 되는 것을 알아. 게다가 너는 크게 잃을 것도 없잖아.
가구상과는 아직 결정을 못했어. 침대를 하나 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비싸더라. 또 가구 사는 데 돈을 쓰기 전에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 해. 숙박료는 하룻밤에 1프랑이야. 또 속옷을 샀고 물감도 샀어. 매우 튼튼한 속옷을 골랐단다.
피가 점차 제대로 도니까 성공에 대한 생각도 다시 떠오르는구나. 너의 병도 언제까지나 이어질 듯한 그 끔찍한 겨울에 대한 반응이라면, 나는 전혀 놀랍지 않아. 그렇다면 내 경우와 같아질 거야. 가능한 한 봄 공기를 많이 마시고,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해. 너는 반드시 잠을 자야 해. 그리고 식사는 신선한 야채로 듬뿍 먹고,
질 나쁜 포도주나 술은 마시지 마라. 여자는 가능한 한 절제하고,
많이 참아라.
설령 금방 좋아지지는 않아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런데 거기서는 그루비가 고기를 먹으라고 할 거야. 나는 여기서 고기를 많이 먹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이제 머리가 멍한 상태도 없어졌고, 더 이상 나를 바꿀 필요도 없으며, 정욕에 허덕이지도 않아. 그리고 더 침착하게 일할 수 있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일 수 있게 되었지. 조금 나이가 든 듯한 기분이지만 쓸쓸하지는 않아.
네가 다음 편지에서 모든 게 좋다고 말한다고 해도, 나는 믿지 않을 거야. 회복하는 동안 조금 쇠약해져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야. 예술에 몰두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 참된 생활ㅡ이상이자 실현 불가능한ㅡ에 대한 향수를 갖게 마련이고, 그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가끔 되돌아와. 그리고 예술에 완전히 몸을 던지고, 예술을 위한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릴 의지를 잃기도 해. 우리가 마차를 끄는 말임을 알고, 지금부터 연결되는 것이 똑같은 늙은 말이라는 것도 알아. 그래서 그보다는 해와 강이 있는 초원에서 자유로운 다른 말과 함께 생식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쪽을 좋아하겠지. 심장병이 거기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야. 우리는 이제 거꾸로 돌아갈 수는 없고, 포기할 수도 없어. 그래서 병이 들고, 치료도 안 돼. 정확한 치료 방법도 없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이런 상태를 ‘죽음과 불멸의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했어. 우리가 끌고 있는 마차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도움이 되겠지.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예술을 믿고 미래의 예술가를 믿는다면, 우리 예감은 우리를 속이지 않을 거야.
늙은 코로가 죽기 며칠 전에 “어젯밤 꿈속에서 온통 분홍색인 하늘의 풍경화를 보았다”라고 말했지만, 인상주의의 풍경화에는 분홍색은커녕, 노란색과 초록색의 하늘이 없지 않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미래에 무엇인가 존재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실현될 수도 있다는 거야.
우리는 죽음이 가까웠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은 우리 존재보다 크고, 우리 삶보다도 영원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어.
우리는 자신이 죽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부족한 존재이고, 예술가라는 바퀴의 고리이기 위해 건강과 젊음과 자유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도, 자신은 그것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봄의 잔치에 나가는 무리를 태운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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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64?80.5cm,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국립미술관, 1888 | |
여하튼 너나 나나 무엇보다도 건강을 회복하자. 그것은 정말 필요하거든. 퓌비 드 샤반의 「희망L`Esperance」은 너무나 진실한 그림이야. 미래에 태어날 예술은 분명 너무나도 아름답고 젊을 거야. 지금 우리가 그것을 위해 젊음을 희생한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요한 마음이라는 경지일 뿐이야.
아마 어리석은 말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어. 나와 마찬가지로 너도 자신의 젊음이 연기처럼 스러지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그러나 젊음은 자신들이 이룬 것 속에서 다시 태어나 모습을 나타낼 거야. 그렇다면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 일을 하는 힘이 또 다른 젊음이기 때문이야. 좀더 진지하게 치료를 해라. 우리에게는 어떻든 건강이 필요하니까. 너에게 따뜻한 악수를, 그리고 코닝에게도.
영원한 너의 빈센트
해설
1888년 2월 20일, 빈센트는 눈이 60센티미터나 쌓인 아를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1889년 5월까지, 1년여 동안 그는 200점 이상의 유화, 100점 이상의 수채화와 소묘를 그렸다. 아를에서의 생활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 시기 그의 그림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격렬한 색과 붓터치를 구사하며 특유의 강렬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