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지혜의 사적인서점
사적인서점은 서점인가요, 상담소인가요?
이 책을 읽으며 제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울산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던 이십 대 초반의 여자 손님이 보낸 편지였다. (2017. 12. 22.)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운영해도 괜찮은 걸까. 마음이 삐걱거리고 느슨해질 때마다 손님들이 보내준 편지를 처방약처럼 꺼내 읽는다.
사적인서점의 책처방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손님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책을 추천받고 싶은 손님과 고민 상담이 필요한 손님이다.
전자는 책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거나 이제 막 책의 재미에 빠진 분들인 경우가 많다. 베스트셀러 대신 나에게 꼭 맞는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떻게 골라야 할지 막막해서 신청하는 분들이다. 물론 책을 많이, 그리고 자주 읽는 분들도 사적인서점을 찾는다(사적인서점의 단골 리스트에는 K서점과 A서점 직원이 있다!). 그 정도 독서량이면 자신의 독서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텐데 왜 굳이 비용을 지불하고 사적인서점에 오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늘 같은 패턴으로 책을 고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골라 주는 다른 분야의 책을 읽고 싶어서 또는 주변에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많지 않아서 찾게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책보다 고민 상담을 원하는 손님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문 상담소를 찾아 가는 건 부담스러워서 사적인서점을 찾는다. 사실 책을 추천받고 싶어서 오는 손님들과의 상담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엔 현재 처한 상황이나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사적인서점은 서점일까, 상담소일까?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일대일 상담’ 방식을 적용한 이유는 손님들에게 책의 재미를 직접 전하고 싶어서였는데, 손님들은 책보다 상담 시간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걱정하고 있을 때 서점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울산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던 20대 초반의 여자 손님이 보낸 편지였다. 상담 후에 그분을 위해 내가 고른 책은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였다. 이 책을 쓰고 그린 봉현은 손님과 비슷한 나이에 여행길에 오른다. 지긋지긋한 현실이 싫어 도망치듯 베를린으로 떠났지만, 낯선 곳으로 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영어가 서툴렀기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돈이 부족했기에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으니까.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왔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남은 선택지는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뿐. 봉현은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은 그가 유럽을 시작으로 중동을 거쳐 인도에 머물렀던 이 년 동안의 기록을 담았다. 타인과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뾰족한 해결책이 담긴 책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쯤엔 아주 예쁘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마음을 담아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온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제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친구와의 끊이지 않는 트러블에 용기 있게 먼저 대화를 시도하고 문제의 타협점을 찾게 되었어요. 그리고 여행을 통해 뭔가가 달라진다거나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좀 더 온전히 나를 만나기 위해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전부터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안 가고는 못 배길 것 같아 내년 4월 여행을 준비하고 있어요. 첫 해외여행인데 잘 다녀올 수 있겠죠? 제가 만약 그날 사적인서점에 가지 않고 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제가 원하는 인생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을까요. 언니의 책처방 덕분에 구름에 가려진 제 진심을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이 책을 읽으며 제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어요”라는 문장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전한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인생에 씨앗이 되는 기쁨. 그때 느낀 감동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편지로, 문자로, 메일로 손님들의 답장이 이어졌다.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20 대 초반의 남자 손님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주변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가지고 사적인서점을 찾아왔다. 나의 처방전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서귤이 독립출판으로 첫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네 컷 만화책 『책 낸 자』였다. 때론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때론 자신감을 잃고 헤매고, 때론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서귤은 자신만의 서툰 방식으로 한 권의 책을 완성한다. 책을 냈다고 해서 서귤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두 번째 책을 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은 마음에 고른 책이었다. 공부 목적 외에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던 손님이었는데, 다행히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 장문의 소감을 보내와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40 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손재주가 많아 이것저것 만들면서 지내고 있지만 창업할 용기도, 회사로 돌아갈 자신도 없다며 고민을 토로한 손님에게는 취업과 창업 사이에 생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음을 알려 주는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를 처방했다. 손님은 평소 자신의 취향대로라면 읽지 못했을 책인데 고민에 작은 힌트가 되었다며, 직접 만든 달력과 함께 감사 편지를 보내주었다.
보통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책의 매력을 아무리 설명해도 책에 흥미를 갖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책이 있어 읽어보니 재미있었다’라는 체험을 한 적이 없다면 책의 세계에 깊게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책방의 역할은 그 ‘최초의 한 권’과의 만남을 좀 더 매력적으로 연출하는 것입니다.
ㅡ 『앞으로의 책방』, 141-142쪽, 기타다 히로미쓰 지음, 문희언 옮김, 여름의숲
사적인서점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장서량이 많지도 않고, 매일매일 문을 열고 책을 판매하는 곳도 아니다.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을 예약 없이 누구나 방문 가능한 오픈데이로 정한 건 적어도 서점다운 구석이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스스로 혼란스러웠던 만큼 다른 사람들도 ‘사적인서점이 무슨 서점이야’, ‘거긴 상담소지’ 하고 생각할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곳이 서점인지 상담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적인서점은 한 권의 책을 전하지만, 그 한 권이 가진 가치가 수십 권 수백 권과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서점의 역할은 책을 많이 파는 게 아니라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손님들이 나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관련태그: 사적인 서점,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책 낸 자,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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