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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날아간다
<아이가 글쓰기를 싫어한다면> 5화
1학년 아이들이 받아쓰기 100점만큼 칭찬받기 좋은 것이 바로 반듯한 글씨체다. 나도 공책에 반듯하게 쓰인 아이의 손글씨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다. (2021.11.09)
한때는 ‘글을 잘 쓴다’는 것이 경필 쓰기 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의 내용은 보지도 않고 글씨체 하나로 이미 그 글에 대한 가치 판단이 끝나기도 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글씨를 너무 못 써서 혼난 경험이 많다. 글씨 못 쓰는 아이들의 필수 코스였던 서예 학원도 다녔다. 누가 내 글씨를 보는 것도 싫었지만 내가 내 글씨를 보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손글씨를 길게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쓰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1학년 아이들은 글자도 배워야 하고, 글씨도 획순에 맞게 잘 써야 하고, 글쓰기도 시작하는 시기다. 아마도 부모님들 마음에는 글자를 배우는 것 안에 이런 것들을 다 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테다. 하지만 아이들마다 다 다르다. 글자를 빨리 익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글씨를 예쁘게 쓰는 아이가 있고, 혼자서는 제대로 쓰지 못하지만 글 내용은 기가 막힌 아이도 있다. 1학년이지만 글을 쓰는 스타일이 다 다르다. 물론 글씨도 예쁘고 글자도 빨리 알고 글쓰기도 쉽게 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다시 말하면 이것들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각 영역에서 배우고 익히는 속도가 아이마다 제각각이다.
1학년 아이들이 받아쓰기 100점만큼 칭찬받기 좋은 것이 바로 반듯한 글씨체다. 나도 공책에 반듯하게 쓰인 아이의 손글씨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다. “와, 글씨 예쁘게 잘 썼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글씨를 반듯하게 쓰라고 강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1학년이 된 아이들이 반듯하게 쓰면서 빠르게 쓰기란 쉽지 않다. 반듯하게 쓰기 위해서는 손에 온 힘을 다 주게 된다. 아직 연필 잡기가 익숙하지 않거나 연필을 잘못 잡는 습관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더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하다 보면 한두 문장 쓰고 지쳐버린다.
아이들이 반듯하게 글씨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부터 무언가를 잡고 쓰기 때문이다. 이제 서너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색연필이든 매직이든 잡고 쓰다 보면 손가락 힘이 없어서 긴 막대기 모양의 필기도구를 자기 편한 대로 잡게 된다. 아직 너무 어려서 제대로 잡는 법을 가르칠 수도 없다. 결국 그대로 두다 보면 연필도 그렇게 잡고 쓰고, 이미 손에 익어서 고치기가 쉽지 않다.
획순도 마찬가지다. 한글의 획순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 때 연달아 쓰기가 쉽다. 물론 연필 잡는 자세와 획순이 글씨를 잘 쓰는 필수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훨씬 쉽게 글씨를 쓰게 해주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글씨마저 예쁘게 쓰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글쓰기 내용의 고민보다 쓰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고 싫어하게 된다. 힘주어 예쁘게 쓰려니 손가락도 아프고 책상에도 오래 앉아 있어야 하니 영 재미가 없다.
박재준
나는 글씨 똑바로 쓰고 싶은데 어렵다.
손가락이 삔 것처럼 아프다.
연필을 바로 잡고 집중해야 잘 쓸 수 있다.
그런데 자꾸 글씨 반듯하게 써라 하면 연필을 집어던지고 대결하고 싶다.
얼마나 아픈지 알아?
재준이는 또래보다 글씨를 빨리 익힌 덕에 글을 쉽게 쓴다. 쓰고 싶은 말은 웬만하면 어렵지 않게 다 쓴다. 그런데 글씨까지 반듯하게 쓰려니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서 손이 아프다. 오죽했으면 글 쓸 때 자꾸 글씨 반듯하게 쓰라고 하면 연필을 집어던지겠다고 표현했을까. 이처럼 글도 잘 쓰고 맞춤법도 다 알고 글씨까지 잘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어느 도시에서 '지렁이 날다'라는 글씨 공모전을 하는 것을 봤다. 개성 있는 어린이 글씨체를 찾는 대회였다. 내 글씨를 보는 사람마다 “지렁이 날아간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이렇게 멋지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반가웠다.
이제 글씨체는 자기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개성이 되고 있다. 지렁이도 날 수 있는 글씨체를 쓰는 아이는 어떤 글을 쓸까? 솔직히 궁서체보다 훨씬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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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25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이 글쓰기 공책에 쓴 이야기를 혼자만 보기 아까워 문집을 만들고 책으로 묶어주는데, 그럼 부모님들이 글을 쓴 아이들보다 책을 만들어준 나를 더 고맙게 생각해주어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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