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미술관 가기 좋은 날 - 진혜련
에세이스트의 하루 16편 – 진혜련
전시를 관람하는데 나는 자꾸 아빠에게 눈길이 갔다. 미술관에서 아빠의 걸음은 나보다 느렸다.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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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 책을 보고 김종영미술관에 아이와 다시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을 운전해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긴장과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차를 얻어타고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저희랑 미술관 갈래요?”
우리는 평창동에 있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친정 부모님은 여행지에서 여행코스로 미술관을 가볍게 둘러본 적은 있지만 오로지 전시 관람을 목적으로 미술관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미술관 문을 밀고 들어가는 부모님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다. 나는 그때서야 두 분이 미술관을 지루해하시진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내 걱정과는 달리 미술관에 들어서자 부모님은 작가의 연표와 작품 설명도 꼼꼼히 읽으시고, 작품 앞에서 고개를 쭉 빼며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셨다. 나는 평소 트로트와 등산을 즐기시던 부모님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된 것이 반가워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전시를 관람하는데 나는 자꾸 아빠에게 눈길이 갔다. 미술관에서 아빠의 걸음은 나보다 느렸다. 아빠는 작품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바라보셨다. 작품 앞에 오래 머물러 계시는 모습이 어쩐지 조금 뭉클했다. 아빠는 한 작품 앞에서 아이를 불렀다.
“이거 봐봐. 이건 할아버지가 태어난 해에 그려진 그림이다. 할아버지가 1956년에 태어났거든.”
“네? 1956년이요? 그때도 물감 있었어요?”
아빠는 아이의 엉뚱한 질문에 웃으시고는 그림을 한참 바라보셨다. 나는 지나쳐 왔던 그림을 다시 가서 보았다. 60년이 훌쩍 넘은 그림은 분홍빛 나무와 파란 하늘이 그려진 수채화로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화사하고 투명한 빛깔로 칠해져 있었다. 그림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림을 보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고 빽빽했던 머리는 많이 빠져있었고, 얼굴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고 수려했던 아빠가 어느새 이렇게 변했는지. 나는 얼른 그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빠는 목련의 겨울눈처럼 보이는 조각 작품 앞에서 엄마를 불렀다.
“여보, 이리 와 봐요. 옛날에 내가 모았던 수석 중에 이거랑 비슷한 게 있었잖아. 어디 보자. 1981년. 이거 우리가 결혼했을 때 만들어진 거네.”
아빠는 작품 캡션에서 유독 제작연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셨다. 아빠의 작품 감상법은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작품을 보며 세월을 되돌아보는 모습이었다. 지나간 시간과 기억을 액자 안에 담아 보는 듯했다.
아빠는 오래 몸담았던 직장에서 40년 가까이 일하시고 얼마 전 퇴직하셨다. 항상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시던 아빠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집에 계시는 모습은 낯설었다. 아빠는 다음 달 생일이 지나면 전철을 무료로 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빠가 경로우대 혜택을 받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빠는 전시실 안쪽 벽면에 걸린 대형 작품으로 갔다. 푸르른 산 위에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작품을 오래 바라보시더니 작품 앞에 놓인 원목 스툴 의자에 작품을 배경으로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열심히 달려온 인생, 나 이제 좀 쉬어도 되겠습니까?’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커다란 산은 아빠를 품어주며 대답하는 듯했다.
‘그럼. 그동안 수고 많았네.’
그림 속 환한 보름달이 아빠를 비추고 있었다. 아빠가 그 자리에 앉아서 작품이 완성된 느낌이었다.
전시를 다 본 후 우리는 미술관 정원으로 나가 탁자에 둘러앉았다. 부모님은 미술관 주위의 북한산 자락과 마을 풍경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여기가 공짜라고? 좋다. 앞으로 전철 타고 다니면서 이런 데 구경 다니면 되겠네. 여보, 우리 그러자고요.”
“좋지!”
아빠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빠가 그림 속에 담아 보던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듣고 싶었다. 오늘은 미술관 가기 좋은 날이었다.
*진혜련 ‘나아지는 것’ 그리고 ‘계속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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