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밤이 되면 제법 어깻죽지가 쓸쓸하고 쌀랑해집니다. 한밤중에 홀로 동네를 걸으니 좋습니다. 이 썰렁한 기운이 사뭇 단정한 옷매무새처럼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아, 밤중에 홀로 거리를 걷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술 사러 나왔습니다. 오늘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혼자 한잔해도 될 법한 좋은 핑계도 되어주셨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한 밤입니다. 오늘은 혼자 술 마시면서 읽기 좋은 시집을 소개할까 합니다. 홀로 취하고 읽으며 즐겁다면야 이런 풍류가 또 있겠습니까. 다음 날 시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최고로 사치스러운 일 아닐까요. 얼마든지 다시 읽을 내일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혼자 읽을 땐 실컷 소리 내어 읽어봅시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 뭐 어떤가요.
장이지 저|창비
어쩐지 낭만적인 제목을 가진 이 시집을 읽으면 화자의 어조가 외롭고 우울해서 가슴이 아파집니다. 이 사람, 너무 외로워서 편지 쓸 대상을 찾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잠깐 얼굴을 빼꼼 비추곤 금세 사라집니다. 눈의 여왕도, 엘리펀트 맨도, 폴과 후지이 이츠키도 덧없이 가버립니다. 편지란 써서 보내버릴 때마다 일어나는 작은 이별들일까요. 이 시집을 읽기전에 편지는 만남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외톨이 신(神)이 편지를 띄운다 우리는 받을 수 없고 답장을 쓸 수도 없는 편지이다 「체리 향기」에는 자기가 판 구덩이에 들어가 눕는 남자가 나온다 어떤 위로도 그를 살게 할 수 없다 체리 향기는 여전히 말풍선 안에 있다
(「체리 향기」, 『편지의 시대』, 74쪽)
“노인도 목을 매어 죽으려고 숲까지 갔지만 체리 향기가 풍겨와서 죽을 수 없었다고, 체리를 한알 두알 세알 자꾸 먹다보니 살고 싶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앞의 장면에서 설명된 영화의 내용입니다. 그 체리 향기는 노인의 체리 향기이지 다른 사람의 체리 향기는 될 수 없다고 시인이 냉정하게 말합니다. 그런 것도 같네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그런 건 정말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지 알 수 있지 않나요? 술을 홀짝이며 홍상수 영화에서처럼 따져봅니다. 편지가 날아갑니다. 언젠가는 어딘가 도착할지도요.
임지은 저|민음사
제목부터 남다른 임지은 시인의 시집입니다. 이 시집이 발간되기 직전에 시인이 SNS에 손수 만들어 올린 출간 예고 영상이 기억납니다. 영상 속에 등장한 시집을 보고 ‘아, 역시 누워있군’ 생각했던 것 같네요. 이 문장을 쓰는 지금에서야 알아차립니다. 시집은 그냥 어딘가에 평범하게 놓여있었다는 사실을요! 주위를 둘러보니 헉, 누워있는 시집들이 너무 많습니다. 얘들을 다 어떡하지…… 이렇게 임지은 시인의 마수(?)에 걸려들고 만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눈 뜨고 코 베이는 이 느낌이 반갑습니다.
오늘 산 책을 차곡차곡 쌓으면 오늘의 산책이 된다
납작 구두에 체크무늬 옷을 입었음
초록 고양이를 보았음
따라온 귀신을
읽었음
반복하는 인간은
아주 멀리서 보면 커다란 체크무늬 같다
(「산 책」, 『이 시는 누워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40쪽)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잘 안다고 생각하던 사물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줄 알면서 오늘도 살고 있습니다. 웃으며 읽고 나면 느껴지는 옅은 비애감 때문에 더욱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지일 저|문학과지성사
만취한 사람에게 시집을 권하기가 시인에겐 실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 시집들이 무척이나 제정신인 책들이라는 점을 한번 강조해야겠습니다. 박지일 시인의 첫 시집인 『립싱크 하이웨이』를 마지막에 추천하는 이유는, 현실과 시의 변주를 능란하게 운용하는 시집의 흐름이 자유롭고 거침없기 때문입니다. 숙취에 시달리며 머리맡의 이 시집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을 다음날까지 고려한 선택입니다. 그게 꿈이었나, 시였나? 만약 꿈이라면, 아주 터프하고 환상적인 꿈이었을 거예요.
달걀을 주세요. 상하지 않는 흰 달걀을요. 대문 두드리는 어린아이 K의 뒷모습과
문 열고 나오는
원시인 원숭이, 한국인과 모닥불. 사랑하는 팔짱 끼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거실을 모닥불 주위를 가로등 아래를
현관 너머와 팔짱 낀 둘의 주위까지 돌면서
눈빛은 쏘아진 탄환
우리 입 맞추며 눈 감는 습관이 있죠
눈빛은 쏘아진 탄환
돌림노래 반복하면서. 그가 나를 내가 그를
놓치지 않으면서. 지우면서. 눈동자, 동굴과 거리와 야자수. 따뜻한 집. 흰 달걀 하나.
(「휴일」, 『립싱크 하이웨이』,101-102쪽)
*필자 | 임유영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
추천 기사
8,100원(10% + 1%)
9,000원(10% + 1%)
10,800원(10% + 5%)
8,000원(0% + 5%)
8,400원(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