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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여성과 흑인과 소년·소녀가 일굴 미국의 미래
안젤리나 졸리, 소방대원으로 돌아오다
미국은 테일러 쉐리단 감독이 바라는 것처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미국이 되지 않을까. 그의 차기작은 어떤 형태가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2021.05.20)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종종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들)의 정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백인 남성이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영웅의 지위를 획득하는 게 절대적인 상황에 맞서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최근 들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할리우드는 그에 발맞춰 다인종 히어로를 선보이기도, 다문화에 대한 문호를 넓히기도 하는 등 부응하는 행보를 보인다. 제목부터 죽고 죽이는 자(들)의 정체를 궁금하게 하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또한 그의 맥락에서 읽을 때 의미가 풍부해지는 작품이다.
한나(안젤리나 졸리)는 소방대원이다. 지금은 감시탑에 배정되어 인근 산에 불이 나는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종의 좌천이다. 한나는 화재 현장에서 동료들이냐, 아이들이냐, 선택하지 못해 모두 사망에 이르게 한 죄책감으로 몇 년째 아픈 기억을 떨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의 이유로 감시탑에서 느슨한 업무를 이어가던 한나는 인적 드문 산속을 헤매는 소년 코너(핀 리틀)를 만난다. 코너의 설명에 따르면, 두 명의 킬러가 아버지를 죽인 후 자신도 쫓는 중이라는데 상황이 심각해 보인다.
감시탑에서 코너를 보호하던 중 한나는 두 명의 킬러가 경찰 에단(존 번탈)을 인질로 삼아 인근에 접근하는 걸 발견한다. 과거 연인 사이였던 에단과는 헤어져 불편한 관계이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지금은 그런 사적인 감정을 따질 새가 없다. 에단의 엄호로 감시탑에서 탈출한 한나와 코너는 산을 가로질러 도망갈 생각이다. 하지만 코너를 잡겠다고 킬러들이 산에 불을 내면서 빠져나갈 길이 막힌 한나와 코너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한나는 일부러 인질로 잡혀 코너가 목숨을 구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약한 코너는 한나를 버리지 못한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테일러 쉐리단 감독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와 <로스트 인 더스트>(2016)의 각본, <윈드 리버>(2017)의 각본과 연출로 이름을 알렸다. 언급한 세 편의 영화는 테일러 쉐리단 본인이 의미를 부여하기를 ‘서부 몰락 삼부작’이었다. 각각 황량한 대지, 모두가 떠난 서부,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통해 피로 물든 미국의 역사와 현재를 은유하면서 더는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미국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서부 몰락 삼부작 이후 테일러 쉐리단의 첫 번째 작품으로 미국이 재건하기 위한 조건을 유추할 수 있는 설정과 메시지를 폐허가 된 땅 위에 씨앗처럼 심었다. 결론부터 말해, 살아남는 자들은 ‘여성’ 한나와 에단의 ‘흑인’ 아내 앨리슨(메디나 생고르)과 ‘소년’ 코너다. 소수자이자 약자인 이들이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미국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던 백인 남성 잭(에이단 길렌)과 패트릭(니콜라스 홀트)이다. 죄의 흔적을 지우려고 남을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잭과 패트릭의 설정에서 테일러 쉐리단이 백인 남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난다.
과거의 할리우드 영화의 전개라면 백인 경찰 에단이 한나와 앨리슨과 코너를 보호하겠다고 잭과 패트릭에게 맞서 영웅의 지위를 획득하는 게 일종의 공식이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에서는 한나와 앨리슨과 코너가 무기력하게 도망치거나 죽는 게 아니라 희생을 자처하며 뒤로 물러난 에단을 대신하여 잭과 패트릭의 악행을 저지하고 존재를 지워버린다. 단독으로 힘을 과시했던 과거의 백인 남성 영웅과 다르게 한나와 앨리슨과 코너가 각자 역할을 정해 연대의 형태로 잭과 패트릭을 제거한다는 결말의 설정은 특기할 만하다.
테일러 쉐리단 작품에서 황야, 서부, 설원, 그리고 울창한 숲과 같은 배경은 일종의 미국 신화의 공간이다. 서부 몰락 삼부작의 공간은 피로 물씬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의 숲은 산불로 완전히 불에 타 폐허가 되어버렸다. 앞선 세 작품의 몰락과 다른 의미라면 ‘새로운 시작’이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의 엔딩은 재만 남은 땅 위에서 복구를 위한 작업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바로 한나와 코너와 앨리슨과 앨리슨의 배 속에 있는 딸이다.
한나와 앨리슨이 보호할 코너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다양성의 시선을 가진 백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한나와 앨리슨이 에단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지 않고 연대한 것처럼 코너 또한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앨리슨의 딸과 손을 잡고 더 좋은 미국을 건설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미국은 테일러 쉐리단 감독이 바라는 것처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미국이 되지 않을까. 서부 몰락 삼부작에 더해 미국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에 이은 테일러 쉐리단의 차기작은 어떤 형태가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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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