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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초, 차분한 여운의 음악

이즘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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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음악은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음악도 있다. 우리 노래는 듣는 순간 큰 박수는 안 나와도 끝나고 나갈 때는 어떤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음악이 아닐까 싶다. (2020.11.06)


다가올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유시형과 유의형의 친형제 듀오 유심초를 만났다. 둘은 학생 시절부터 백영규, 이춘근 등과 함께 고향 부평에 터를 잡고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부평을 외국 문물을 일찍이 접하고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문화지대'로 기억했다. 1980년대 초중반 유심초의 본격 활동은 비록 짧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스매시 '원투 펀치'로 당대 음악 팬들에게 강렬한 추억을 남겼다.

지금 들어도 눈물 날 것 같은 소슬하면서도 아린 감성 그리고 시적(詩的)인 가사는 어떤 음악으로부터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느낌이 각별했다. '세련됐다', '클래시컬하다', '딴 음악하고는 달랐다'는 칭송이 잇따랐다. 상기한 두 곡 외에도 그 이전 '너와의 석별' '이것 참 야단났네' 그리고 그 이후 '사랑하는 그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유심초의 골든 레퍼토리들이다. 오래 활동하지 않았어도 히트넘버가 말해주듯 굵직한 궤적을 남긴 셈이다.

두 형제는 2000년대 통기타 붐에 의해 소환되어 다시 한번 분주한 시절을 재현했다. 한창 뛰던 젊은 시절 대중가수로 올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방황을 뒤로 넘기고 지금은 음악의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고 털어놓았다. 떠들썩한 매체 활동보다는 '우리는 그냥 조용히 노래만 남기자는 생각'으로 임한다고도 했다. 둘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 경기 서현역 부근 한 카페에서 유심초의 과거 현재 미래 이야기로 신나게 내달렸다.


 

데뷔 당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유시형: 데뷔는 '너와의 석별'과 '너'라는 곡이었다. 이종용이 불러서 히트했지만 사실 우리가 오리지널이다. 원래 이종용이 자기가 앞면, 우리가 뒷면 이런 식으로 앨범을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내가 군대 마지막 휴가 때 녹음을 하고 다시 들어갔는데, 이종용이 욕심이 나섰는지 내가 녹음한 반주에 그대로 자기 목소리를 입혀 타이틀로 걸어 발매했다. 제대 4개월 남겨 놓은 상태에서 그 노래가 방송에서 막 터져 나오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게 1975년 일이다.

데뷔 시기에 백영규 선생님과 음악 인연이 있지요?

유시형: 백영규는 우리가 정식 앨범 나오기 전 아마추어 시절에 외대 다니면서 같이 음악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당시 멤버는 학생 신분으로 나, 백영규, 숙대생 이춘근이었고 전석환 씨가 진행한 KBS 라디오 공개 방송 < 삼천만의 합창 > 등 라디오 프로에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나랑 백영규가 군대 가고 팀이 깨지니 의형이랑 이춘근이 혼성 듀엣으로 활동을 이어나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대 메이퀸이 스토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숙대생인 이춘근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물레방아'는 어떻게 생긴 팀인지 알려주세요.

유시형: 1975년 제가 제대할 무렵에 이종용의 권유로 공동 앨범을 발매하게 돼서 동생이랑 유심초가 탄생했고, 백영규가 저보다 늦게 군 제대를 하고 이춘근도 졸업을 하고 활동이 가능해지니 둘이 만나서 결성한 팀이 물레방아다. 그렇게 나온 데뷔 노래가 '순이 생각'.

1978년 나온 곡 '이것 참 야단났네'는 인상적이었습니다.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의 'Greenback dollar'를 가사를 완전히 색다르게 번안했는데, 누가 개사한 건가요?

유의형: 내가 했는데 이름은 형으로 올라가 있을 거다. 신고하는 사람이 착각해서 유시형으로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형 유시형, 동생 유의형을 헷갈려한다고 말했다)

1975년 '너와의 석별'로 준수하게 데뷔를 했지만 이름을 알리는 수준이었고 결정타는 1980년 '사랑이여'였다. '너와의 석별'과 '사랑이여' 사이에 공백이 꽤 긴데요…

유의형: '사랑한다 말해주세요'라는 노래가 중간에 있다. 1976년도 발표했는데, 그것도 꽤 알려진 편이다. 그 노래가 한창 방송에서 반응을 얻을 즈음에 내가 군대를 갔다. 그리고 1978년 제대하고 발표한 게 상기한 번안곡 '이것 참 야단났네'다. 제대한 후에는 또 집에서 음악을 반대해서 1~2년 동안 못했다.

집안에서는 왜 반대를 했나요?

유의형: 왜냐하면 아버지는 “전공을 살리지 왜 가수를 하려고 하느냐”는 거였다. 사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만 한다고 말했다.

유시형: 부모님이 학생 시절 아마추어로서 음악을 하는 건 인정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하니까 아버지뿐 아니라 집안의 형들도 말리고 나섰다. 그런데 그 무렵에 최용식이란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사랑이여'를 포함해 노래 15~20곡 정도를 만들어서 왔었다.



최용식 작곡가는 누군가요?

유시형: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그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 '너와의 석별'을 듣고는 그게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꼭 유심초에게 곡을 주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왔는데, 알고 보니 중학교 동문이었다. 그 노래들을 받아놓고 처음에는 한 2~3년 정도를 묵어놨었다. 그러다가 1980년도에 다시 앨범을 내고 싶어 곡 정리를 하는데 '사랑이여'가 굉장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노래의 곡과 가사를 약간 수정해서 발표하게 되었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같은 작곡가인가요?

유시형: 그건 다른 친구가 썼다. 앨범에서 아마 최용식 곡은 '사랑이여' 하나일 거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이세문이라고 이춘근 동생인데 그 친구가 썼다.

집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건가요?

유의형: 1980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무렵 아버지께서 형이랑 내 손을 잡고 '그래,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마침내 허락을 해주신 거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사랑이여'랑 다른 곡들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사랑이여'가 매체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유심초 쟤들은 배운 애들이라서 음악도 왠지 모르게 지적(知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그는 유심초의 학력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형 유시형은 외대 말레이어과와 국제통상학과를 전공했고 동생 유의형은 한양대 공대를 다녔다. 둘 모두 명문대 출신이다)

유의형: 나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었다. 그때 한양대가 의대 건물을 산에 막 짓던 무렵이라 공대도 같이 지원을 했는데 그게 붙었다. 그런데 나는 의대를 가고 싶어서 재수를 하려 했지만 위에 형들이 반대했다. 재수까지 하고 의대 다니면 7년이라고. 결국 형 덕분에 유심초로 잘 되긴 했지만 의대를 못 간 게 '약간' 한으로 남아 있다. (웃음) 사실 내가 텔레비전에 나왔을 때는 고교 동창들이 그랬다. 쟤가 왜 노래를 하는 거야, 뭐가 부족해 가수 짓을 하냐고. 그 시절은 연예인을 딴따라로 비하하고 비아냥대던 시절이었다.

유시형: 우리는 학교 다니면서 주로 방송 위주로 활동을 했지만 그 당시에 다른 많은 가수들은 생맥줏집이나 음악 감상실 같은 데서 무명으로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생 프로그램과 음반사에 연결돼서 앨범이 나오고 운 좋게 반응을 얻었던 터라 어떻게 보면 당대 연예계의 '쓴맛'은 별로 못 봤던 게 사실이다.

1981년을 장식한 '사랑이여'로 모든 영예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당시 기분을 듣고 싶습니다.

유시형: 우리가 '사랑이여'로 방송국에서 대상 타던 순간, 옆에 매니저들이 수상 무대 올라가서 울라고 그랬다. 그런데 사실 진짜로 울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우리가 성공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셨으니까. 걱정도 많이 하고 그러셨는데. 그래서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는 그게 쇼하는 것 같아서 참았다. 그냥 의연하게 수상 소감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쇼맨십도 필요한 거 아니었나 싶고. (웃음)



세월이 조금 지나서 1985년에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반응을 얻었다. 이때도 전처럼 시차가 존재했는데 이때는 왜 공백기가 생겼나요?

유시형: '사랑이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터지고 나서 또 '나는 홀로 있어도'라는 곡도 조금 떴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우리를 부르면 항상 '사랑이여'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만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노래를 부를 틈이 없었다. 새 곡을 내놔도 거기에 미치지를 못하니까. 그때는 순진해서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대로만 했다. 다른 곡들은 고개를 못 든 셈이다.

유의형: 사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버금가는 곡을 내놔야겠다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세월이 조금 흐르다가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만났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서 내놨던 거다.

그런데 그 뒤로는 왜 갑자기 사라지신 건가요?

유시형: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나오고 방송가에서 이건 제2의 '사랑이여'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심리적 압박감이 심했다. 아마추어로서 할 때는 즐기는 맛에 했으니 부담이 없었는데, 프로가 되고 탑 순위에 오르니 스스로 굉장히 부족한 걸 느꼈다.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이걸 잘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갈등이 생기면서 1987년인가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유의형: 그리고 사실 형이나 나나 성격이 연예계랑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형제이다 보니 형은 나보다 어깨가 더 무거웠을 거다. 동생까지 끌고 가는 거니깐. 나는 형한테 기대면 되지만, 주위에서 보기에는 형이 동생까지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노래하는 거니 형이 더 부담이 컸을 거다.

그 뒤의 행보와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유시형: 나는 1990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3년 동안 거기서 살았고 동생은 한국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7080과 통기타 붐이 일었다. 미사리부터 해서 전국적인 붐이었다. 그런 열풍이 일어나니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무대에 나갔다. 동생이 혼자 무대에 나가서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불렀다. '홀로 가는 길'로 활동한 가수이기도 한 남화용이 만든 이 노래는 '밑에서' 꽤 알려져서 우리가 없을 때도 김세환, 유익종, 박강성 같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부르곤 했다. 동생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리퀘스트가 엄청 들어왔다고 한다. 유심초 오리지널 멤버 뭉쳐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2003년에 2년 계약을 맺고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유심초 음악을 정의하신다면..

유시형: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지는 못해도 음악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일단 멜로디는 서정적이고 가사는 시적이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음악에 그런 게 있지 않나. 빠른 음악은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음악도 있다. 우리 노래는 듣는 순간 큰 박수는 안 나와도 끝나고 나갈 때는 어떤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음악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대중에게 임팩트는 있었지만 활동 기간은 짧았다.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유의형: 그때는 스스로 방황을 많이 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대학을 안 다니고 다운타운에서 노래를 했으면 죽기 살기로 했을 거다. 그러면 보다 더 많은 곡도 남겼을 거고. 그리고 형이나 나나 우리가 노래를 마음먹고 쓰면 굉장히 많이 썼을 거다. 그런데 뭔가 속으로는 흔들렸다. '내가 대중가수를 진짜로 해?'. 그런 정체성 혼란으로 활동을 빨리 접었고 돌이켜 보면 아쉬운 일이다.

유시형: 2003년에 한국에 들어온 후에는 방송도 많이 나간다. 젊은 시절에는 미래불안으로 동생이 말한 그런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대에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지금에서는 그게 너무 행복하다. 어디 공연에 가서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부르면 팬들이 앙코르를 외쳐주고. 지금 이 나이에 이런 행복을 어떻게 누리나 싶다.

유심초는 전성기 시절에 텔레비전 출연할 때 항상 양복을 입고 나오셨는데.. 어른들한테 이미지가 좋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유의형: 이미지 이야기를 하니 말인데 그동안 사생활을 다루는 많은 대담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왔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출연하는 걸 거절했다. 편집하는 사람이나 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뭔가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또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나. 우리는 그냥 조용히 노래만 남기자는 생각이다.

유시형: 많은 팬들이 우리에 대해 좋은 이미지, 어떤 신비감이나 꿈같은 걸 가지고 있다. 나는 팬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늙으면서 이것저것 변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방송에 나가서 일일이 뭐 하다가 망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자기 팬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평이 고향이고 음악 활동도 부평에서 시작하셨는데 부평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유시형: 내가 어릴 적에는 미군 에스캄(ASCOM)이 있었다. 거기 조그만 동산에 올라가 보면 큰 잔디밭에서 미국 사람들이 야구를 하는 것도 보고 그랬다. 또 부평이 미군이 주둔하다 보니 외국 문물이 빨리 들어온다. 그래서 옛날에는 트위스트 김 같은 분들이 와서 춤도 배워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기가 그런 외국 문화가 바깥으로 나가는 큰 창구였던 셈이다. 낭만도 있었고, 평화롭고…

에스캄이 두 분의 음악 활동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다고 보시는지.

유시형: 그렇다. 왜냐하면 음악다방 같은 데 가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오리지널 앨범들로 팝송도 소개가 됐고. 또 선배들한테서도 여러 음악 정보나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음반들도 접했다. 외국 판 구하기 힘든데 형들 방에 가면 팝 샹송 칸초네 앨범들로 가득했다. 그때 'La novia'라는 노래를 막 한글로 적으면서 듣곤 했는데, 지금도 그게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유의형: 미군 부대가 있다 보니 원판 같은 게 나온다. 그 영향에 무엇보다 음악다방에 가서 팝송 듣는 게 좋았다. '키 다방' 그리고 신신 카바레 건물 1층에 있던 '신신 다방'은 아주 유명했다.

부평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유심초로 유명해지고도 부평에 사셨나요?

유시형: '사랑이여'로 크게 성공했을 때도 계속 부평에 살면서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부평에 초등학교 출신들 친목회도 많이 했다.

출신 학교를 알려주신다면.

유시형: 부평동 초등학교에 다녔고 중학교는 동산 중학교, 고등학교는 동산 고등학교를 나왔다. 동산 중고 출신이다.

유의형: 나도 똑같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백영규를 비롯해 '너'를 작곡한 서새건, 작사한 심진구도 다 동산 중학교 고등학교 출신이다.

유심초 노래 베스트와 개인적으로 덜 알려져서 아쉬운 노래를 꼽자면.

유시형: 일단 베스트는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홀로 있어도', '사랑하는 그대에게', '너와의 석별', 그리고 '이것 참 야단났네'. 잘 알려진 곡들이니까 아무래도 그게 베스트가 아닐까. 그리고 덜 알려져서 아쉬운 곡은 '그님만을'. (유시형 작사/작곡)

앨범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첫 음반은 분명 '너와의 석별'이라 봐야죠?

유시형: 그렇다. 그다음에 '이것 참 야단났네'가 나왔고, '사랑한다 말해주세요'도 있었다. 그리고 1980년에 '사랑이여'가 수록된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게 우리가 제대로 된 음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상의 1집이다.

유의형: 왜 우리가 앨범다운 앨범으로 '사랑이여'를 꼽는 것이냐면 그전에는 제작자가 따로 있었다. 녹음, 편곡이 다 그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사랑이여'는 우리가 직접 제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편곡에 관여하게 되고, 편곡자에게 여러 요구도 하고 그래서 제대로 우리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었다.

유시형: 정리하자면 '너와의 석별'로 데뷔를 했고, '이것 참 야단났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가 중간에 있고 그다음에 '사랑이여'가 제대로 된 앨범으로 사실상의 1집이다. 거기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함께 있다. 그리고 '나는 홀로 있어도'가 타이틀 곡으로 나온 것이 2집이다. 그다음 3집이 '사랑하는 그대에게'고. 모처럼 음반 얘기를 하니까 과거가 살아 돌아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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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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