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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칼럼] 밟지 않고 지나간 현재라고 해야 할지
김선오의 시와 농담 6편
문보영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거짓말이 데려오는 미래가 훨씬 더 보드랍고 안전하다는 것을. 또 시인들은…… 언제나 당연히 사기꾼이라는 것을. (2024.05.16)
지난겨울 문보영, 김리윤 시인과 나, 이렇게 셋이 함께 강단에 서는 ‘낙서 수업’을 진행했다. 매주 궁금했던 책을 읽고 낙서한 뒤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사실 수업을 핑계로 우리끼리 문학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어서 판을 벌인 것이었는데 다정한 마음으로 함께해주신 수강생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낙서 수업의 특이점은 과제를 선생들이 해온다는 것이다. 수강생들에게도 과제가 주어지지만 수행 여부는 선택이다. 다만 선생들은 의무적으로 과제를 해 와야 한다. 그래야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 셋은 언제부턴가 읽어오기로 한 책 이야기는 대충 넘어가고 과제로 써온 각자의 시를 낭독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서로의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에 질문이 늘고, 할 말이 늘고 그랬다.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고 그만큼 다른 시를 쓰는 사람들이어서 서로를 ‘캐해’하면서 놀려먹기만 해도 시간이 잘 갔다.
내가 가장 재미있어 했던 것은 문보영 시인의 낭독 스타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쓴 시를 읽으면서도 툭 하면 틀렸다. (김리윤 시인과 나는 한 편을 낭독하는 동안 거의 한 음절도 틀리지 않는다) 더 웃긴 것은 틀리고 난 뒤에 틀린 문장을 새롭게 고쳐 읽는 것이다. ‘했다’를 ‘한다’라고 고쳐 읽거나, ‘잠시’를 ‘잠깐’으로 고쳐 읽는 등…… 거의 읽으면서 퇴고를 하고 있었다. 나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저거 봐라, 문보영 또 퇴고 낭독한다……
4주 간의 수업 동안 그의 퇴고 낭독을 유심히 들으며 깨달았다. 문보영 시들의 멋진 점은 그의 시 혹은 시를 구성하는 서사의 원형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문보영의 머릿속? 혹은 백지 위?) 그렇기에 시의 일부분이 변해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옷을 입든 잘 어울리는 선명한 얼굴을 지닌 사람처럼, 문보영 시인의 시들은 조금 다른 문장으로 교체된다 해도 쉽게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시를 읽을 때 독자인 나를 휘청거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신뢰하도록 하는 알 수 없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능청스럽게 퇴고 낭독을 하는 모습에서 유추 가능하듯이 문보영 시인은 스스로를 자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그가 치는 사기(?)는 언제나 더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거짓말이거나 진실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혹은 진실의 포악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거짓말이라서 늘 기묘한 감동을 준다. 그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거짓말이 데려오는 미래가 훨씬 더 보드랍고 안전하다는 것을. 또 시인들은…… 언제나 당연히 사기꾼이라는 것을. 아래는 그의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들 중 한 편이다.
계산을 하고 집에 가려는데 음식값이 도합 일억 삼천만원이라는 것이다. “네?” 체구가 작고 머리가 곱슬한 캐셔가 계산서를 내 쪽으로 건네며 말했다. “토마토 오믈렛이랑 오렌지주스 주문하신 거 맞으시죠?” “맞아요.” “일억 삼천만원 맞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캐셔는 두 손을 공손히 포개고, 혹시 식당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마치 예민한 주제인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식당에 처음 와보냐니. 그럼 내가 평생 집구석에서 밥을 먹었단 말인가. 그런데 집이 아닌 곳에서 식사를 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캐셔는 내 두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손님들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그리고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며 힐끔거렸다. 나는 일단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캐셔는 더 깍듯해져서는 카운터의 작은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려 “이 테이블은 이천백칠십만원, 이 테이블은 칠억 사천만원, 이 테이블은 팔백삼십이만원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계산대 구석에 놓인 메뉴판을 펼쳐 내가 주문한 음식과 가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토마토 오믈렛은 만이천원, 오렌지주스는 삼천원이네요.” 캐셔는 어린아이를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런 취급이 싫지 않았고 심지어 보호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네, 맞아요. 다만, 손님. 그런 계산은 과거의 유산과 같아서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게산하지 않는답니다. 손님은 토마토 오믈렛과 오렌지주스를 주문하셨어요. 그런데 그 대신 바질 스파게티를 주문할 수도 있었죠. 아니면 크림 리소토나 루콜라 피자를 주문할 수도 있었고요.” 캐셔는 메뉴판 속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을 하나씩 짚었다. “게다가,” 캐셔가 말을 이었다.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었겠죠. 그곳에서 아보카도 샌드위치나 옥수수 수프를 주문할 수도 있었어요. 그것들은 우리 식당에서 팔지 않는 음식이죠. 경우의 수는 늘어나는 나뭇가지처럼 무수해요. 수백억, 수천억 개의 별이 모여 은하가 되는 것처럼요. 그렇게 가능성은 흘러가는 강의 모양이 되지요. 식당은 당신이 가지 않은 길을 음식값에 반영해요.” “와우!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어요.” 나는 나무 손잡이를 당겼다. 그때, 캐셔가 내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이 외쳤다. “당신이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있거든.”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박고 흐느끼는 것이다. “젠장. 나는 우는 사람이 싫어.”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캐셔에게 다가갔다. 그때, 식사를 마친 한 부부가 카운터로 오더니 나를 흘끗 보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캐셔는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며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 내민 카드를 받았다. “삼억 사천이백구십만원입니다.” 캐셔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나에게도 들리게 말했다. 그리고 여인의 일행인 나비넥타이를 한 신사는 요즘에도 저런 놈이 있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검은 모자의 여인이 말했다. “당신이 방문하지 않은 그곳을 미래라고 해야 할지 과거라고 해야 할지, 밟지 않고 지나간 현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당신이 주문할 수도 있었을 음식을 차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세상은 노동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해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랍니다. 젊은 친구.” 검은 모자의 여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저들은 자신이 무얼 부담해야 하는지 알면서 음식을 처먹고 있는 거요?” 나는 한쪽 팔꿈치를 카운터에 걸치고 테이블의 손님들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이분 것도 계산해줘요.” 검은 모자의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캐셔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 바람에 나는 한순간에 보잘것없는 지푸라기가 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꼭 싫지만은 않았고 보호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큰돈을 가진 사람들이 식당을 나가고 홀은 고요해졌다. 나는 곰 얼굴이 그려진 내 지갑에서 밥값인 만오천원을 꺼내 캐셔에게 내밀고 말했다. “난 당신과 당신이 하는 일을 용서할 수 없어.” 그러고 이번에는 진짜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황량했다. 눈앞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식당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에 식당은 없어. 사람들은 죄다 집에서 밥을 지어 먹지. 그게 이 세상의 룰이라고.” 나는 내 말을 믿으며 광장을 휙휙 가로질러 집으로 갔다.
- 문보영, 「캐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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