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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 <동주>
연희전문은 기독교 계통 학교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윤동주와 송몽규에게는 낯설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그리고 윤동주는 이곳에서 살아생전 받지 못한 시인이라는 칭호를 죽어서 받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만난다. (2018. 02. 21)
영화 <동주>의 한 장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서시」를 지은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두말할 필요 없이 국민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가 <동주> (2016년 작. 감독 이준익)다. <동주> 는 일제의 생체실험으로 감옥에서 요절하였다는 참혹한 이야기 외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던 윤동주의 짧았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최근 역사영화들이 재미를 위해 과도하게 역사를 재해석한 점에 비해 <동주> 는 비교적 사실에 근거하여 윤동주의 삶을 따라가려 했고,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지만 117만 명의 관객이 드는 성공을 거두어 전기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 (출처: 위키피디아)
북간도의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
영화 <동주> 는 윤동주뿐 아니라 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인 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를 세상에 알렸다. 흔히 윤동주는 서정시의 대표 시인이자 일제에 희생된 안타까운 청년으로만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영화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영원한 친구, 영혼의 동반자와 같았던 송몽규의 삶을 함께 보여주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와 시인으로서의 예민한 감수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윤동주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
윤동주(오른쪽 뒤)와 송몽규(앞줄 가운데) (출처: 위키피디아)
윤동주와 송몽규는 1917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송몽규가 9월생, 윤동주는 12월생이다. 윤동주의 작은고모가 송몽규의 어머니다. 이들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연변 지역이고 당시에는 북간도로 불렸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북간도 이주사에서 명동촌은 꽤 깊은 의미를 지닌다. 명동촌은 1899년부터 1905년 사이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문치정, 남위언, 김하규, 김약연 등 네 집안의 142명이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 등을 목적으로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명동촌이 자리한 곳의 원래 중국 지명은 ‘비둘기 바위’라는 뜻을 지닌 ‘부걸라재(???子)’였는데 김약연 등이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으로 만들고자 ‘명동촌’이라고 이름하였다.
함북 종성군에 살았던 윤동주 집안은 1886년 그의 증조부의 주도로 북간도의 자동(子洞)으로 이주하였다가 1900년도에 명동촌의 형성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송몽규는 그의 아버지가 명동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면서 명동촌에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명동촌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모인 곳인 만큼 미래의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육 사업을 활발히 벌였다. 그 결과 독자적으로 ‘명동학교’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민족교육의 산실로 삼았고, 윤동주도 이 명동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식민지 조선 본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독립운동사상을 가르친 명동학교 덕분에 명동촌은 1920년대까지 북간도의 명실상부한 민족교육운동의 본산으로 자리매김 한다. 윤동주와 송몽규 외에 명동학교에서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 이들의 친구인 문익환 목사가 있다.
영화에서 동주(강하늘 분)와 몽규(박정민 분)는 연변 사투리를 쓴다. 실제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 번도 서울에 온 적 없던 이들은 당연히 자신이 자란 지방의 사투리를 썼을 테다. 그들이 쓴 연변 사투리는 당시 친구들이 듣기에 기분 좋게 부드러운 말투였다고 한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동창인 시인 유영은 윤동주 추모시 「창밖에 있거든 두드려라」에서 “모진 바람에도 거세지 않은 네 용정(龍井: 명동촌 근처에 있던 도시) 사투리와”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고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한편, 송몽규는 외향적이고 머리가 좋으며 리더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송몽규는 청소년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가출하여 중국 낙양에 있는 김구와 관련 있던 한인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이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이고 행동적이었던 송몽규는 이후에도 독립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교토에서 윤동주도 참여한 송몽규의 비밀 조직이 그를 오랫동안 감시해오던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송몽규와 윤동주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의 탄생
영화에서도 윤동주와 송몽규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이들은1938년 나란히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윤동주의 많은 시가 연희전문 시기에 지어졌다. 20대 초반이라는 감수성 풍부한 청년기이기도 했지만 윤동주는 연희전문의 학풍을 좋아했고 이때 받은 교육으로 문학적 성장을 이루었다.
연희전문학교는 현재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대학교는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우리나라 사람을 위한 대학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위한 대학교였다. 바늘구멍에 들어가듯 입학도 어려웠지만 들어가서도 차별이 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으려고 전문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이나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 여성의 경우는 이화여전 등으로 진학했다. 이들 전문학교는 법적으로는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들 전문학교에서 배출되었고 사람들은 내심 이 학교들을 대학과 동급으로 여겼다. 연희전문은 기독교 계통 학교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윤동주와 송몽규에게는 낯설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그리고 윤동주는 이곳에서 살아생전 받지 못한 시인이라는 칭호를 죽어서 받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만난다.
영화에서 윤동주는 기숙사 핀슨홀에서 겉늙어 보이는 친구 강처중(민진웅 분)을 만난다. 실제로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핀슨홀의 삼총사로 불릴 만큼 강처중과 친하게 지냈다. 일본 유학시절에 윤동주가 쓴 시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 모두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문학적 비평을 받기 위해 편지에 써서 보낸 시들이다.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 사진(출처: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
강처중은 훗날 윤동주의 시가 정음사에서 처음 나오게끔 기획한 사람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경향신문』 창간 멤버로 기자가 된 강처중은 1947년 『경향신문』 주필인 시인 정지용에게 윤동주의 시를 보여주고 시집의 서문을 받았으며, 자신이 직접 발문도 써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출간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간 아까운 청년에서 민족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시를 쓴 시인 윤동주로 거듭나게 된다.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큰 공을 세운 강처중이지만 그의 삶은 기구했다. 함경도 출신 강처중은 해방 이후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남로당의 핵심이라는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1950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무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강처중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이 서울에 진격해 오면서 서대문형무소가 개방되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말을 남긴 뒤 월북했다고 한다. 이후 강처중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윤동주의 첫 시집에 서문을 남긴 정지용 또한 월북한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발간된 윤동주의 시집에서는 정지용의 글도 강처중의 글도 삭제되고 말았다. 1988년 월북 문학 인사들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후에야 초판 윤동주 시집에 있던 정지용의 서문을 정식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강처중의 역할도 그 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영화에서는 윤동주와 정지용(문성근 분)이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를 매우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두 사람이 살아생전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정지용은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 사후 그의 시를 읽고 윤동주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하였다. 그런 정지용, 윤동주 두 시인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동주가 일경에 체포되기 전 교토에서 다닌 대학이 도시샤대학(同志社大?)인데, 정지용도 이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도 도시샤대학 캠퍼스에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생각해보면 정지용과 윤동주의 만남은 참으로 문학적이다.
도시샤대학의 윤동주 시비(왼쪽)와 정지용 시비(오른쪽)(제공: 저자)
마루 밑에 감추어둔 시집이 극적으로 출판되다
영화에서는 윤동주가 일본인 스승의 딸과 만나 영어로 번역한 시집을 출간하려고 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자신이 완성작이라고 생각한 19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출간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한글로 쓰인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나오면 신변이 위험해지리라고 우려한 이양하 교수의 충고로 시집 출간은 보류되었다. 대신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필 시집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북간도의 집에 두었고,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중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시집이 멸실되지 않고 남아 윤동주 스스로 완성작이라 생각하는 19편의 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윤동주가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할 때, 후배 정병욱의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2차대전에서 패배를 거듭해 궁지에 몰린 일제는 1943년부터 공부하는 학생마저 전쟁터로 끌고 가는 학병제를 실시하였는데 정병욱이 이때 끌려가게 된다.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시집을 소중히 보관해달라고 맡겼고 그 어머니는 정병욱의 광양 고향집 마루 밑에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감추어두었다가 해방이 되고 아들이 살아 돌아왔을 때 자랑처럼 내놓았다고 한다. 정병욱은 당시 기자였던 강처중에게 이를 보여주었고 강처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윤동주의 도쿄 유학 시절 시 5편을 보태 마침내 윤동주의 첫 시집을 1947년에 출간한다.
1946년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아름다운 시인
마치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을 표현하듯 영화 <동주> 는 흑백이다.
1940년대 윤동주가 한글로 시를 쓰던 때는 한글 교육이 금지되고 사람들의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많은 시인과 작가가 친일파로 돌아서 일제를 찬양하는 일본어 시를 쓰고 우리나라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연설을 하던 때였다. 일제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듯했고 친일파 외의 사람들은 절망하고 고통 받았다. 그런 시기에 윤동주는 좌절하지 않았다. 송몽규와 윤동주가 조직한 학생 비밀 조직은 어떻게 하면 일제를 궤멸시킬 수 있을지, 일제가 망한 다음 해방된 나라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사안들을 고민하고 실천하려 했다.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죽은 윤동주는 평생을 일제치하에서 살았으나 결코 일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국사람, 그리고 시인이었다.
<동주> 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 청년 윤동주, 시인 윤동주, 독립운동가 윤동주를 그렸으되 결코 절망하지 않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란 한 사람에 대한 어둡지 않은 아름다운 전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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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