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독서는 귀중한 망각의 시간”
교수 김영민의 서재
독서는 책 내용에 집중하는 일인 동시에 다른 일을 잊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게 망각은 기억만큼이나 소중합니다. 그리고 무관심은 관심만큼이나 소중합니다.(2020.11.05)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논어 에세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산문집 『공부란 무엇인가』를 펴냈다.
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꽤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무렵에는, 전집류 같은 책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판매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런 책들을 구매해서 집에 두었고, 저는 손에 집히는 대로 그런 전집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 상당수는 계몽사에서 펴낸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같은 책들을 기억할 겁니다. 그런 독서는 어떤 종류의 시험공부와도 무관한 것이었기에 더 잘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첫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도 한 이야기인데, 입시 공부가 싫었던 저는 고교 시절 매주 토요일이면 시립도서관에서 열리는 독서 모임에 나갔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른 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매주 한 편 혹은 한 권씩 시험공부와 무관한 책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그 역시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뭐든 당장은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해야 재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책은 다른 매체보다 더 저에게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합니다. 숨죽여 책에 집중해 있노라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작가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책을 일러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라고 말했는데, 크게 공감합니다. 독서는 책 내용에 집중하는 일인 동시에 다른 일을 잊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게 망각은 기억만큼이나 소중합니다. 그리고 무관심은 관심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요즘 저자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어찌어찌하다 보니, 올겨울에 창간될 『Seoul Review of Books』(서울 리뷰 오브 북스)』라는 서평지 편집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에서 내는 서평지는 어떤가 하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 관심의 연장선에서 책의 역사나 서평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최근작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공부란 무엇인가』는 목전의 효용에 연연하지 않는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담긴 공부 이야기에 공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러한 공부를 시도한 결과 태어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제 다음 책을 읽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올겨울에 출간되는 『중국정치사상사』라는 책입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접점에 서 있기에 한층 흥미로운 분야인, 정치사상사에 관심 있는 독자, 그리고 동아시아를 좀 더 깊이 이해해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각기 다른 시점에 다른 관심을 가지고 읽어 온 책들에 일률적인 순위를 매길 수 없어서, 대신 다섯 부류의 책들을 추천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조선 시대 일기책들
조선 시대 일기책들은 왕조실록이나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접할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전해줍니다. 조선 시대 일기책을 읽으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여러 편견에 대해 도전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많은 일기책이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16세기 양반 오희문이 9년 3개월 동안 쓴 『쇄미록』이라는 일기책을 추천합니다. 『쇄미록』 전체가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조만간 출간 예정인 『한권으로 읽는 쇄미록』을 권합니다.
일본사 고전 총서
일본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일본을 잘 모르면 일본을 정교하게 싫어하거나 좋아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심층적인 이해로 인도하는 야심적인 총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출판사 빈서제가 기획하는 총서의 첫 책으로 니시 아마네(西周)의 『백일신론』(百一新論)이 나왔는데, 『백일신론』은 서양의 “philosophy”를 “哲學”으로 처음 번역했다고 해서 유명한, 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드문 책입니다. 두 번째로 나온다는 명륙잡지(明六雜誌) 역시 일본사 이해에 필수적인 텍스트입니다.
만화가 전지의 책들
예전에 만화가 마영신 작가의 책들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에는 만화가이자 미술가인 전지 작가의 만화책들을 추천합니다. 전지 작가의 만화책으로는 『선명한 거리』와 『끙』 등이 있는데, 그 자체로도 재밌는 만화이지만, 전지 작가가 살아온 안양 지역에 대한 뛰어난 인류학적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들
각종 지면에 신자유주의 비판이나 자본주의 비판이나 근대문명 비판이 넘쳐납니다. 아무리 일리 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메마른 목청으로 관습적인 비판을 반복하다 보면, 독자들은 그 논의에 식상해지기 마련입니다. 정말 새로운 언어와 상상력으로 우리를 둘러싼 문명을 재검토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이에게,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을 권하고 싶습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은 여러 가지가 번역되어 있지만, 특히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권하고 싶습니다.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책 시리즈
출판사 오후의 소묘에서 정력적으로 소개해 온 비올레타 로피즈의 그림책들을 추천합니다. 그중에서도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통해 흥미진진한 그림책 소개를 한 바 있는 박서영 작가가 번역에 참여한 『할머니의 팡도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중 하나입니다. 멋진 그림뿐 아니라 너무 매력적인 나머지 쉽게 잊기 어려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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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 저/<홍길표> 역8,100원(0% + 5%)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反영웅적 이야기 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 등에게 격찬을 받았으나 생전에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일생을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로베르트 발저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