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4월 대상 - 롤모델, 꼭 있어야 하나요?
내 인생의 롤모델
이제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것도,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는 것도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2021.04.06)
"회사 다니면서 제일 씁쓸한 게 뭐였는지 알아? 롤모델이 없다는 거야. 아등바등 열심히 해봤자 저 사람들처럼 되겠구나 싶은 거지. 멋없이 나이 드는 일만 남은 것 같더라."
회사를 떠나며 동기가 남긴 말이었다. 나도 매일 같은 생각을 했다. 실망에 예외는 없었다. 처음부터 실망하거나 기대에 배신당하듯 실망했다. 롤모델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나를 더욱 실망시켰다. 실망이 반복되자 기대를 거두기 시작했다. 회사와 동료로부터 거리를 두고 <NO 기대, NO 실망>을 모토로 삼았다. 내 일이나 똑바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마음의 거리를 두며 한동안 크게 동요하지 않고 회사를 다녔다. 문제는 후배가 생기고부터였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상적인 선배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기대와 실망을 했다는 건 그 대상에게 바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니까. "선배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지. 감정을 숨길 줄도 알아야지."라며 바람직한 선배의 기준을 세워뒀는데 선배가 되어보니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었다.
회사에는 롤모델 따위를 찾으면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어놓고는 정작 후배들에게 ‘저 선배가 내 롤모델이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선배인 척 행동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어려워하는 일이 있으면 대신해주고, 상사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롤모델이 될 수 없었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이상해졌다. 실수하지 않으려다 더 큰 실수를 하기도 하고, 후배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상사 험담을 하고는 뒤돌아 후회하기도 했다. 이럴 때면 합리화를 하고 싶어진다.
"애초에 롤모델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닐까? 모든 면이 완벽하게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어?"
롤모델은 개인적이고 상대적이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결점이 있지만 어느 한 부분쯤은 그럴듯하고 괜찮다. 그 매력적인 한 부분에 홀딱 반해서 롤모델로 삼게 되기도 한다. 내가 가진 것 중 어떤 사소한 것이 좋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민망한 과거를 떠올리다 깨달았다. 나는 나를 보던 시선으로 동료들을 보았고, 동료들을 보던 필터로 나를 들여다보았구나. '완벽한 이상'이라는 필터가 나와 동료들 사이의 틈을 자꾸만 벌려놓았구나. 그들에게 맞지 않는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고 거리를 둔 것은 그 필터 때문이었다.
다양한 인격 조각들로 이루어진 개인에게 ‘누군가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릴 때 엄마가 친구와 나를 비교하려고 들면 이렇게 맞섰다. “엄마는 왜 꼭 걔의 좋은 점만 가지고 비교하려고 들어? 전체를 다 놓고 봐야지.” 매번 지는 싸움이었지만 매번 분했다. 엄마가 그 애의 엄마였으면 나의 장점을 콕 집어 그 애와 나를 비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를 바라보며 살지만 절대 그 누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롤모델은 시대적이고, 개인적이고,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니까.
이제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것도,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는 것도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일상 속에서 나에게 맞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들을 지켜나가며 살고 싶다. 힘을 빼고 균형을 잡으면서 말이다. 중심을 잡을 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알고 있다. 자신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볼 줄 안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미운 모습을 봐줄 줄 안다. 롤모델이 아니라 그냥 나와 당신으로 우리가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제갈명 일상을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마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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