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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정체성의 여정으로 읽는 영화 <윤희에게>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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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구원은 아니지만 희망은 될 수 있으니까. 사랑이 끝내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만은 나 자신으로 살게 하는 것일 테니까. (2021.01.21)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온

‘여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3주에 한 번 글을 씁니다.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영화 <윤희에게>를 봤을 때 고등학교 때 한일학생교류회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의 고등학생과 친선교류라니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조금도 상상이 안 갔다. 당시 나는 반일감정이 아주 강했는데 막상 내 또래의 구체적인 개인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뭐가 하나도 맞지 않고 어딘가 다 어긋난 것만 같았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또래의 동성을 붙여놓는다고 해서 사랑은커녕 우정을 나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심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교류회 전에 나왔다. ‘일본인들은 어쩌구’로 시작하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나왔던 말들. 그 말들에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던가 거리를 뒀던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말리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 뭔가 이거 소화가 잘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꿀꺽 삼켰던 것도 같다. 차이에 대해 존중하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운 건 한참 뒤였으니, 어쩌면 이 모든 말을 내가 한 다음에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장면은 기억에 남는다. 교류회 때 서로 교환할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뽑기로 했다. 그때 내가 뽑은 선물은 종이와 작은 종이 연결된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면 예쁜 소리가 났다. 그 선물을 준비한 건 유키라는 이름의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풍경에 쓰인 글자가 무엇인지 미리 준비한 한국어로 설명해줬다. 그제야 나는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둘 걸 하고 후회했다. 옳고 그름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예의와 정성 아닐까. 나 왜 이렇게 성의가 없었지.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가 조금 무너지고 나서야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비대한 자의식이 줄어야 타인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해 봐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불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암호 같은 감정이 둥둥 떠다녔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감정을 다루는 건 난제 중 난제였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뭐고, 사랑은 또 그중에서도 뭐가 다르지, 얼굴을 보고 좋아하면 왜 가벼운 마음이라고 취급받고, 태도나 성격을 보고 좋아하면 그렇지 않은지, 상대에 대해 뭘 안다고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지 하나같이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벼락처럼 깨달았다. 상대를 '알기'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한 다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걸.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퀴어 로맨스 영화가 나올 때 흔히 등장하는 비평적 클리셰가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우연히 동성이었을 뿐”이라는 설명, 비평가뿐만 아니라 감독이나 배우도 종종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반동성애 혐오세력의 감시라도 받는 것처럼 잔뜩 눈치를 보거나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르지 않을 때만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이라서, 그런 말은 좋게 말해도 지루한 다원주의자의 태도이고 나쁘게 말하면 선량한 차별주의자인 거라고 참견을 하고 싶어지곤 했다. 

우연히 동성일 뿐이라니. 이성애 로맨스각본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부장제의 정치경제적 이해에 맞춤하게 제공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알 수 있다. 이성애 로맨스 각본은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갭차이를 강조하고 그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메시지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갭차이는 통상적으로 남자주인공에게 재력과 권력을 몰아주고 여자주인공은 미모와 성격으로 승부한다. 최근에는 이 각본이 뒤집히는 경우도 있으나 기껏해야 나이 차이 정도로 변주될 뿐 남자주인공이 아무런 능력이나 배경 없이 오직 성격과 외모만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경우는 없거나 매우 드물다. 제도로서의 이성애 안에서 사랑은 예외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그 사랑 역시 당대의 사회규범이 허용하는 선에서 관리된다. 

예컨대 예전에는 이혼녀와 총각이 로맨틱코미디 장르에서 적합한 상대가 안 되었다면 지금은 가능한 식. 격정멜로의 경우에는 규칙이 좀 더 느슨해지지만 이런 경우에 주인공들은 반드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치 있는 것을 재화든 명예든 권력이든 내려놓아야 한다. 성차별적 젠더 체제는 이성애를 자연화함으로써 지탱된다. 이때 로맨스의 역할은 성과 사랑의 정치경제학을 뒤로 하고 우연과 운명으로 이루어진 소위 낭만적 사랑의 각본을 믿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성애 커플은 소위 급을 맞춘 동질혼으로 이어진다. 제도로서의 이성애 안에서 사랑은 필수가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기 때문에 재현될만한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우연히 상대가 동성이었을 뿐’이라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동성애가 금기인 이유는 단지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애가 규범으로 존재하고 제도로서 강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상대가 동성일 때, 이것은 언제나 끌림의 문제를 넘어서 세계관의 문제가 된다. 


사랑 이후의 시간

<윤희에게>는 이십 년 동안 상대를 잊지 못했던 40대 여자 두 명이 다시 자기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 서로를 만나게 되는 중년 퀴어 여성 로맨스 영화다. 나는 이 영화에서 특히 두 가지가 흥미로웠다. 결말에서 둘이 마침내 사랑을 확인해서 함께 있기로 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는 것. 두 사람의 만남 그 자체보다는 두 사람을 마침내 만나게 하는 다른 두 명의 조력자 역할이 매우 강조되었다는 점이 그랬다. 이 영화의 관심은 두 사람의 사랑 그 자체보다는, 두 사람이 자신이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 즉 동성애자라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력자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미 이십 년 전에 윤희와 쥰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공표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부인되고 좌절되었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단지 동성을 사랑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과정 전반에 걸친 연속적인 문제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정체성의 형성은 인생 과정의 일부인 것처럼 성정체성도 마찬가지다. 베벌리 버치에 따르면 성적 지향은 생물학적 기질, 생활사의 국면, 역사적 풍조, 의학적 규정과 집단의 규범, 사람과 사건들의 영향과 반응에 따라 정해지고 또 변화한다. 윤희와 쥰은 이십 년 전 서로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둘은 얼마나 두려웠을 것이며 그럼에도 얼마나 용감했던 걸까. 하지만 그 모든 용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때 그 용기는 얼마나 무용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윤희의 보이스오버가 이렇게 흘러나온다. “부모님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가 병에 걸린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억지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으니까. 나는 오빠가 소개해주는 남자를 만나 일찍 결혼했어. 나도 너처럼 도망쳤던 거야. 모르는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이곳을 떠난 네가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어.” 이십 년 동안 꾹꾹 눌러 담았을 이 몇 줄의 문장 안에는 윤희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윤희는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피해자였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 가해자였다고 생각한다.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장 식당에서 일하는 윤희는 그곳에서도 사람을 종종 서운하게 한다. 윤희가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표정으로, 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인내라는 듯이 그냥 그렇게 산다. 윤희의 부모와 오빠는 윤희를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원치 않는 규범적 삶을 강요했고, 윤희는 살아남기 위해 제도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것이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이었다는 것까지는 잊지 않는다. 

같은 시간 동안 쥰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드러내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아버지를 따라 스무 살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쥰은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인해 특별히 결혼을 강요받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조차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로 한다.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료코가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쥰은 이렇게 선을 긋는다. “저, 여태까지 저희 엄마가 한국인인 걸 숨기고 살았어요. 저한테 이로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거예요. 혹시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그러는 게 료코상을 위해 좋아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부쳐진 편지와 연착륙하는 감정들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는 쥰의 고모 마사코의 손에서 우체통으로 들어가고, 윤희의 딸 새봄은 우편함에서 그 편지를 발견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사실 부치지 ‘않은’ 편지이므로 편지가 부쳐진 것 자체가 사건이 된다. 부치지 못했던 편지가 우체통으로 들어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편지 모티브가 흔히 그렇듯, 부치지 않은 편지는 평탄하게 수신자의 손에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익숙한 얘기다. 잘못 배달되거나 끝내 도착하지 않는 편지는 오해와 갈등을 낳고 인연을 어긋나게 하거나 다른 인연으로 이어준다. 오타루가 배경인 또 다른 영화 <러브레터>에서처럼. 

하지만 <윤희에게>에서의 배달 사고는 사고가 아니다, 마사코와 새봄은 각각 쥰과 윤희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적 제약을 건너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사람으로 나온다. 편지가 이들의 손에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둘 사이에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갑자기 끝나버린 관계는 남은 감정을 바탕으로 연착륙을 할 수 있는 활주로를 얻는다. 

새봄과 마사코는 둘 다 귀여운 장난기, 그리고 많은 것에 관심과 애정을 주어도 소진되지 않는 샘물 같은 성품이다. 이런 여자들이 있다. 기를 빨아가지 않고 애정을 주는 이들. 이제는 민폐가 되어 사라져가는 오지랖을 무해하게 장착한 이들. 이들의 존재가 또다른 중년 여성이 등장하는 퀴어영화 <캐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영화 <캐롤>이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에게 반해 다가가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면 <윤희에게>는 후일담으로 시작해 새로운 설레임을 기대하는 시간을 담는다. 새봄과 마사코는 윤희와 쥰을 갈라놓은 혈연가족의 세계에 속해있는 사람이지만, 그 세계의 질서 바깥에 비껴서 있다. 한국 가족에서 이런 인물들은 대체로 알 수 없는 과거를 숨긴 채 집안의 근심이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삼촌’들이었지만 이 영화에서 삼촌은 사진관에 교회에서 받아온 달력을 걸어놓고 여동생 윤희가 혹시나 또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닌지 하고 감시하면서도 자신은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고 믿고 있는 유사가부장을 체현한 인물로 나온다. 

새봄과 마사코는 가족 안의 일원으로 있지만 어떠한 역할도 부여받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새봄의 캐릭터성이 놀랍다. 새봄은 쥰의 편지를 먼저 읽고 나서 아버지와 삼촌을 찾아가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 엄마가 이십 년 전에 사랑한 사람이 여자였고 이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새봄은 엄마가 더 외로워 보여 자기가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엄마의 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큰소리로 서운함을 토로한 다음, 엄마가 아마 이십 년 전에 가장 필요로 했을 사람이 되어준다.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삶

윤희의 남편은 왜 엄마와 헤어졌냐고 묻는 딸 새봄에게 “너네 엄마는 사람을 좀 외롭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왜 윤희가 그렇게 외로워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새봄은 엄마가 왜 그렇게 사람을 외롭게 하는지가 궁금하다. 윤희는 모든 것에 순응하지만 아무것도 잊지 않은 사람처럼 산다. 윤희는 여분의 삶이 벌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안 그랬던 적이 분명히 있다. 쥰에게 보내는 편지에 윤희는 이렇게 쓴다. “너와 만났던 시절에 나는 진정한 행복감을 느꼈어.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야.” 쥰은 수의사로 지내며 비혼의 삶을 살지만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됐다는 듯이. 무관심한 아버지와 거의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아버지의 죽음은 쥰이 스스로 부과한 제한을 의식하는 사건이 된다.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참고 있을 뿐 둘 다 잊지 않았지만, 둘은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더 탐색해보지는 않는다. 자신의 마음이 활짝 펼쳐졌을 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강력하게 거부당한 이후 이들이 선택한 것은 적응이 아니라 포기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가장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둘이 삶에 활력을 찾은 모습만으로 충분히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다. 쥰은 이제 료쿄에게 다르게 말할까. 윤희는 누구도 마음에 들이지 않겠다는 고집을 꺽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될까. 여분의 삶이 벌서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숨을 수 있을 만큼 숨어보라는 사람은 삼촌과 남편과 아버지가 사라진 세계에서 새봄과 마사코라는 여자 가족과 함께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더이상 스스로 소외시키지 않고 살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랑은 구원은 아니지만 희망은 될 수 있으니까. 사랑이 끝내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만은 나 자신으로 살게 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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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김현영(여성학자)

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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