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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칼럼] 나는 나라기엔 몹시 마른 상태였다
김선오의 시와 농담 8편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인과와 무관하게 머릿속 이곳저곳에서 출몰하고 우리는 종종 출몰한 이미지를 언어로써 붙잡으려 하지만 그것은 붙잡히지 않거나 잠시 붙잡혔다가도 어깨를 비틀며 빠져나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2024.06.27)
어떤 사물을 본다고 치자. 그 사물이 우연히 한 명의 인간이라면 그는 걷고 말하며 스스로의 움직임을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를 만들어낼 것이다. 발생된 이미지와 사운드는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머릿속에 기입되어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재생된다. 그와 닮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 그와 비슷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인과와 무관하게 머릿속 이곳저곳에서 출몰하고 우리는 종종 출몰한 이미지를 언어로써 붙잡으려 하지만 그것은 붙잡히지 않거나 잠시 붙잡혔다가도 어깨를 비틀며 빠져나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이미지가 도망 다닌다는 것은 그것을 붙잡으려는 의지와 의지를 촉발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말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도무지 붙잡히지 않는 이미지란 그것을 포획하려는 언어적 의지의 선험적 존재를 지시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별세계』에 등장하는 김유림은 김유림이라기에 너무 김유림이거나 다소 김유림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책 표지에 ‘김유림 시집’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책 본문에 불쑥불쑥 등장하는 김유림을 독자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하고 싶다는 욕구가 든다. 이 욕구는 다음 문장에 의해 지연되고 지연되다가 머지않아 김유림이 ‘글쓴이 김유림’이라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옅게 발라져 있는 김유림이라는 글자 혹은 김유림이라는 글자가 남기고 간 인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된다. 책 속에서 김유림은 김유림이라기에 조금 희박하다. 우리가 본 것이 김유림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김유림이라는 글자이기 때문인데 이 글자는 문장을 통해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미지와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글자도 이런 짓을 한다. 『별세계』에서 글자들은 종종 바라봄의 대상으로서 사물 혹은 풍경이 되는데, 글자를 글자로서라면 익숙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사물 혹은 풍경으로서의 글자는 상당히 낯선 얼굴처럼 느껴진다. 『별세계』는 이 생경한 얼굴들이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며 나를 환영하거나 때로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치는 세계다. 이 얼굴들이 만드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조심스럽게 또 거칠게 따라가며 읽는 일은 『별세계』를 즐기는 나의 방식이었다.
가구점에는 오래된 소파가 여러 개 있다. 스툴이
하나 있을지도.
테이블이 있을지도.
이 가구점에 대해 쓸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김유림은 걸었고 보았다 건물을 보았다 크고 납작하고 기둥에 의해 공중에 들어 올려져 있다 푸른색으로 건물은 건물과 가까워 보인다 인적 없는 이베리아반도의 오후에
푸른색
전면에 드러난 무정한 건물
말라가에서 만난 인간은 마르고 길쭉했으며 피어싱을 스무 개 이상 단 채로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나는 인간만 기억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길이란 길에는 예외 없이 인간이 있었다 영국인은 나 몰래 마리화나를 피웠는데 그래서 나에게 친절할 수 있었다 좋은 행운Good Luck이라고 말하고 사라진 인간은 내 애인이 아니고 그러나 내 애인이라도 해주고 싶은 말인 것 같다고 뒤늦게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갔을까.
스페인 국적 비애자 훌리오는 마드리드 중심부에 위치한 건물 바닥을 매일 비질했다. 빗자루라면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어를 못한다고 해서 한국인이 아닌 건 아니다.
나는 나라기엔 몹시 마른 상태였다.
- 김유림, 「가구점」 전문
『별세계』의 목차는 같은 제목을 지닌 두 편의 시들이 연속적으로 나열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닌 시들도 있다) 따라 읽으며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떠올렸는데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어떤 의미에서 1부와 2부로 분절된 하나의 영화이고, 그러나 1부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면, 사건과 서사가 2부에도 존재하고, 동시에 그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한 곤란함 속에 우리를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선형적 매체 안에서 1부-2부의 순서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관람하게 되지만 1부-2부 중 어떤 것이 앞선 사건인지, 혹은 선행한다는 것이 정말로 실재하는 관념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곤란해진다. 이 곤란함은 그것에 관해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기쁜 곤란함이다.
완전히 일치한다고도,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없는 두 세계가 나란히 놓여서 이루는 공간. 이 공간은 양방향으로 개방되어 있어 우리를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존재하게 하기에 편안하고 무정형이기에 자연스럽다. 형태가 또 다른 형태와 얽히고설키지만 방향을 만들지 않는 총체적인 풍경이 언어의 형식을 통해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별세계’라 부를 수 있을까. 『별세계』 시인의 말 「문 열기」의 마지막 문장이 느슨한 대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신이 이 시집을 읽다 보면, 어떤 문형이 눈에 띌지도 모른다.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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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김유림> 저9,900원(10% + 1%)
정교한 언어로 그려낸 시의 건축 도면 첨단의 감각, 김유림이 쌓아올리는 우리의 또 다른 세계 동시대 단연 돋보이는 세련된 어법으로 시를 능숙하게 구성한다는 평을 받으며 주목받아온 김유림의 세번째 시집 『별세계』가 [창비시선] 494로 출간됐다. 시인은 2016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