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하고 싶다. 맥주를 시켜야겠다
스페인, 마요르카
그 여자가 덥다는 핑계로 매번 맥주를 마시는 꼴이 보기 싫다. 하지만 평소 말하기 싫어하는 그 여자가 살짝 취기가 올라 재잘재잘 말이 많아지는 걸 보는 건 행복하다. (2017.09.05)
맥주는 원샷노브레끼
이 분위기에 취하는 건가?
여기 사람들은 대낮부터 맥주를 마신다. 상당량의 와인을 생산하는 스페인이지만 여름엔 여기도 별수 없이 맥주인가 보다. 서울의 여름이 한증막 안이라면 마요르카의 여름은 용암로 옆이다. 쇳덩이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듯 몸을 태우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 우리도 속수무책이다. 여름을 피해 해외로 떠났건만 웬걸, 내 몸이 ‘미디엄 웰던’ 정도로 익는 듯하다. 이대로 객사客死 할 수 없으니 우리도 여기 사람들처럼 바르bar에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맥주 앞에 물어뜯을 오징어도, 바삭한 치킨 조각도 없다. 한 입 거리 타파스는 이럴 때 놓고 먹는 안주일 텐데 그마저도 없다. 그저 맥주 한 잔 시켜 놓고 야금야금 술만 마신다. 음주는 자고로 안주발이라고 배워 온 나로서는 인생의 쏠쏠한 재미 하나를 빠트린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내가 바르 주인이라면 어떨까? 안주 하나 시키지 않는 실속 없는 손님이 싫을 게다. 물론 맥주 한 잔만 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 있으니 정신 못 차리는 고주망태 손님을 찾아볼 수 없는 건 좋은 점이다.
그나저나 술이란 먹다 보면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동트는 걸 볼 때까지 이어지지 않던가! 딱 한 잔으로 끝내는 이들의 ‘절제미’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깔끔하게 딱 한 잔만’이라고 외치는 건전한 공익 광고 카피가 실현되는 바르는 어쩐지 현실적이지 않다. 취하기 위해서도, 안주를 먹기 위함도 아닌 이들의 맥주 한 잔에는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나도 한 번 느껴봐야겠어.”
그 남자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술 모임은 백해무익하다고 외치며, 혹시라도 술 생각이 나면 집에서 마시는 독주 한두 잔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나가서 술 마시는 돈을 가장 아까워한다는 말이다. 그 남자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럼 자기는 콜라를 마실 테니 나는 작은 잔으로 시켜 보란다. 위대한 시작으로 나쁘지 않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두 모금이면 끝나겠는걸!”
손바닥만 한 작은 맥주로는 성에 안 찬다. 절반가량의 맥주가 몸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들처럼 조금씩 조금씩 와인을 시음하는 것 마냥 시간차를 두어 마시고 싶었는데 역시 쉽지 않다. 역시 맥주는 원샷이지! 뜨거운 여름 한낮, 목구멍으로 찌릿하게 넘어가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들이 바르에 간 까닭은
집집마다 바람 잘 통하는 테라스도 있지만, 어쨌든 맥주는 바르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게 목구멍을 알싸하게 쏘는 청량감이라면 탄산수가 으뜸이다. 반면 그 여자는 한여름 갈증에는 맥주가 제일이라며 스페인의 더위 앞에서 매일 같이 마신다. 냉동실에서 꺼낸 것같이 차가운 생맥주가 담긴 유리잔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만 봐도 더위가 가신다나? 마시면 되려 취기에 몸이 달아오르는 나로서는 이해 못 할 말이다. 그렇다 해도 그 여자가 함께 마시자 조르면 못 이긴 척 제일 작은 잔으로 한잔하곤 한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 1층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바르Bar가 있다. 가격도 2천 원 정도이니 더운 날 한잔하고 들어가기 부담스럽지 않다. 덕분에 가게 사장하고도 중국어로 이야기하며 제법 친해졌다. 그날도 스페인어로 더듬더듬 '맥주 작은 거 하나, 큰 거 하나' 하고 주문하니 주인 양반이 작은 잔은 까냐Ca?a, 큰 잔은 하라Jarra라고 말한다며 일러준다.
사장의 말로는 이 건물 주민들은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하루에 한 번은 가게에 들러 맥주나 콜라를 마신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산책을 핑계 삼아 들릴 만한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동네 맛집도 아닌데 출근 도장을 찍는다니 말이다. 바람 잘 통하는 테라스도 집집마다 있으니 자기 냉장고에 맥주 재워 두고 마시면 될 것을 굳이 나와서 마시는 걸까?
그들 각자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방인인 내가 보기엔 대화 상대를 찾아 가게로 모여드는 듯싶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지구 최강의 쾌활한 분위기를 내뿜는 스페인 사람들이지만 말없이 혼자 있을 때면 당장이라도 테이블에 머리를 들이받을 것 같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집에 혼자 있다가 그 우울함이 극에 달하면 급히 집 앞 바로 달려 나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한 잔 들고 옆 테이블에 사람과 이야기가 시작되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도 아니면 아는 사람이 지나갈 때 꼭 불러서 말을 걸을 거는데 그 길 가던 사람도 대화 상대를 찾으러 나온 모양인지 아주 기쁜 얼굴로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가던 길 멈추고 자리 잡고 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든다. 테이블마다 그런 식이니 내가 보기엔 ‘말이 하고 싶다->아래층 가게에 가야겠다->집에 음료가 있지만 그냥 자리 차지할 수 없으니 맥주라도 한잔 시켜야겠다’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옆 테이블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게 주인이 주문한 맥주를 들고나와 내 앞에 ‘하라’(큰 사이즈 맥주)를, 그 여자 앞에 ‘까냐’(작은 사이즈 맥주)를 내려놓는다. 그녀는 “주인 양반은 맨날 내 앞에 작은 잔을 내려놓는다”며 투덜거리면서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다. 그 여자가 덥다는 핑계로 매번 맥주를 마시는 꼴이 보기 싫다. 하지만 평소 말하기 싫어하는 그 여자가 살짝 취기가 올라 재잘재잘 말이 많아지는 걸 보는 건 행복하다.
3개월의 여행의 끝이 다가왔고 한국이 돌아갈 날이 코 앞이다. 이 순간이 그리워지면 그 여자에게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잔 마시자고 해야겠다.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