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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4월 우수상 - 쪽 찐 머리처럼 단단하게

내 인생의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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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는 할머니의 쪽 찐 머리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할머니 댁에 갈 때면 머리 빗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곤 했다. (2021.04.06)

언스플래쉬

할머니는 아침마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곱게 펴진 머리카락 위로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쓸어내리기를 반복하면 쪽머리를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이 얼추 마무리된다. 손으로 잘 움켜쥔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말아 그 사이에 손가락 길이만 한 은비녀를 꽂으면 할머니의 아침 단장이 끝난다.

어린 나는 할머니의 쪽 찐 머리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할머니 댁에 갈 때면 머리 빗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곤 했다. 시골에는 뽀글뽀글한 일명 할머니 파마를 한 어르신이 대부분이라 뒤에서 보면 모두 쌍둥이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할머니의 쪽 찐 머리는 단연 눈에 띄었다. 어린 내 눈에도 할머니의 머리는 참 고와 보였다. 그래서 나도 할머니가 되면 파마머리보다는 쪽 찐 머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단장을 마친 할머니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하루를 시작했다. 산에서 고사리를 꺾고, 대나무밭에서 죽순을 캐고, 작물을 키워 수확한 후 말리는 모든 일을 할머니는 혼자 힘으로 해냈다. 말리고 손질한 먹거리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져 자식들의 밥상 위에 올랐다. 흐트러짐 없는 할머니의 쪽 찐 머리처럼 단단하게 묶인 분홍 보자기 안에 가득 들어있던 먹거리들은 1년 내내 양념과 반찬이 되어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난 덕분에 할머니가 보낸 먹거리들을 공으로 먹으며 자랐다. 참기름, 고춧가루, 깨소금, 결명자, 갖가지 콩과 말린 나물까지.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 덥석덥석 받아먹기만 했다. 결혼하고 마트에서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사다 먹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맛있고 좋은 것들이었는지, 할머니의 자식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여든을 넘기고도 같이 살자는 자식들의 청을 거절하며 혼자 살기를 고수하는 할머니는 강단 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어른이었다.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생채기를 낼까 봐 좋은 말이건 싫은 말이건 되도록 짧게 하셨고, 눈이 잘 보이고 걸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고마운 일이라며 항상 감사함 속에서 사셨다. 젊은 나이에 홀로되어 고생 속에 자식들을 키웠지만, 장난으로라도 생색내는 말은 하지 않으셨고, 괜한 앓는 소리로 자식들을 걱정시키는 것도 보지 못했다. 내가 할머니의 쪽 찐 머리를 좋아했던 건 할머니의 성품처럼 정갈하고 단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 일이 잘되면 공을 가로채고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부하직원들에게 미루는 직장 상사를 만나기도 했고, 자신이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생떼를 쓰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가깝게 지냈던 사람 중에는 친구라는 가면 뒤에 숨어 상대를 이용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성인이 된 지 오래지만 유치하고 비겁한 감정 다툼을 계속하는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사람 사귀는 일은 조심스러워졌고, 사람을 대하느라 지칠 때가 많았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돈이 많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집을 가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내가 내린 수많은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온전히 책임질 줄 알아야 하고, 내가 나를 먹여 살리고 키워내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어야 했다. 그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감정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몸을 움직이고, 정직하게 돈을 벌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자신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던 할머니의 강인함이 새삼 존경스럽고 부럽기까지 했다.

게임으로 보자면 나는 초급자 단계를 밟고 있는데 할머니는 최고 레벨을 찍은 듯해 감히 따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뒤따르고 싶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지표로 삼을 할머니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는봄 말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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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는봄 (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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