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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은의 미소 : 비로소 사과할 수 있게 된 자의 기쁨
공정방송을 향한 방송노동자들의 투쟁의 결실
진행을 맡은 손정은 아나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성을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2017. 12. 26.)
“MBC에 대해 시민 여러분이 얼마나 실망하고 화가 나셨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웃는 낯으로 하는 속죄의 말에서 진심을 느끼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자사가 몰락해 온 7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쓴 반성문인 MBC <PD수첩> ‘MBC 몰락, 7년의 기록’ (2017년 12월 12일 방영)의 문을 열며, 진행을 맡은 손정은 아나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성을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응당 의아했을 장면이 이해가 되는 건, 손정은 아나운서와 그의 동료들이 지난 몇 년간 싸워 온 이유가 바로 이렇게 더 늦기 전에 사과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손정은 아나운서는 2012년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시작된 언론노조 MBC본부 파업에 참가했고, “경영진과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 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이유로 비제작 부서로 전보 조치를 당했다. 회사는 그에게 “더 이상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쓰지 마라”고 요구했다.
조금이라도 회사에 반기를 드는 직원들은 죄다 좌천되고 다른 인력으로 대체되는 환경 속에서, 들고 일어나 다시 싸울 기회를 노리며 굴욕을 참아야 했던 이들의 기록은 길고도 처절하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싸움이니 사정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2017년 1월 MBC 기자 막내 기수인 곽동건, 이덕영, 전예지 기자가 징계를 무릅쓰고 ‘최순실 게이트 보도 반성문’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릴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이 바뀔 거 같으니 이제야 눈치 보고 나온다.”며 손가락질을 하기 바빴다. 그러나 막내들이 쏘아 올린 신호탄의 불꽃을 영화 <7년, 그들이 없는 언론>(2017)이 잇고, MBC 김민식 PD의 SNS 동영상이 잇고, 다시 영화 <공범자들>(2017)이 이어가며 공영방송을 되찾고자 하는 투쟁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투쟁 대오의 앞으로 나선 손정은 아나운서는 종종 눈물을 보였고, 그럴 때마다 급하게 눈물을 감추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더 힘든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미디어오늘>, "손정은 MBC 아나운서 “5년 동안 스스로를 부정했다”. 2017년 8월 29일. 김도연 기자)
방송을 권력자의 손에 넘겨주고 굴종했던 이들을 쫓아낸 자리, 쫓겨났던 최승호 PD는 새 사장이 되어 돌아왔고 손정은 아나운서 또한 평일 <MBC 뉴스데스크> 앵커로 돌아왔다. 5년 만에 복직한 박성호 앵커, 2012년 파업에 참여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비제작 부서로 좌천되었던 김수진 앵커와 함께. 물론 망가진 방송을 복구해 시청자들의 신뢰를 되찾는 길고 지루한 노력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겠지만, 그래도 이제 그들은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세월을 떨치고 일어나 마침내 저희가 죄송하다고, 그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p.s. 권력으로부터 공영방송을 되찾겠다는 MBC 노조의 파업이 72일 만에 끝났고, 정리해고와 대주주의 방송 사유화에 맞서 싸운 OBS 노조의 투쟁 또한 장장 279일 만에 전원 원직 복귀로 매듭을 지었다. 이제 KBS의 차례다. KBS 새노조 또한 웃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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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