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선택해, 나로 시작해
나는 나와 보내는 시간에 남들보다 수월하게 적응했다. 어쩌면 과도하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듯 나로부터 조금씩 먼 곳으로 문장의 무게를 이동시키며 생각을 발전시킨다. 인생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선택할 것이다. (2020.11.06)
정말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좋았다. 영화에 나오는 인상적인 대사 중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가 있다. 마케팅 상사가 회의 중 좋은 의견을 제시한 직원들에게 하는 최고의 칭찬으로, 이것을 들은 직원은 기쁨을 얼굴에서 숨기지 못한다. 관객들을 웃기려는 웃음 포인트로 사용된 이 대사가 영화의 마지막 대사와 더불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 대사는 “나를 보지 말고 너를 봐”라는 대사로, 자신을 줄기차게 비난해온 동료에게 유나가 하는 말이다. 두 대사 모두 시선이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이 독특했다. 나의 발전을 체크할 수 있는 기준도 나 자신이고, 가십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나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나 자신에 집중하는 양상이 영화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남을 보지 않고 나를 보게 되었는데 다시 남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쩐지 나는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안정을 찾았다. 여러 사회적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 시간이 지낼 만하다고, 가끔 만족스럽기까지 하다고 고백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다. 약속과 소음이 없는 삶은 스트레스를 줄여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친구들과 식당에 갔을 때 놀라고 말았다. 번화가에서 사람들 헤치고 시끌벅적한 식당까지 가는 일 자체가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걸 어떻게 해왔지? 매일 회사에 가야 하기 때문에 출퇴근길 만원 버스가, 부딪히는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지워버린 게 아니었을까? 나는 나와 보내는 시간에 남들보다 수월하게 적응했다. 이제 내가 가진 한정적 에너지가 외부 환경을 의식하는 데에 쓰이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질 만큼. 어쩌면 과도하게.
하지만 어른들이 듣기 싫을 때까지 나를 가르치던 말처럼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난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 영원할 수는 없다. 나는 어쩐지 “혼자 푸르게 살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을 더불어 들어왔다. “깨끗한 물에 물고기 못 산다”는 말도. 나는 깨끗하고 푸른 아이였다기보다는 자기 의견이 있는 아이였다. 자기 의견이 있는 아이는 자주 혼이 났다. 덜 혼나면서 말하는 법을 조금은 익혔다. 더 자라서는 만원버스에 적응했다. 예상치 못했던 판데믹 속에서 예상치 못한 안정을 찾았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의식이 확실하고 정신을 바짝 차린, 각성된 상태가 되어 자신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을 선택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의미를 구성할 때 그 방법을 자기가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이런 종류의 선택을 행하지 않거나 선택을 할 줄 모른다면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 『이것은 물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선택한 줄도 모르고 따르고 있는 것들을 살펴본다. 철학자가 이론을 점검할 때처럼 모든 문장과 단어를 꼼꼼히 따지며 시간을 들인다. 나는 내 선택의 기준을 나로부터 시작하고 있는지, 충분히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동시에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듯 나로부터 조금씩 먼 곳으로 문장의 무게를 이동시키며 생각을 발전시킨다. 인생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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