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없는 아리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K.488, 2악장 ‘아다지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아름다운 악장으로 꼽히는 23번, 2악장을 소개합니다. (2021.06.24)
천국에는 바흐나 베토벤이 아닌 모차르트의 음악이 연주될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차르트 음악은 사랑스럽습니다. 단순하지만 온갖 정감을 담아내기에 충분한 선율과 균형 잡힌 형식미는 불안정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지요. 이번 일요일의 음악실에서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아름다운 악장으로 꼽히는 23번, 2악장을 소개합니다.
협주곡은 관현악단에 독주 악기가 첨가되어 대등하게 연주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피아노 협주곡은 독주 악기가 피아노라는 뜻이지요. 음량이나 연주자 수를 볼 때, 관현악단과 독주자가 대등하게 연주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겠지만, 음악에서는 가능합니다. 물리적 힘의 세계를 넘어서는 음악만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고전 시대 협주곡은 총 3악장으로 구성되는데, 1악장은 소나타-알레그로 형식(제시부-발전부-재현부) 안에서 관현악과 독주 악기가 각 주제를 번갈아 반복해 연주하는 방법으로 소리의 균형을 맞춥니다. 2악장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진 느린 악장이고 3악장은 빠르고 흥겨운 악장으로, 빠르고(1악장)-느리고(2악장)-빠른(3악장) 세 악장으로 작품이 완성됩니다. 관현악단과 독주 악기가 음악 안에서 만나고, 대치하고, 대화를 나누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조와 음향 조합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소리와 농도를 표현하는 협주곡이 가진 강력한 힘입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이 특히 아름답다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한 재료로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감정을 협주곡의 다양한 색채로 섬세하게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K.492>과 같은 해인 1786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마치 오페라 아리아를 기악 작품으로 옮긴 듯, 단어 하나 사용하지 않고 사랑과 절망을 노래합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엘렌 그리모 피아노, 라도슬라프 슈출크 지휘, 바바리안 라디오 챔버 오케스트라 연주
피아노 독주로 2악장이 시작되면 단순한 왼손 화성 반주 위로 오른손 선율이 시칠리아노 리듬으로 유려하게 펼쳐집니다. 요람처럼 반복해 흔들리는 시칠리아노 리듬은 6/8박자처럼, 한 박을 셋으로 쪼개는 삼분박에서 쓰이는 독특한 리듬 형태입니다. 유연한 선율이 부드럽게 리듬을 타고 넘기에 적당해 작곡가가 서정적이고 평온하면서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낼 때 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리듬이기도 합니다.
시작하는 소절이 모차르트 협주곡 2악장과 너무나 닮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트라베소와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BWV 1031)’ 2악장을 들어 보세요. 동일한 시칠리아노 리듬으로 바흐는 물이 흐르듯 자연에 가까운 담백한 음악을 들려주고, 모차르트는 협주곡 특성을 살려 다양한 방법으로 선율이 가진 깊은 우수를 표현했답니다.
바흐 ‘트라베소와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BWV1031)’ 2악장, J.A. 브레슈 트라베소, B.J. 스틴스 클라비코드 연주
피아노의 오른손 선율은6도 음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채우며 아련함을 강조합니다. 모차르트는 누군가를 부르는 느낌을 주는 6도 음정 사이에 여러가지 장식음을 사용해 수를 놓을 뿐 아니라 6도보다 더 큰 음정인 7도로 음을 뚝 떨어뜨려 꾸밈음으로 곱게 채웠던 마음을 바닥으로 툭 떨어뜨리기도 하지요.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를 다른 악기가 화답하듯 엇갈려서 반복할 때, 2악장이 가진 우울함은 더욱 강조됩니다. 선율을 쌓아 올리는 대위법을 통해 감정이 중첩되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자리에 올 화성을 늦추고, 화성을 비껴가는 음으로 머뭇거리는 선율은 듣는 이의 마음에 해결을 향한 갈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피아노와 관현악이 같은 주제를 노래할 때, 전혀 다른 음향으로 같은 정서를 경험하는 것 또한 협주곡의 매력입니다. 간결하고 진하게 감정을 노래했던 피아노 선율이 다른 악기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음향으로 끝없이 확장될 때, 우리는 귀에 향유를 부은 듯한 충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2악장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들어 보세요. 피아노뿐 아니라 다른 악기에서도 등장하는 반복음과 스타카토(짧게 끊어서 연주하는 주법)는 닫혀버린 문을 노크하듯 듣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고, 피치카토(현을 활이 아닌 손으로 뜯어서 연주하는 기법)로 연주하는 현악기는 무성음과 유성음의 경계에서 피아노 선율을 반주하며 쓸쓸함을 더한답니다.
모차르트는 소나타 형식을 확립한 작곡가로, 기악 음악이 고유 형식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발전시키는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대조와 조화를 통해 균형을 이루며 발전될 때, 듣는 이는 가사가 없어도 음악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지시대상이 없는 추상적 음악을 통해 바깥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을 살피면서요. 23번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들으며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단조 선율 때문일 수도, 아련한 시칠리아노 리듬 때문인지도, 아니면 무언가를 떠나보낸 자신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김진영은 『이별의 푸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기다리지도, 한탄하지도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주문을 외우지도 않는다. 그건 모두 이별을 재회로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재회는 없다. 당신의 부재가 두 번 다시 당신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부재 속에서 재회를 꿈꿀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당신의 부재 공간을 떠날 수도 없다. 때문에 나는 차라리 당신의 부재를 인정한다. 그 부재의 자리에 스스로 붙박인다. 그러면 돌아오는 당신이 아니라 떠나는 당신이 또렷이 보인다. 당신은 점점 더 멀리 떠나가고, 멀어지면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당신은 사라지면서 대기가 된다. 나는 숨을 쉬고 그 대기를 마신다. 당신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알게 된다. 왜 돌멩이에도 뿌리가 생기는지, 왜 돌멩이도 광합성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를.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당신이 멀리 있으면, 당신의 모습은 점점 더 커져서, 온 우주를 다 채운다. 대기가 되어 내 몸을 가득 채운다.” 」
‘부재’와 ‘채워짐’을 동시에 불러오는 2악장을 들으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면, 이제는 1악장부터 차례대로 들으며 사랑스럽고 행복한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길 때입니다. 천재 작곡가 우리에게 선사한 공간에서 음악으로 채워지고 비워지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음악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삶이 만만치 않게 느껴질수록 더 큰 슬픔과 환희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협주곡 23번 전악장, 미츠코 우치다 피아노, 제프리 테이트 지휘,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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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