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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가을에 읽기 좋은 시집 세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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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지만 걷기 좋은 계절 가을이 왔어요. 익숙한 듯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시집 세 권.

가을엔 떠나려고 해

길고 달콤했던 추석 연휴를 지나자 유독 드세었던 올여름의 열기가 한풀 꺾였습니다. 명절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셨나요? 새삼스레 모였다가 자연스레 흩어지셨나요? 기온이 내려가니 조금은 쓸쓸하지만, 이제 더 많이 걸어도 좋은 계절입니다. 뚜벅뚜벅, 혼자서도 여기저기 잘 다니는 시집 세 권을 소개합니다.

『여수』

서효인 | 문학과지성사

서효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입니다. 시집 제목이 간결히 보여주듯 책 속 대부분의 시들 제목이 지명입니다. 여수, 남해, 분당, 철원…… 얼핏 장소 이야기를 하는가 싶지만 읽다 보면 우리가 한번은 겪어 보았음직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시인이 수많은 장소에서 찾는 것은, 우리가 모른 척하며 지나온 기억들과 일상 속의 놀랍고 무섭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입니다. 폭력에 대해, 그 이후에도 무심하게 발견되는 잔해의 섬뜩함을 시인은 특유의 에너지로 그려냅니다.


동창과 이 남자는 학교 뒷골목에서 담배 한 개비 나눠 피우다 걸려 필터처럼 잘근잘근 맞은 적이 있다. 아이는 겁먹은 두꺼비처럼 엎드려 매를 기다리던 친구의 얼굴을 닮았다. 절과 절 사이에, 자동차 가격과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던 이 남자는 그 어떤 것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자는 멍하게 종이컵을 바라본다. 동창은 자살했다. 자살하는 얼굴 또한 눈이 두개, 코가 하나, 입이 하나. 5만 원? 10만 원? 지금 마른세수를 하면서 제 얼굴을 할퀴는 이 남자는 한때 친구가 있었다. 흡연실에는 자살한 친구와 친구의 아들이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낄낄 웃는다. 없는 얼굴처럼. 동창이 어깨에 팔을 얹고 씩 웃는다. 이 남자는 친구 따라 분당으로, 곧. 

(「분당」, 『여수』 pp.62-63)


시인은 능숙한 칼잡이처럼 생활의 포를 떠서 접시 위에 올려두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밉니다. 당신도 기억하지? 물으면서요. 제 상상이 좀 험악한가요? 하지만 표제작 「여수」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사랑 시입니다.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여수」, 『여수』, p. 10)


서효인 시인의 고유한 리듬을 음미하며 읽으면 더욱 즐거울 것 같습니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

최정례 | 창비

오래전 시인의 육성을 처음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최정례 시인의 또박또박한 발음과 쨍쨍한 목소리는 제가 여태 알던 시인의 것과는 달랐거든요. 이 시집의 제목도 그렇습니다. 개천, 용, 홈타운 같은 단어들은 너무 세속적이라 제목으로 쉽게 쓰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용기와 배짱이 시 쓰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이 시집을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내 숨소리에 놀라 깨는 적이 있다. 내 정신이 다른 육체와 손잡고 가다가 문득 손 놓아버리는 거기. 너무나 낯설어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코를 골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 p. 40)


혹시 기억 못해요? 누구신지? 재인이 아니야? 아닌데요. 분명 재인이 맞는데. 아니라니까요. 그럴 리 없어. 왜 이러세요, 아니라는데. 그는 조금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모습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무릎 위에 꼭 쥔 주먹이 분명 그의 손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갑자기 비둘기가 날았다. 그의 어깻죽지에서 솟았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가 왜 자기 이름까지 잊고 있는지, 왜 자신이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꽝 소리가 났는데 세상은 멀쩡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며 이름까지 잊고 있었다.

(「흔들렸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 pp.96-97)


시의 배경은 주로 서울과 경기도인 듯한데, 시인의 상상 속에서 우리가 사는 도시와 끝없는 모래사막은 같은 무게를 갖나 봅니다. 엉뚱한 문을 활짝 열어주는 시인을 따라 멀리, 아니 가까이, 한번 떠나볼까요. 산문시가 어렵고 낯선 독자들에게는 조재룡 평론가의 해설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생명력 전개』

임승유 | 문학동네

세 번째 소개할 시집은 올해 나온 신간입니다. 역시 지명을 제목으로 삼은 시 「여주」에서 시인은 어떻게 여주로 가는지 볼까요.


여주 가기 전에는 여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여주를 상상했다. 여주를 상상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여주의 입구에서부터 여주의 안쪽으로 천천히 걷는 것. 아, 어서 와요. 오래 기다렸어요. 어디까지나 상상이므로 새가 인사하도록 둬도 된다. ()

(「여주」, 『생명력 전개』 p.22)


낯선 도시에 가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상 속 도시에 가면 새가 인사도 해주고 누군가의 정원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다정하게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담배도 한 대 피우고요, 길을 더 가야 하니까 다시 생각을 시작하네요.


자, 이제 뭐부터 시작할까

 

생각에 잠기면

 

오후에 모이기로 한 연재와 지수와 은성이가 하나둘 손을 흔들며 여주로 들어온다. 여주에 가기로 마음먹고 여주를 기다려 기어이 여주에 다다르게 된 사람들로서

 

우리는 웃는다. 어서 와요.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마치 웃음이 묻어나게 웃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 같다.

(「여주」, 『생명력 전개』 pp.22-23)


일행은 모두 순조롭게 여주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웃음이 묻어나게 웃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처럼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네요. 그건 너무 평범하고 현실적인 모습이라 이 시 속에서는 되려 이상하게 보입니다. 상상 속 여주에서는 새가 사람 말을 하고 의자가 웃는다고 했는데요. 상상 속에서도 시인은 관례적이고 수사적인 행동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형식과 규율의 수행을 찬찬히 관찰하는 중입니다.


그녀는 허기진 상태라서 이 문장이 끝나기 전에 전분이 빠진 감자채에 소금과 튀김가루 약간을 섞어 기름에 부치기 위해 일어나 부엌으로 가야 한다. 

(「감자 양식」, 『생명력 전개』 p.25)


제가 이 시집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시가 자주 부엌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엌과 이 감자는 정말로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함께 찾으러 가봅시다.


*필자 | 임유영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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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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