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은 자장가였을까?
바흐의 « 골드베르크 변주곡 » BWV988
인생의 말년에 작곡한 « 골드베르크 변주곡 »은 바흐가 세상에 내어놓은 일종의 타협안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위법으로 기둥을 세우고, 당시 유행했던 양식으로 가득 채워 변주곡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마치 종합 선물 세트처럼요. (2021.01.21)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러시아 대사로 드레스덴(작센 선제후국)에 파견되었던 카이저링크 백작이 불면증이 심해 바흐에게 수면에 도움이 되는 작품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바흐는 긴 변주곡을 작곡해 백작에게 주었고, 바흐의 제자였던 요한 고트리브 골드베르크가 그가 잠이 들 수 있도록 이 변주곡을 밤마다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후에, 골드베르크의 이름이 작품에 붙여 « 골드베르크 변주곡 »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공식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청탁을 받은 작품의 경우, 주문자의 이름을 제일 앞장에 넣는 것이 관례였음에도 변주곡의 표지에는 백작의 이름이 없거든요. 바흐가 누군가의 주문으로 변주곡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카이저링크가 살고 있던 드레스덴에서 악보가 출판(1741/1742)되었고 당시 바흐가 드레스덴에 잠시 머물고 있었으니,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백작에게 작품의 일부를 들려주고 거액의 후원금을 받았으리라는 (돈을 가득 넣은 황금잔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추측은 가능합니다. 보답으로 바흐가 새로운 하프시코드 작품의 필사본 하나를 백작에게 선물했을 수도 있고요. 고트리브 골드베르크가 카이저링크의 개인 하프시코드 주자가 된 것이 1745년이었다 하니 백작이 골드베르크에게 불면증을 달래기 위해 자기가 좋아했던 바흐의 변주곡을 연주해 달라고 자주 요청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원제목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 널리 알려졌다면, 음악학자였던 니콜라우스 포르켈(1749-1818)이 바흐의 전기에 이 변주곡이 백작의 자장가였다고 말을 얹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실제로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연주회를 가면 꾸벅꾸벅 조는 사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총 연주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하프시코드 독주는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집중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긴 작품을 들으며 불면증으로 고생했을 백작이 잠을 청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높은 학식과 예술적 감수성을 볼 때 잠이 들기보다는 지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흐가 표지에 적어 넣은 변주곡의 원제목처럼요. « 음악을 사랑하는 이가 영혼의 기쁨을 얻기를 바라며 작곡한, 두 건반 하프시코드를 위한 아리아와 변주곡 »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741년에 작곡되었습니다. 무겁고 어려운 바로크 시대 작품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가볍고 감각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에 열광하던 때였죠. 중세 시대의 유물인 대위법(주제 선율을 여러 성부에서 시차를 두고 겹치는 작곡기법)으로 복잡하게 쓰인 작품 말고, 듣기 편하고 쉬운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변함없이 구시대 작곡법을 고수한 바흐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고집쟁이 늙은이처럼 보였을 겁니다.
바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는 동시대에서 대중의 인기를 얻기가 힘들 거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흐에게는 스무 명의 자녀가 있었거든요. 그중, 이미 인기를 얻고 있던 작곡가, 빌헬름 프리드먼이나 칼 필립 에마누엘도 있고요. 특히, 칼 필립 에마누엘은 프로이센 왕궁에서 궁정 음악가로 일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으로 시대가 원하는 가볍고 우아한 스타일(갈랑트 양식)을 마음껏 펼치는 중이었으니, 아버지 바흐가 유행하는 음악을 몰랐을 리가 없죠.
인생의 말년에 작곡한 « 골드베르크 변주곡 »은 바흐가 세상에 내어놓은 일종의 타협안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위법으로 기둥을 세우고, 당시 유행했던 양식으로 가득 채워 변주곡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마치 종합 선물 세트처럼요. 그리고 각 변주를 다양하고 자유롭게 펼치기 위해 주제를 베이스에 놓아 화성을 반복하는 샤콘느 기법을 택했죠.
J.S.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 BWV 1004 네만야 라루로비치 연주 듣기
« 골드베르크 변주곡 »은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변주를 지난 후 다시 ‘아리아 다 카포’로 마칩니다. 총 30개의 변주 중 세 번째로 돌아오는 곡(3, 6, 9, 12…..24, 27번 변주)에는 ‘카논’을 배치해 대위법으로 기본 틀을 놓았습니다. ‘카논’은 돌림노래를 말해요.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면 한-두 마디 이후 다른 사람이 같은 선율을 반복하며 앞사람의 노래에 겹치는 기법입니다. ‘다 같이 놀자 동네 한 바퀴’처럼요.
다 같이 놀자 동네 한 바퀴 돌림노래 - 카논 기법 듣기
첫 번째 카논인 3번 변주곡은 같은 음(동음=1도)으로 주제가 반복되고, 두 번째는 2도 간격, 세 번째는 3도… 이렇게 주제가 간격을 벌리며 겹쳐집니다. 아홉 번째 카논인 27번 변주곡은 9도이므로 30번 변주곡에는 10도 간격으로 벌어진 카논이 나와야 하죠. 하지만, 마지막 곡에 와야 할 카논 대신 바흐는 ‘쿼들리벳’을 놓습니다. ‘쿼들리벳’의 원래 의미는 중세시대 수업 중에 시험을 보는 방법의 하나로, 아무 주제나 던지고 진행하는 토론을 의미했어요. 음악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주제를 동시에 모방하며 겹치는 기법을 말합니다. 아홉 개의 카논이 등장한 후, 더 이상의 카논이 가능할까 궁금해질 때쯤, 바흐는 원 주제에 두 가지 선율을 더해 세 개의 멜로디가 함께 진행하도록 만들어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습니다. 새로 더해진 두 개의 선율은 당시 유행하던 민요였어요. 하나는 무도회의 마지막에서 주로 연주되던 ‘내가 너무 오래 너를 떠나 있었구나’와 ‘배추와 비트 때문에 도망갔었네. 엄마가 고기를 구워 주셨다면 더 오래 머물렀을 텐데’라는 가사의 노래였습니다.
먼저, 아리아, 10개의 카논과 아리아 다 카포를 연주하는 영상을 먼저 듣고 전체 작품의 윤곽을 그려 보세요.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중 아리아, 카논 (3, 6, 9, 12, 15, 18, 21, 24, 27, 쿼들리벳), 아리아 다 카포 : 마리아 살치토 기타연주 듣기
음악을 듣고 무엇이 반복되고 겹쳐지는지, 도대체 무엇이 대위법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작곡 기법을 음악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 법칙을 알지 못해도 듣기 좋게 만드는 것이 작곡가의 역할이니까요. 바흐는 그 누구보다도 기법을 음악에 녹여 내는데 탁월한 작곡가였습니다.
변주곡은 전반부 15곡, 후반부 15곡으로 나누어집니다. 바흐는 후반부의 첫 곡인 16번에 ‘프랑스 서곡’ 풍으로 작곡한 변주를 배치해 새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서곡은 오페라를 시작할 때 연주하는 관현악곡이니 작품 후반부를 시작하며 새로운 기분을 불어넣기에 무엇보다 적절한 선택이었죠. 바흐가 살던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서곡은 느리고 장중하면서 장식음과 붓점 리듬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음악이었습니다. 루이 14세와 같은 왕이 행진할 때에 어울리는 분위기이죠.
장 바티스트 륄리, « 서민 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 (1670)» 오페라 중 서곡 듣기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중 16번 변주 프랑스풍의 서곡 : 피에르 앙타이 하프시코드 연주 듣기
크게는 전반과 후반으로 작품을 나눌 수 있고, 작게는 다시 세 곡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총 열 개의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1-2-3/ 4-5-6/ 7-8-9/ 10-11-12/… 28-29-30). 세 곡에는 작곡기법을 강조하는 곡 하나, 화려한 손가락 기교를 보여주는 자유곡 하나, 카논 하나가 들어갑니다. 앞서 들은 ‘프랑스풍의 서곡’은 작곡기법을 강조하는 곡에 속합니다.
작곡 기법을 강조한 또 다른 곡으로 ‘오르간을 위한 코랄’과 비슷한 작품이 있습니다. 오르간 코랄 중에 장식음이 많이 붙은 주선율과 조용한 반주부로 구성된 형식을 따른 것이죠. 아라베스크 문양처럼 장식음으로 곱게 수를 놓는 변주곡 25번을 들어 보세요.
바흐 오르간 코랄, « Ich ruf’zu dir Herr Jesu Christ » BWV639볼프강 체러 오르간 연주 듣기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중 25번 변주 머레이 페라이어 피아노 연주 듣기
이외에도 토카타, 푸게타, 2성/3성 인벤션, 트리오 소나타, 무용 모음곡의 쿠랑트, 가보트, 지그와 같은 각종 기법 형식들, 기쁘고, 슬프고, 명상곡처럼 고요하고, 승전가처럼 활기찬 다양한 캐릭터가 작품 안에 가득합니다. 기악곡으로 다룰 수 있는 온갖 기법과 화려한 기교를 변주곡에 포함했죠. 바흐가 평생 쌓아 올린 작곡 실력을 모두 풀어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반면, 이 모든 변주를 시작하고 마치는 곡은 ‘아리아’입니다. ‘아리아’는 원래 성악 작품에 쓰이는 용어예요. 기악곡에 아리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악기가 인간의 목소리처럼 노래할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습니다. 바흐의 « G선상의 아리아 »처럼요.
너무나도 기악적인 변주곡을 ‘아리아’로 시작해 ‘아리아’로 끝낸 특별한 이유가 바흐에게 있을 겁니다. 30개의 변주 중 가장 화려한 변주곡인 29번과 30번 이후 다시 돌아온 아리아에 주목해서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들어 보세요.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중 29번, 30번, 아리아 다 카포 : 글렌 굴드 피아노 연주 듣기
우리가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고 소박한 아리아는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등장해 그동안 지나온 30곡의 화려한 변주를 한낮의 꿈이었던 마냥 흩어 버립니다. 아무리 기교를 자랑해도 결국 마음을 다하는 인간의 노래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원래, 이 아리아는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바흐가 작곡한 소곡집(Notenbüchen für Anna Magdalena Bach, 1725)에 들어있던 작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노래였던 ‘아리아’의 베이스 선율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엮는 주제선율이 되었고, 바흐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48년, 하우스만이 완성한 초상화에도 등장했습니다.
음악가가 역사에 남을 자신의 초상화에 단 하나의 악보를 들고 선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하우스만이 1748년에 완성한 초상화를 보면, 바흐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보여주듯이 악보를 들고 있습니다. « 골드베르크 변주곡 »의 주제 중 첫 여덟 음이 악보에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바흐는 이 주제를 사용해 퍼즐과도 같은 14개의 카논 BWV1087(1747-1748)을 악보로 남겼습니다.
바흐의 음악을 시대에 뒤떨어졌다 여겼던 동시대인들의 평가에 관해 헨드릭 반 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묵은 가발’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괴팍스러운 늙은이’라고 표현할 판이다. 그가 늘 쓰고 있던 가발은 고풍스럽고 기묘하게 생겨서 시대 풍조를 좇으며 살아가는 청년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가발과 같았다. 그것은 과거의 것이며 비참한 세기를 상기시킬 뿐이었으므로 대개의 사람들은 일부러 외면했다. 그들은 모두 현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를 보고 있다는 것(바흐가 천재 작곡가요, 연주가였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그런 사람은 필요 없었다. 그는 ‘공연히 떠들어대는 낡은 가발’이요, 시대에 뒤진 사람이었다.
『반 룬의 예술사 이야기』,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이덕렬 옮김, 들녘
바흐를 깎아내렸던 그들의 근대성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미 낡아 세월과 함께 흘러가 버렸죠. 하지만, 시류를 쫓지 않은, 시대착오적이었던 바흐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리고 여전히 수많은 음악가가 바흐를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그 토대 위에서 자신의 음악을 펼쳐냅니다. 끝없이 새로운 음악으로 태어나는 « 골드베르크 변주곡 »의 주제처럼요.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을 쓰고도 아직도 가능한 음악이 많이 남았다는 듯 같은 주제로 카논을 작곡했던 바흐는 왜 열네 곡까지만 쓰고 멈췄을까요? 14는 바흐 자신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수비학(數?學)에서 B는 2, A는 1, C는 3, H는 8이므로 B(2) A(1) C(3) H(8)을 합치면 ‘BACH=14’가 됩니다). 바흐는 카논을 쓰고 2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언과도 같은 작품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은 것이죠. 14개 이후의 카논, 나머지 음악은 다음 세대가 이어주기를, 낡은 법칙이 새로운 옷을 입고 더 아름다운 음악으로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마음이 아닐까요? 하크메트의 시처럼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고요.
진정한 여행_ 나짐 하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할 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이제, « 골드베르크 변주곡 »의 전곡을 들어 봅시다. 만약, 처음으로 이 작품을 듣는다면, 먼저 페라이어의 자연스럽고, 기본에 충실한 우아한 피아노 연주를 듣기를 권합니다.
프랑스 연주자인 크리스토프 루세의 담백하고, 깊은 하프시코드 연주도 들어 보세요. 피아노와는 다른 섬세하고 화려한 음향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조금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들어 보세요. 굴드는 바흐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음악의 처음과 끝을 낱낱이 해체해 듣는 이의 귀에 생생하게 꽂아 줍니다. 단 하나의 음도 그냥 흘려 버리지 않아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굴드와 항상 연결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나면, 이미 이 작품에 푹 빠져 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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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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