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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마블의 플레이리스트

'증명'에 맞서 싸우는 마블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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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재적소 장면에서 메시지를 각인하고 힘을 불어넣으며 강인한 여성상을 확립하는, 마블의 '페미니즘 선곡표'를 분석해 본다. (2019. 04. 05)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가수 헬렌 레디는 1972년 여성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곡 'I am woman'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과 그래미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를 거머쥐었다. 50 여년 전 여권 신장을 노래한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 음악에서 핵심이 된 '허스토리(Herstory)'를 상징한다. 대중음악계 여성의 발자취를 짚어나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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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캘리포니아의 한 비디오 가게 옥상에 추락한 외계 전사 디버스(캐럴 덴버스). 낯선 행성에 불시착해 '통신 장비'를 구하려 차 창문을 두드리자 힙합 그룹 솔트 앤 페파의 'Whatta man'이 흘러나온다. 고향 행성 특공대원들과 교신을 시도하는 공중전화 부스 뒤 벽은 피제이 하비, 케이트 부시, 스매싱 펌킨스의 포스터로 빼곡하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을 발견한 디버스는 나인 인치 네일스 티를 훔쳐 입고, 가비지와 TLC의 히트 싱글을 들으며 모래바람을 헤쳐나간다.<캡틴 마블>의 대중음악은 시대 고증을 넘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1990년대를 수놓은 여성 아티스트와 밴드의 목소리로 채워진 이 영화의 플레이리스트는 젠더 고정관념과 '증명'에 맞서 싸우는 여성 슈퍼히어로, 캡틴 마블의 감정을 대변하고 또 증폭한다. 적재적소 장면에서 메시지를 각인하고 힘을 불어넣으며 강인한 여성상을 확립하는, 마블의 '페미니즘 선곡표'를 분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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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Heart) - Crazy on you(1975)

 

'넌 여자라서 안돼!' 상처로 가득한 캐럴의 어린 시절에 어렴풋이 스쳐가는 곡이다. 앤 윌슨, 낸시 윌슨 자매가 이끌었던 록 밴드 하트(Heart)의 멋진 데뷔 앨범 <Dreamboat Annie> 수록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까지 오르며 팀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레드 제플린 로버트 플랜트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친 앤 윌슨의 보컬과 하드록과 포크를 오가는 유연한 스타일은 후배 여성 로커들에게 상당한 영감을 제공했다. 2018년 앤 윌슨은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40여 년 커리어를 총정리하며 1970년대 여성 로커의 삶을 회상했다. 라디오 디제이가 무례한 농담을 던지고 몸을 더듬어도 매니저는 쉬쉬하기 바빴고, 대중은 생소한 자매 밴드를 두고 '레즈비언 혹은 성적인 관계'라는 억측을 쏟아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음악 산업계에 맞서 그는 '이것은 젠더의 문제가 아니다. 존중의 문제이며, 힘의 문제다.'며 연대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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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지(Garbage) - Only happy when it rains(1994)

 

과거의 기억을 찾아 사막 한가운데 고속도로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캐럴의 등 뒤로 이 노래가 흐른다. '난 비 내릴 때만 행복해 / 뭔가 잘못됐을 때 기분이 좋아 / 항상 슬픈 노래만 들어'라는 메시지가 쓸쓸하지만, 진짜라고 믿어왔던 세계를 전복해나가는 과정에서의 묘한 쾌감 역시 함께한다.1990년대 초반 세계를 거칠게 정복한 그런지와 너바나의 뒤에는 부치 빅(Butch Vig)이 있었다. <Nevermind>를 프로듀싱하고 소닉 유스와 스매싱 펌킨스의 사운드를 확립한 그는 1994년 커트 코베인이 산화하자 그 대안으로 4인조 밴드 가비지를 결성했다. 가비지의 음악은 성난 얼터너티브를 누그러뜨린 팝이었으나 프런트우먼 셜리 맨슨의 존재는 팀에 반항의 이미지를 각인했다. 학대와 구타로 얼룩진 십 대 시절을 보낸 그는 로커가 되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발랄과 무기력, 공격성을 오가는 짙은 화장과 헝클어진 머리로 한 시대를 풍미한 셜리 맨슨은 최근에도 여성 이슈에 과감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할리우드 미투 운동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모리세이에게 'Fuck You'라 일갈한 건 유명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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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엘씨(TLC) - Waterfalls(1994)

 

TLC는 1990년대 알앤비 씬에 페미니즘을 심었다. 남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창하는 것을 넘어 젠더 구도를 역전시켰다. 활달하면서도 성숙했던 TLC는 과감한 메시지와 제스처를 통해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강조했고 당당한 태도를 통해 남성을 주도하는 여성의 언어를 확립했다. 비록 그들의 음악은 1990년대를 주름잡은 남성 프로듀서들과 작곡가들의 손에서 다듬어졌지만, 진취적인 캐릭터와 섹슈얼한 표현 능력은 온전히 멤버들의 공이었다.통통 튀는 데뷔 싱글에서 'Ain't 2 proud 2 beg'에서 멤버 레프트아이는 왼쪽 안경알에 콘돔을 끼고 등장했다. 후속곡 'Hat 2 da back'에선 배기팬츠, 야구모자 등 젠더리스 스타일을 선보이며 주체적이고도 재치 있는 여성상을 형성했다. 사랑의 아픔을 여성의 언어로 노래한 'Creep'과 'No scrubs' 역시 어리석은 남자들 위에서 감정을 주도하는 여성으로의 TLC를 공고히 했다. <캡틴 마블>이 기억하는 TLC는 레프트아이의 집행유예 선고 후 발표한 1994년의 <CrazySexyCool>로, 말괄량이에서 성숙한 여인으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선보인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가요계 정상에 이들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비밀 공군 기지로 향하는 캐럴과 퓨리 국장이 'Waterfalls'를 선곡한 건 시대 배경으로도, 영화의 주제로도 매우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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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Nirvana) - Come as you are(1991)

 

캐럴 덴버스의 무의식 속 레코드 플레이어에서 흐르는 노래. '넌 네 잠재력을 통제할 수 없다'며 굴복을 세뇌하는 외계 종족은 '이 노래 내 스타일이야'라며 춤을 춘다. '있는 그대로 와 / 너였던 사람 그대로 / 내가 원하는 대로'라 건조히 노래하는 커트 코베인의 목소리는 캡틴 마블에게 부여받은 이름, 주입된 정체성을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 너바나의 위대함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커트 코베인이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은 유명하지 않다. 여자 친구 토비 베일로부터 페미니즘에 눈을 뜬 커트는 음악계 성차별적 행태와 가사를 고발하며 젠더 권력을 허물어왔다. 1992년 <스핀>과의 인터뷰에서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동성 차별주의자들은 우리 공연장에 오지 마라'고 일갈한 건 널리 알려진 일화다. 말로만 페미니즘을 외친 것도 아니다. 'In bloom' 뮤직비디오에서 스스로 드레스를 입고 'Been a son'과 'Sappy'를 통해 젠더 역할을 교묘히 비틀었으며, 'Polly'와 'Rape me'의 적나라한 묘사로 강간의 추악함을 폭로했다. 당대 힙합 음악의 문란한 가사와 건스 앤 로지스 보컬 액슬 로즈의 동성애 혐오적인 가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커트는 1990년대 여성 펑크 로커들의 라이엇 걸(Riot Girrl) 씬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너바나가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때 커트 코베인의 빈자리를 채운 이들이 네 명의 여성 보컬 - 킴 고든, 조안 제트, 세인트 빈센트, 로드 -였다는 사실은 그가 남성이었음에도 여성 인권을 위해 투쟁한 페미니스트였단 사실을 증명한다. 너바나의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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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다웃(No Doubt) - Just a girl(1995)

 

모든 억압을 걷어내고 각성한 캡틴 마블은 가늠할 수 없는 힘을 뽐낸다. 외계 고위 전사들의 공격을 손쉽게 제압해버리더니 지구로 향하는 탄도 미사일을 맨몸으로 막아내고, 우주로 날아가 거대 우주 모함을 주먹으로 터트려버린다. 흥겨운 슈퍼 파워의 현장 위로 까칠한 기타 리프와 함께 이런 가사가 흐른다. '난 그냥 여자아이야 / 세상 어디에나 있는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고 / 갇힌 삶을 살고 있지 / 정말 화가 나!'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4인조 밴드 노 다웃은 우리에겐 명품 록 발라드 'Don't speak'로 기억된다. 이들은 팀의 홍일점 그웬 스테파니의 퇴폐적 매력과 스카/레게 리듬을 적극 차용한 펑크 록으로 얼터너티브 시대 큰 인기를 누렸다. <캡틴 마블>이 하이라이트를 맡긴 'Just a girl'은 1600만 장 판매고를 올린 1995년 <Tragic Kingdom>의 첫 싱글로, 빌보드 싱글 차트 21위에 오른 명실상부 히트곡이다. 그웬 스테파니의 자전적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Just a girl'의 메시지는 도발적이고 공격적이다. '많은 이유를 들며 도망치고 숨으라 말하지 / 난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 왜냐면 착한 아이니까'라며 굴복의 젠더 정체성을 비꼬며, 결코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저항이 꿈틀댄다. 캡틴 마블을 통제하려 했던 외계 종족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걸 통제하려 하는 권력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Just a girl'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페미니즘 송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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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Hole) - Celebrity skin(1998)

 

대망의 엔딩 크레딧을 거친 기타 리프가 장식한다. 1990년대 라이엇 걸 무브먼트의 최전선, 커트 코베인의 동반자였던 코트니 러브의 밴드 홀(Hole)이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길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코트니 러브의 펑크 록은 경쟁자들보다 강력했고 거침없었으며 분노로 들끓었다. 1989년 결성된 홀은 코트니 러브의 기행과 너바나의 이름 아래 가십성 밴드로 취급받았지만 그런지 얼터너티브의 저항 정신을 충실히 구현한 팀이었다. 남성 지배 권력을 공격하며 보편적 메시지로 여성의 연대를 꿈꾼 코트니 러브는 X세대 여성들의 페르소나였으며 페미니즘의 아이콘이었다.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Celebrity skin'은 1998년 발표된 동명의 앨범 톱 트랙이다. 코트니 러브를 사랑했으나 커트 코베인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이 작곡에 참여하여 격렬하고 어두운 그런지를 보다 세련되게 다듬고 깔끔함을 더했다. 유진 오닐,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셰익스피어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은 'Celebrity skin'은 '더 큰 힘을 위해 명성을 갈구하는' 인간 사회를 노래하며 21세기의 여성 슈퍼 히어로 서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마블 시리즈의 전통대로, '캡틴 마블은 <어벤저스 : 엔드 게임>과 함께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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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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